마음의 서재 - 나만의 도서관을 향한 인문학 프로젝트
정여울 지음 / 천년의상상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한 번도 책을 많이 읽는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보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한다.  한달에 평균 스무 권 정도의 책을 읽는데 그럼에도 책을 읽기에 턱없이 모자란 시간을 원망하곤 한다. 세상에 좋은 책들을 조금이라도 더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허영된 사명감이라고나 할까. 가끔 독서 전문가들이라 하는 사람들이 다독을 기준으로 독서의 진정성을 따지려고 할 때마다 나는 의아함이 들곤 한다. 나는 적어도 책을 많이 읽고 적게 읽고가 독서의 깊이를 재는 잣대가 될 수 없다고 본다. 다독이 독서의 깊이를 말할 수 없다면, 다산 정약용이나 정조와도 같은 위인들이 수천권의 책을 읽고 수만권의 책을 썼다고 진정성이 없다 할 수 없는 것처럼 다독은 독서의 진정성과는 아무 상관 없다. 또한,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독서의 깊이가 얕다고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분명 내 주위에는 일년 내내 책 한 권 읽지 않아도 삶의 깊이가 묻어나는 진한 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 내가 생각하는 독서의 가장 큰 의미는 '자신만의 서재'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누군가 인문학이 도대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우리들이, 끝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모든 지식이 인문학이라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낯선 사람과도,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고 있는 야생동물과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각종 미생물과도,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우리가 굳이 애를 써서 찾아다니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타인의 고통과 만나는 것. 그 고통에 우리가 ‘가해자’나 ‘공모자’가 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하는 것. 그리하여 그들의 고통과 우리의 고통이 한곳에서 만날 수 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믿는다. 당신의 존엄과 나의 존엄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그 순간이 ‘번쩍, 하는 인문학적 교감’의 순간이다.

 

 

 

 

정여울의 《마음의 서재》에서는 '자신만의 서재'를 만드는 팁을 알려주고 있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자신에게 맞는 책을 찾게 된다면, 책이 어느 순간 마음에 들어오게 되며 자신만의 서재가 만들어지면 내게 안 맞는 책조차 커다란 스승이 된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 역시도 이런 경험을 통해 '독서'의 중심을 잡은 기억이 있다. 처음에  어떤 책을 읽을지 몰라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책을 고르거나 신간에서 책을 고르던 경험이, 그러나, '나만의 서재'가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독서는 수박 겉핥기식의 독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내게 어떤 책이 맞는지도 모른 채 ‘그저 읽는 ’ 맹목적인 독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던 중 인문학과의 만난 순간의 ‘번쩍’ 은 잊지 못하는 경험이다. 그렇게 경험한 인문학과의 만남으로 밤새는 줄 모른 채 읽은 적도 많았고 지금도 밤을 종종 새우곤 한다. 주위에서 아무리 인문학이 좋다고 해도 자신이 경험하지 못하면 소귀에 경읽기이다. 경험한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인문학과 교감하는 순간을 경험한 독자라면, 누구라도 이런 마음을 이해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뒤늦은 애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애정이다.

 

“나는 인생을 깊게 살기를, 인생의 모든 골수를 빼먹기를 원했으며, 강인하게 스파르타인처럼 살아,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때려 엎기를 원했다.”

 

