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초 : 한 남자 사랑의 기초
알랭 드 보통 지음, 우달임 옮김 / 톨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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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이제는 추억으로만 느끼는 나이가 되어서인지, 사랑과 함께 떠올려지는 그 애틋하고도 간절함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하면 그런 때가 내게도 있었지.’ 하며 대담한 척 하곤 한다. 열렬히 사랑해서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남들보다 긴 연애시절을 거치고 남은 것은 사랑보다 더 끈끈한 우정, 보다  진한 감정으로 결혼하였기 때문에 더 좋은 면도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생활이  가끔 외롭고 서글픈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알랭 드 보통의 사랑의 기초-한 남자를 읽으면서 비로소 그 정체를 알게 되었다. 내 안에  맴돌았던 양가 감정에 대해서 동지적 연대감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알랭드 보통이 스스로가  마흔에 접어들며 느끼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짧은 고찰들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열렬히 사랑해 결혼에 성공한 부부인 벤과 엘로이즈를 중심으로 가정생활, 자녀양육, 사랑과 섹스 등에 관한 느낌을 솔직하고도 담백하게 이야기를 해나간다

 

사랑

미치도록 사랑한 벤과 엘로이즈,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고통이 찾아온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고, 배우자와의 애정관계에도 문제가 생기고 결혼을 하자마자 배우자는 교육자로 변신하여 끊임없이 생각을 개조시키려 들때, 더욱 그렇다. 벤은 자신의 결혼생활을 되짚어보면서 자신의 삶에 어떤 것이 문제였을까를 생각해보게 되는데 열렬히 사랑했던 엘로이즈가 여자의 의미가 아닌 그저 '인간'으로 여겨지게 되면서 결혼이라는 제도가 가지고 있는 모순까지도 생각해본다. 결국 결혼이란 부르주아가 발명하여 부르주아들의 강력한 옹호와 지지속에서 발전해오며, 결국 계급과 제도의 산물이었으며 , 우리가 믿고 있는  낭만적인 사랑 또한 부르주아의 발명품이라고 믿게 된다.  자본주의의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 낭만적 사랑에 매달린다는 생각을 하며  프로이드의 " 그들은 사랑하면 정욕이 사라졌고, 정욕을 느끼면 사랑할 수 없었다." 에서처럼 일부일처가 주는 결혼제도의 부당함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벤에게 찾아온 한 번의 사랑, 가슴이 두근거리고 섹스가 know라는 동의어로 인식된 여자와의 외도를 통해 결국 그것이 결혼과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또한 깨닫는다.

이어 일상으로 돌아와 바쁘고 정신없는 회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남은 저녁시간을 근사하게 보내는 공상을 하며 퇴근하였지만, 현실에 그를 기다리는 것은 다음과 같았다.

 

두 아이, 조금 지친 아내, 그리고 모종의 위기.

 

 

가족

《정진홍의 사람공부》에서 부모가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도전과 응전의 정신, 그 가치만 가르치면 된다고 하였듯이 아이들 교육에 있어서 내가 아이들에게 가장 가치있게 생각하는 부분도 그런 정신적인 부분이다. 지나치게 영민하고 아름다운 유년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 , 자연과 이어져있는 순수한 생각들, 밤마다 잠들어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무한한 경이로움을 느끼는 그 달콤한 순간들을 사랑하지만, 그 배후에 전개되는 어른이기에 감당해야 하는 고달픈 삶을 느낄 때마다 가슴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외로움과 고독은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만큼 아이를 키운다는 것과 부모로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벤에게서 그런 느낌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이다. 부모로서의 감정은 아마도 같은 부모라면 매한가지 인가 보다. 벤은 아이들에게 요즘 부모들이 과잉보호하는 모습에서 그럴 필요가 전혀 없으며, 자식들이 부모가 되어서도 부모의 그늘에 두어서는 안된다고 한다.(나역시도 그런 생각을 해 왔기에 )  자식에게 높은 지능보다는 비전과 야망을 품은 정신력, 거절이나 실패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심리적 유연성등을 물려주어야 한다고 할 때, 부모로서 심히 공감되는 부분이었다.

