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 다이어리 - 철학자와 영화의 만남 시네필 다이어리 1
정여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영화를 좋아한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이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독후감이라도 남길라치면, 그 한계를 더욱 느끼곤 한다. 두 시간 밖에 안 되는 영상에 담겨진 깊은 삶의 의미에 때론 목마르다. 삶을  담기에는 사실 두 시간은 너무도 짧은 시간이다. 정여울의 《시네필 다이어리》는 영화에서 미처 깨닫지 못하였던 삶의 의미를 반추해주는 철학서이다. 굳이 철학서라 하는 이유는 거창함이 들어있는 어려운 철학서가 아닌, 이제 철학은 우리의 일상에서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의미로서 성큼 다가왔다는 느낌에서이다. 이 책은 그렇게 우리들의 일상에 철학의 메시지가 직접 말을 걸어오는 순간을 포착한 철학의 포토앨범 같은 책이다(p6)

 

‘시네필(cinephile)’이란 곧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cinephile)’, ‘영화(cinema)와 철학(philosophy)의 만남’을 가리킨다.

 

나는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빠져 있는 모습을 가장 싫어한다. 한때 텔레비전을 없앴을 정도로 텔레비전이 우리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싫다. 지금은 어느 정도 텔레비전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지만, 다시 없앨 예정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즐기는 문화생활은 영화와 독서 정도인데 그 중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은 가장 애지중지 하며 보는 영화이다.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가 주는 예술의 가치를 이해하는 수준은 극히 미미하다. 난 단지, 감동할 뿐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면서 아이들의 아름다운 성장을 그려보기도 하고 <이웃집 토토로>를 보며 나의 아이들도 저렇게 순수하게 자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보기도 하였다. <원령공주>를 보며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세상을 그리고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해주는 울림은 충분하다. 하지만, 그 안 담겨있는 철학은 어떤 의미일까?  정말 무심코 호기심에 펼쳐 본 책인데 첫 장부터 매료되어 한 호흡에 다 읽은 책이다. 가끔 우리가 무심코 보게 되는 내면의 것들을 누군가가 들려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호기심처럼, 친절하게 영화에 담겨져 있는 철학을 알려주는 인문학 멘토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언젠가 한 번쯤은 영화가 지니고 있는 삶의 의미들, 진실의 편린들을 짜 맞추며 영화라는 퍼즐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멈추어 있는 내 수준의  ‘보는’ 영화를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를 발견하곤 한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내게 구원자인 셈이다. 영화 속에 숨겨져 있는 진실의 철학이 늘 궁금하였던 내게 조곤조곤하게 인생의 의미를 알려주는 친절한 선생님과도 같다.

 

 

<색,계>와 롤랑 바르트의 풍크툼

벌써 여러 번 본 영화이지만, 저자의 '시네필'로 이 영화는또 다른 색을 지닌다. 바로 사랑이라는 색.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굳게 믿었던 여자의 첫사랑으로 들려주는 색계는 '사랑이야기'로 철학의 풍크툼이란 의미를 설명해주고 있다.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안식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평화

-최승자 <사랑하는 손> 문학과 지성사-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망상의 벽돌로 지어진 견고한 영혼의 성벽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강력한 믿음의 다이너마이트로 폭발해버린 것이다. 절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해버린 여자가 자신의 죽음과 맞바꾸게 된 사랑이야기인 <색,계>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는 그저 평화롭다 못해 권태로웠던 세상이, 돌이킬 수 없는 영혼의 상처를 입었을 때야 비로소 그 투명한 속살을 보여준다. 절대로 나을 것 같지 않은 상처, 그렇게 지독한 상처의 틈새로만 간신히 보이는 세계의 투명한 아름다움, 그것을 롤랑 바르트는 ‘풍크툼’이라고 불렀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지프 캠벨의 신화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화적 상상력은 현실을 거부하는 가상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중요성을 박탈하여 현실에서 멀어지는 대체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현실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능동적인 판타지이다.(p103) 이렇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조지프 캠벨의 신화로 인해 지극히 명랑하고 낙천적인 신화적 상상력이라는 자아성장기로서 ‘씨네필’에서 다시 재생된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조지프 캠벨-

 

질 들뢰즈와 <시간을 달리는 소녀> 의 만남은 더욱 색다르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와  타임리프를 하는 소녀의 시간속에서 사랑은 시간을 초월하는 의미로 다시 재탄생되고 시간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과거와 현재 미래가 교차한다.

 

 

잃어버린 타인의 시간이 곧 잃어버린 나의 시간임을 기억하는 한. 너와 나의 시간을 분리할 수 없는 그 끝없는 모호성 위에 우리의 인연이, 너와 나의 ‘마주침’이라는 사건이 존재하는 한.

 

모든 대상들은, 우리가 그것들로부터 상징적 의미를 끄집어낼 때, 강렬한 드라마의 기호들이 된다. 그것들이 된다. 그것들은 감수성의 확장되는 거울들이 되는 것이다. 이 우주 속에서 우리가 그것들의 깊이를 모든 것에게 부여할 때, 우리와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슐라르 -

처음 강신주의 철학을 접했을 때의 신선한 충격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철학자 강신주는 참다운 인문학적 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영화는 이제 일상과도 같이 우리 삶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영화를 보며 우리는 감동하기도 하고 타인의 삶을 간접 경험하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롤랑바르트의 ‘풍크툼’,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들뢰즈의 ‘시간’, 바슐라르의 ‘몽상’이라는 철학은 일상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책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쉽게 영화를 보는 것처럼, 철학을 쉽게 끄집어내어 일상과 접목하는 부분은 매우 색다른 경험을 하게 한다. 더군다나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영화 또한 아는 만큼 보인다.  영화에 담긴 철학적 의미들을 간파해내는 것도 인문정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언젠가 인문학자는 인문학이라는 비밀스러운 방에 들어가게 해 주는 열쇠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씨네필 다이어리》는 정여울이라는 열쇠로 들어가는 방이다. 정여울을 통해 철학과 영화를 이해하는 과정은 우리의 날 것 그대로의 삶에 성큼 다가가게 해주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영화도 미디어일 뿐이다. 영화는 두 시간 만에 끝나버린다. 그런데 영화의 러닝타임은 두 시간 안팎이지만,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상영되기 시작된다.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끊임없이 새로운 물음표를 던지는 영화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평생 '1인분의 삶'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이 '타인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가는, 아주 제한적이지만 여전히 소중한 메시지의 통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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