자신의 뿌리를 자신의 '바깥'에 두는 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마음의 서재》는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유행 키워드들 '지못미', ‘세대교체’, ‘엄친아’,‘성형중독’,‘쇼핑중독’, ‘각종 SNS매체;,’소비‘,’정보‘, ’교육‘,’소시오패스‘,’헬리콥터맘‘,’우울증‘,’허영‘,’콤플렉스‘가 넘쳐나는 사회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서 푸코,다윈,헤밍웨이,도스토옙스키,프로이트, 토머스모어,벤야민, 캠밸, 소로의 삶과 문학을 통해 '자신'이라는 뿌리를 찾는 치유라는 개념의 인문학 서재를 완성하고 있다. 이러한 서재의 완성은 '자아 찾기' 로 시작하여 '타인'과 공감하며 '우리'로 완성되는 인문학의 교감을 얻게 되는 순간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인문학은 감동이다' 라는 공식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인문학은 나로 시작하여 우리로 맺어지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어쩌면 이것이 독서의 진정성이 아닐까 한다. 독서의 세계는 '나'라는 뿌리를 찾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네필 다이어리 - 철학자와 영화의 만남 시네필 다이어리 1
정여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영화를 좋아한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이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독후감이라도 남길라치면, 그 한계를 더욱 느끼곤 한다. 두 시간 밖에 안 되는 영상에 담겨진 깊은 삶의 의미에 때론 목마르다. 삶을  담기에는 사실 두 시간은 너무도 짧은 시간이다. 정여울의 《시네필 다이어리》는 영화에서 미처 깨닫지 못하였던 삶의 의미를 반추해주는 철학서이다. 굳이 철학서라 하는 이유는 거창함이 들어있는 어려운 철학서가 아닌, 이제 철학은 우리의 일상에서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의미로서 성큼 다가왔다는 느낌에서이다. 이 책은 그렇게 우리들의 일상에 철학의 메시지가 직접 말을 걸어오는 순간을 포착한 철학의 포토앨범 같은 책이다(p6)

 

‘시네필(cinephile)’이란 곧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cinephile)’, ‘영화(cinema)와 철학(philosophy)의 만남’을 가리킨다.

 

나는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빠져 있는 모습을 가장 싫어한다. 한때 텔레비전을 없앴을 정도로 텔레비전이 우리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싫다. 지금은 어느 정도 텔레비전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지만, 다시 없앨 예정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즐기는 문화생활은 영화와 독서 정도인데 그 중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은 가장 애지중지 하며 보는 영화이다.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가 주는 예술의 가치를 이해하는 수준은 극히 미미하다. 난 단지, 감동할 뿐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면서 아이들의 아름다운 성장을 그려보기도 하고 <이웃집 토토로>를 보며 나의 아이들도 저렇게 순수하게 자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보기도 하였다. <원령공주>를 보며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세상을 그리고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해주는 울림은 충분하다. 하지만, 그 안 담겨있는 철학은 어떤 의미일까?  정말 무심코 호기심에 펼쳐 본 책인데 첫 장부터 매료되어 한 호흡에 다 읽은 책이다. 가끔 우리가 무심코 보게 되는 내면의 것들을 누군가가 들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호기심처럼, 친절하게 영화에 담겨져 있는 철학을 알려주는 인문학 멘토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언젠가 한 번쯤은 영화가 지니고 있는 삶의 의미들, 진실의 편린들을 짜 맞추며 영화라는 퍼즐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멈추어 있는 내 수준의  ‘보는’ 영화를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를 발견하곤 한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내게 구원자인 셈이다. 영화 속에 숨겨져 있는 진실의 철학이 늘 궁금하였던 내게 조곤조곤하게 인생의 의미를 알려주는 친절한 선생님과도 같다.

 

 

<색,계>와 롤랑 바르트의 풍크툼

벌써 여러 번 본 영화이지만, 저자의 '시네필'로 이 영화는또 다른 색을 지닌다. 바로 사랑이라는 색.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굳게 믿었던 여자의 첫사랑으로 들려주는 색계는 '사랑이야기'로 철학의 풍크툼이란 의미를 설명해주고 있다.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안식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평화

-최승자 <사랑하는 손> 문학과 지성사-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망상의 벽돌로 지어진 견고한 영혼의 성벽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강력한 믿음의 다이너마이트로 폭발해버린 것이다. 절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해버린 여자가 자신의 죽음과 맞바꾸게 된 사랑이야기인 <색,계>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는 그저 평화롭다 못해 권태로웠던 세상이, 돌이킬 수 없는 영혼의 상처를 입었을 때야 비로소 그 투명한 속살을 보여준다. 절대로 나을 것 같지 않은 상처, 그렇게 지독한 상처의 틈새로만 간신히 보이는 세계의 투명한 아름다움, 그것을 롤랑 바르트는 ‘풍크툼’이라고 불렀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지프 캠벨의 신화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화적 상상력은 현실을 거부하는 가상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중요성을 박탈하여 현실에서 멀어지는 대체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현실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능동적인 판타지이다.(p103) 이렇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조지프 캠벨의 신화로 인해 지극히 명랑하고 낙천적인 신화적 상상력이라는 자아성장기로서 ‘씨네필’에서 다시 재생된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조지프 캠벨-

 

질 들뢰즈와 <시간을 달리는 소녀> 의 만남은 더욱 색다르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와  타임리프를 하는 소녀의 시간속에서 사랑은 시간을 초월하는 의미로 다시 재탄생되고 시간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과거와 현재 미래가 교차한다.