 

 특별한 나는 세월이 흐르면 점점 희미해져갈 필요불가결한 환상이다. 그 결과로 얻게 된 자기연민의 마지막 흔적조차 사라질 마흔 살 무렵이 되면 헛된 꿈에서 깨어나 우리의 어리석음과 죄 많음을 똑똑히 바라보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섹스

벤은 결혼 후 성적욕망을 아내에게 충족시키지 못하자  밤마다 인터넷 포르노에 중독되어가며, 자신의 욕망의 메커니즘에 대하여 생각하는데 현대의 결혼은 섹스, 사랑, 가족이라는 세가지 욕구를 조화시킬 수 있는 무대로 정의되었다고 한다. 이 중 어느 것에도 조화롭지 않은 순간 , 결혼생활은 헝클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사랑해서 결혼했음에도 어느 것 하나 충실할 수 없으며 세월이 흘러가며 진정으로 사랑해서 결혼하는 사람이 있을까 회의하는 모습에서는 왜 그렇게 공감이 가는 것일까.

 

엘로이즈 때문에 몹시 화가 났을 때는 그녀가 차에 치여 죽어버리면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십 분 뒤에는 엘로이즈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이 느껴졌다.

 

유난히 피곤한 날 이 책을 읽었다. 아이들은 빽빽대고 남편은 늘 공사가 다망하고 , 나는 집안일의 스트레스와 동시에 업무의 스트레스로 졸도할 지경이었다. 우린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린 정말 사랑했을까? 를 떠올린다. 알랭드 보통이 말하는 궁극의 결혼의 모습 - 사랑, 가족, 섹스-에 대해서 생각해 보건데, 나는 유명한  연예인들이 텔레비젼에 나와서 말하는 '저 행복해요' 라고 말하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믿지 않는다. 행복하다고 자랑하는 부부치고 이혼 안하는 부부 없으며, 경제면에서 클리어한 부부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결혼은 알랭 드 보통이 말한대로 자본주의 속 계급과 제도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외국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우리나라 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때마다 성에 대한 자유로운 표현이나 인식이 부러울 때가 있다.(?) 그만큼  '성'(섹스)라는 욕망의 메커니즘이 지나치게 솔직한 나라의 작가가 말하는 성과 일반적으로 한국에서의 성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랭드 보통이 말하는 사랑과 결혼과 섹스에 대한 탐구에는 동지적 연대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결국 부부생활의 진리는 '우리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연습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가 있어야만 궁극의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다는 알랭드 보통의 이야기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결혼탐구서와 같은 느낌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이라는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를 그럭저럭 계속해나가는 단순한 일, 이것이 진짜 용기이며 영웅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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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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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녀하면, 내가 음흉한지 몰라도 왜 그녀들의 성이 더 궁금한 걸까? 왕하나만 바라보며 독수공방, 절해고도의 섬에 외롭게 늙다간 궁녀를 떠올려보면 , 그네들의 삶이 참 가엽다는 생각을 하곤 하였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무리 권력의 정점이라 해도 왕(남자)하나에 여자 수백명은 늘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곤했다. 남자면 다야? 하는, 하지만 궁녀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기존에 내가 상상하고 있던 궁녀가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은 안도한다. ( 좀 덜 억울하다는 ㅋ~)...  기존에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임금의 애정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랄하고 표독스러운 궁녀의 이미지였다면, 이 책의 《궁녀》에서는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 당당하게 조선왕조라는 문화를 형성한 일등공신으로서의 궁녀를 재조명한다. 저자는 조선의 궁녀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부족함을 학문적 탐구로서 사료를 바탕으로 저술하였다. 기존의 흥미와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미지의 궁녀로서 조선의 역사를 보려 하는 것은 조선의 역사를 상상의 영역에 편입시켜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 의한 연구이다.