 

 

잃어버린 타인의 시간이 곧 잃어버린 나의 시간임을 기억하는 한. 너와 나의 시간을 분리할 수 없는 그 끝없는 모호성 위에 우리의 인연이, 너와 나의 ‘마주침’이라는 사건이 존재하는 한.

 

모든 대상들은, 우리가 그것들로부터 상징적 의미를 끄집어낼 때, 강렬한 드라마의 기호들이 된다. 그것들이 된다. 그것들은 감수성의 확장되는 거울들이 되는 것이다. 이 우주 속에서 우리가 그것들의 깊이를 모든 것에게 부여할 때, 우리와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슐라르 -

처음 강신주의 철학을 접했을 때의 신선한 충격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철학자 강신주는 참다운 인문학적 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영화는 이제 일상과도 같이 우리 삶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영화를 보며 우리는 감동하기도 하고 타인의 삶을 간접 경험하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롤랑바르트의 ‘풍크툼’,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들뢰즈의 ‘시간’, 바슐라르의 ‘몽상’이라는 철학은 일상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책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쉽게 영화를 보는 것처럼, 철학을 쉽게 끄집어내어 일상과 접목하는 부분은 매우 색다른 경험을 하게 한다. 더군다나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영화 또한 아는 만큼 보인다.  영화에 담긴 철학적 의미들을 간파해내는 것도 인문정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언젠가 인문학자는 인문학이라는 비밀스러운 방에 들어가게 해 주는 열쇠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씨네필 다이어리》는 정여울이라는 열쇠로 들어가는 방이다. 정여울을 통해 철학과 영화를 이해하는 과정은 우리의 날 것 그대로의 삶에 성큼 다가가게 해주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영화도 미디어일 뿐이다. 영화는 두 시간 만에 끝나버린다. 그런데 영화의 러닝타임은 두 시간 안팎이지만,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상영되기 시작된다.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끊임없이 새로운 물음표를 던지는 영화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평생 '1인분의 삶'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이 '타인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가는, 아주 제한적이지만 여전히 소중한 메시지의 통로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페에서 책 읽기 - 뚜루와 함께 고고씽~ 베스트컬렉션 39 카페에서 책 읽기 1
뚜루 지음 / 나무발전소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카툰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이 책을 보니 독서도 자신만의 온전한 독서법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네필 다이어리 - 철학자와 영화의 만남 시네필 다이어리 1
정여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철학자와 영화가 만났을 때, 시네필 다이어리를 낳았다. ㅎㅎㅎ 역시 정여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치가 떠난 자리
김만권 지음 / 그린비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무현 대통령의 묘비에는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이 쓰여 져 있다. 불과 몇 시간 전만해도 나는 깨어있는 시민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 정치가 떠나간 자리를 읽으면서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의미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국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책의 저자는 현재 뉴욕 뉴스쿨 정치학과에서 정치이론 및 법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연구자이며, 자유주의 및 공화주의 이론, 정의론, 민주주의 이론, 입헌주의 이론, 정치철학사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이 시대의 자유주의자라는 정체성과 깨어있는 시민으로서 이 책을 집필하였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보수와 진보에 대한 정치성향의 비판이 아닌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짚어주며 우리가 잃어버린 정치의 의미를 다시 되찾기 위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7년이 민주주의 30년 되는 해이다. 지난한 30년의 굴곡진 정치사에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사실상 깊이  뿌리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정치현실이다. 더군다나 자유시장주의로 인해 자본주의가 브레이크 없는 차처럼 폭주하고 있는 이 때에 민주주의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민주주의가 깊숙이 뿌리를 내리기 이전에 자본주의가 지나치게 앞서갔다는 것이다. 저자 역시 우리 사회에서의 민주주의 상실은 시민들의 직접적 참여의 부재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토대가 부실한 탓이라고 한다. 오히려 현실의 정치구조와 시민들의 직접적 참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민주주의 상실을 가져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의 상실 민주주의의 상실, 자유주의의 상실, 진보의 상실, 소통의 상실, 유토피아의 상실이 총체적으로 드러난 결과이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 책을 통해 꼭 이해하는 개념으로 두 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 있는데 바로 도망자 민주주의’(fugitive democracy)자유로운 시민게릴라라는 개념이다.

*‘도망자 민주주의’(fugitive democracy)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원래 민주주의가 의도했던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의 함의다. 민주주의가 도망쳐 버린 자리에 시민들의 모습. 정치엘리트들이 남용하는 정치에 무지할 뿐만아니라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구경꾼으로 그려내고 있는 시민의 모습을 일컬음이다.저자는 이러한 구경꾼의 모습을 한 시민들이 스스로 바라본 것을 자신의 말로 표현할 수 있고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으며 이런 해석을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을 수 있는 비판적 존재로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시민들이 스스로 해방된 관객으로 변모할 수 있다고 한다.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은 무지와 수동성을 벗어나 앎과 능동성을 추구하는 시민상을 자유를 확장하는 시민게릴라로 간명하게 표현되는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치적 존재로 빛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의 개인들이 자기들만의 의사와 견해를 지니고 그 의사를 공적인 장에서 공개적으로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본질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민주정치는 그 순간 끝이 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 한나 아렌트-

 

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국민이란 개념이 민족이란 개념과 함께 생존 및 필요에 의해서 비롯된 개념이지만 시민은 안정된 민주정체의 가치와 틀을 존중하는 개념으로서 차이가 있다고 한다. 민주주의의 한 근간을 이루는 민주주의의 people이라는 말의 번역은 국민이라 부르는 것보다 차이와 개인성을 인정하는 결속된 정치주체라는 속성을 가진 시민에 더 잘 어울린다고 한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잘 드러난다. 깨어있는 시민의 참 뜻은 자기만의 견해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독립된 주체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이 계란에 바위치기에 불과하였지만 결국은 수많은 계란의 깨짐으로 독립을 이루어내었듯이 니체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싸울 것이며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끝내 알아듣지 못할 지라도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듯이 , 매일 떨어지는 바위를 들어올리는 시시포스가 우리의 모습일지라도 깨어있는 시민은 멈출 수도 없고 멈춰서는 안되는 민주주의의 뿌리이며 근간이다.자유로운 시민 게릴라는 우리가 잃어버린 정치를 찾게 해 줄 열쇠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시민 개개인이 독립된 존재로서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글쓰기를 하라는 조언이 실려 있다. 이 부분이 정말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는데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설계하는 일로 사유하며 성찰함으로써 함께 참여하는 정치에 다가가라는 것은 점점 인터넷이 점점 발달하면서 정치의 형태가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통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최근 읽은 정치서적에서도 인터넷에서 형성되고 있는 헤테로토피아(이견과 차이의 중요성)’호모토피아(합의와 동의)’와 같은 새로운 계급의 자유로운 시민 게릴라’  형태에 귀추를 주목하고 있는데 온라인에서 형성되는 시민참여는 다른 어떠한 집단보다도 빠르고 쉽게 뭉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이 생각하는 뜻의 적확한 표현과 깊은 사유가 바탕이 되는 글쓰기가 더욱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는 현재 여러 가지 숙제를 안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견고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민주적 문화의 혁명을 이루어 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보수-진보 양 세력 간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는 보수-진보의 대격돌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팽팽하게 대립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보수 일변도의 사회에서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진보의 연대는 필수적이다. 서로간의 화합과 균형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당면한 문제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시민의 힘이다.  《정치가 떠난 자리》로 자유로운 시민의 한 걸음을 겨우 디뎌본 기분이다. 수준 높은 정치철학서로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왜 필요한지를 느끼기에는 , 충분한 책이다. 스테반 에셀이 무관심이야말로 민주주의 최고의 적이라 하였듯이 참여하는 시민, 깨어있는 시민으로서 이 책의 일독은 불가피해 보인다.

 

 

 

참다운 애국주의는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비판적인 시각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