 

책의 구성은 총 6개의 장이며 1장- '역사의 파편에서 찾아내는 궁녀의 진실'에서는 삼천궁녀라는 표현이 주는 문학적 표현으로 인해 부정적 의미가 중첩되어진 궁녀의 이미지를 말하며, 2장-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그녀들'에서는 조선시대 궁녀중 신데렐라와 같은 삶은 산 신빈김씨와 광해군을 쥐락펴락하며 권력의 중심속에서 악녀를 자처한 장녹수의 삶을, 김옥균을 도와 갑신정변의 중심에 있었던 최초의 혁명가로 불리워지는 여인 궁녀 고대수, 게다가 명나라에 공녀로 갔다가 궁녀가 되어 황제 영락제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으나 순장당한  청주 한씨,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넘어가  도구카와 이에야스의 궁녀가 된 오따 줄리에, 소현세자를 따라 온 명나라출신의 궁녀 굴씨의 생애를 통해서 그녀들의 파란만장하고도 녹록치 않았던 삶을 말한다.

 

이어 궁녀가 되기 위해 갖춰야 했던 자격요건과 출신성분, 궁녀라는 조직체계까지 기존의 역사서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비밀스러운 면모까지 살펴본다. 또한  대부분이 궁녀를 왕의 여자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기에 왕이 모든 궁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곤 했는데 저자는 왕이라 해도 실제로는 자신에게 소속된 궁녀들만 관할할 뿐 관할을 벗어나는 왕비, 대비, 후궁, 세자궁에 소속된 궁녀에 대해서는 선발권조차 없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흥미로왔던 것은 궁녀의 입궁나이인데 빠르면 네살에서 여섯 살,  늦어도 열두 살 안팎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에 나와있는 어린 궁녀의 사진에 실소가 터진다. ( 울 막둥이보다 더 어려보여서^^;;;)


5장의 '궁녀의 일과 삶' 에서는 궁녀의 월급, 재산, 심지어 부동산 투기로 부동산 재벌로 불리우던 상궁 박씨의 존재를 보며 대체적으로 궁녀들이 그다지 가난하게 살지 않았음을 알수 있다. 어떤 궁녀는 궁궐내에 있는 식재료(후추같은..)를 되팔기도 하며 재산을 일구기도 하였다.  


6장 '궁녀의 성과 사랑'은 가장 흥미롭게 (^^;관심분야인지라 ㅋㅋ) 읽었는데 식욕과 성욕 , 두가지는 모두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구이지만, 구중궁궐에서는 당연히 성욕은 절대금지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통 사건도 있었고 동성애도 있었고 내시와의 사랑도 있었다. 세조의 후궁이었다가 평생 짝사랑만 하다가 능지처참된 덕중의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애처로움을 넘어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렇게 궁녀를 통해 보는 조선의 궁중문화는 무척 색다른 역사의 이면을 보여주는데, 모름지기 역사는 단면만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엄연히 조선은 궁중문화를 형성한 왕조이다. 그런 왕조를 지탱해주며 오백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임금을 위시한 궁궐이라는 하나의 잘 짜여진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으리라 본다. 조선시대의 궁중은 그만큼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에 공과사를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중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좌나 우에 집착하지 않고 위아래의 편견에서 벗어나야하는 중심에는 왕의 침전이 있었으며 그 내면에 궁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녀의 진면목을 살피는 책은 거의 전무하다. 그것은 궁녀가 비밀스럽고도 임금의 역린과 같은 지극히 사적인 이유도 없지 않아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중용이 필요하듯이 역사 또한 중용이 필요하다. 사회,경제,문화가 서로 어우러진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역사를 형성하듯이 우리의 역사를 보는 시각은 한 쪽에 치우치거나, 편견으로  역사를 바라보게 되면 역사의 진정성과는 멀어진다. 따라서 궁녀를 기존의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닌 생생한 민낯으로서의  궁녀이야기는 조선 역사의 진정성에 한발  더 다가간 느낌이다. 이제껏 단편적으로 궁녀를 '왕의 여자'로만 인식해왔으나, 조선 '궁중문화를 이끈 주인공'으로서의 궁녀는 흥미로울 뿐아니라 역사를 총체적이고도 거시적인 안목을 선사해주는데 의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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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언제나 익명으로 여행한다
로랑 구넬 지음, 김주경 옮김 / 열림원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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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수많은 자기계발서를 읽어왔다. 워낙 경쟁이 치열했던 직업을 가진 탓에 젊은 날의 나를 지탱시켜 주었던 책은 자기계발서였다. 특히 양장본임에도 너덜너덜해져 최근에 다시 구입한 <세상을 보는 지혜>는 험한 세상에서 나를 바르게 살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인생의 지침서였다. 이제는 자기계발서로 나를 다잡기엔 늙어버린 이유도 있지만, 어느 정도 내 삶에 틀이 잡혀있기에 읽지 않는 이유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자기계발서를 읽으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는 거 보면 아직 더 살아야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려나...이 책은 마치 자기계발서를 일상에 적용하여 이야기로 보여주는 ‘눈으로 보는 자기계발서’ 같다. 심리 치유 소설이라는 새 분야를 탁월한 스토리텔링형식으로 풀어가고 있다. 《신은 언제나 익명으로 여행한다》는 표지에서 느껴지는 그대로 아날로그적  감성을 느끼게 한다.

 

 

 

 태어나면서 버려졌고, 거듭된 불행속에서 앨런 그린모어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어머니로 인해 어머니가 원하는 삶을 살았던 앨런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사랑하는 여자 오드리가 떠나자, 자살하기 위해 에펠탑으로 올라간다. 자살하기 직전, 에펠탑에서 만난 이브 듀브레유와 이상한 거래를 하게 되는데. 이 남자는 앨런 그린모어에게 남은 삶을 변화시켜 주겠다고 한다.

 

 

“ 자네가 죽지 않고 삶을 계속하겠다면 내가 자네를 돌보겠네. 자네가 바른 길로 들어서도록, 자기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갈 수 있도록, 그래서 자네가 행복해지도록 만들어주겠네. 그 대신……. 내가 말하는 모든 걸 행해야 해. 삶 속으로 ……. 뛰어들라는 소리지.”

 

 

이제껏 남에게 맞추어오며 살았던 앨런 그린모어에게 자신에게 각인되어 왔던 것들이 앨런 스스로를  불행하게 했으며 삶에서 희생자로만 살아왔다는 질책을 하며 앨런이 삶의 패배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인생의 희생자로서 살면서 희생에 대한 보상으로 인정을 받고 싶어 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면 푸념과 불평,불만을 가슴 속에  담아두고  살았던 삶을 버리고 이제부터는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야 한다며 듀브레유는 몇가지 주문을 하는데,

 

 

첫 번째 미션은 빵집에 가서 빵을 여러번 주문하고 여러번 거절후에 그냥 나오는 것.

두 번째 미션은 고급시계점에서 시계 마구잡이 고르다가 그냥 나오기.

세 번째 미션은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무조건 딴지걸기.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았던 앨런에게 이런 것들은 힘든 주문이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으로 시작되었던 미션들을 수행해가면서 그린모어는 자신의 삶이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데 우선 이런 미션들이 요구하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반대입장을 내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이십사년을 살면서 처음으로 해보인 '나'를 내보이는 행위였으며 그 행동으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방법을 습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희생자로 자처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네

 

 

 

친아버지와 양아버지 모두에게 버림받았으며, 어머니에게 억압당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앨런은 비로소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어렸을 때부터 부족함이나 실수, 실패라는 부정적인 말들이 사고방식으로 굳어져 스스로를 항상 무능한 존재라는 자기비판으로 대해왔다. 그리고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뇌에 깊이 새겨지게 되어감에 따라 성인이 되어서도 줄곧 자신을 부정해왔다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처음으로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 앨런은 자신을 옭아매던  굴레의 일부가 떨어져나가고, 불필요한 매듭 같은 것이 풀어진 기분을 느낀다.

 

 

우리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 앨런의 변화과정은 그런 '나'를 바로볼 수 있도록 한다. 앨런의 변명과 자기부정은 비단 앨런의 것만이 아닌 우리가 평상시 자주 하던 변명이자 자기부정이다.  그 속에 ‘나’와 닮은 앨런의 모습을 보며 혼자 웃다가 울기도 한다.  남을 의식하느라고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다가 화가 되는 경우도 있었기에 앨런의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를 찾아가는 앨런의 모습처럼 타인의 시선에 갇힌 '나'의 모습이 아니라 자유와 기쁨이라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내어보고 싶다. 듀브레유의 훈련으로 자신의 존재를 바로보게 되자 두 번째 훈련은 타인의 소통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것은 칼 야스퍼스의 “인간은 다른 이에게 자신을 내줌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된다.” 는 의미를 상처 치유에 적용해 볼 수 있다. 혼자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기에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 '타인을 위한 사랑이 상처의 항생제가 된다' 는 것을 앨런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기존에 앨런을 지배하였던 타인에 대한 불신과 삶의 회의가 반전되며  진정한 자아를 찾으며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앨런은 새롭게 태어난다. 소설의 마지막에 듀브레유의 눈에 가득찬 눈물을 보며 , 소설속에 가득한 '상처의 항생제'를 통해 우리의 아픈 상처에서도 꽃이 피어나기를 ... ^^

 

《네 이웃의 세계를 껴안아라, 그리하면 그 세계가 네게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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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 수 있겠니
김인숙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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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다가 꿈을 깨고 보니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비가 사람이 된 꿈을 꾸고 있는지 사람이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소설 미칠 수 있겠니를 읽으면서 장자의 호접몽을 말하는 것이 좀 쌩뚱맞을지 모르지만, 어제까지 장자에 심취해 있어서인지, 이 책은 마치 장자의 삶의 연장선 같다. 삶의 본연의 모습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에 삶은 어쩌면 한 낮의 꿈인지도 모른다. 처음 이 소설 미칠 수 있겠니는 제목 때문에 읽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안 그래도 미치지 않고는 , 제정신이 아니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 제목까지 도발하듯 자극적이다. 어제는 한 여중생이 동네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조그만 곳이라 소문이 빠른 것인지 그런 사고가 유독 많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살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어쨌든 불편한 소문이다. 어떤 철학자가 말했듯이 삶은 살아내는 것이라고 했건만, 요즘은 삶을 살아내기 싫어 죽는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어쨌든 살아내는 것이다. 첫사랑이 찾아올 때 지독히 아팠던 것도 지나고 나면 다 아무것도 아닌게 되고, 가슴 두근거리던 설레임 이란 녀석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자리를 찾아 사라져간다. 삶을 뒤흔드는 상처 또한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낮잠과 같은 것이다. 삶은 그저 살아내다 보면, 살아지게 되는 것이고, 살아지다 보면 살게 되는 것이다 

 

미치도록 사랑했지만, 자신을 떠난 남자를 찾아 섬을 헤매는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진, 남자의 이름도 진, 진과진의 만남은 이름처럼 운명으로 맺어졌다.사랑했던 남자와 여자. 미치도록 사랑했지만, 사랑의 열정은 다른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삼 개월을 넘기지 못하였다. 변해가는 사랑 앞에서 차마

사랑이 변하니? 

따위 같은 물음은 하고 싶지 않았던 여자 진. 그러나 남자 진의 아이를 임신한 한 여자아이 앞에서,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

이후 누군가가 죽었고, 누군가가 떠났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그 후 7년을 떠나간 남자 '진'을 찾아 헤매고 있는 여자 '진'이 있다.

 

사랑은 얼마나 가벼운가. 그것이 전 생의 무게보다도 더 무거운 거라고 믿어도, 서로를 못 견딜 지경이 되면 결국 밀어 올려지고, 마침내 갈라지는 것이다.

 

어김없이 진을 찾아 섬에 들린 진, 기억을 봉인한 채 7년전의 그날을 기억하지 못했던 그녀는 섬에 사는 택시 드라이버 이야나를 통해 자신의 봉인된 기억을 풀어 낸다. 그날 이후 한번도 기억한 적도 없고 오로지 자신만 알고 있는 사건의 내막을 기억해내고....... 늘 죽음을 꿈꾸며, 죽기 위해 산 남자 이야나와 돈많은 의붓어머니가 자연사하길 기도하는 '만'을 통해서 눈꼽만큼 없는 인생에 보태진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살아가야만 하는 '삶의 처절함'은 통렬하다 못해 신랄하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섬 전체를 사라지게 한 지진은 이들에게 오히려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  

 

이야나는 사라지는 것보다 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사라지면서 남겨진, 참혹하고 처절한 흔적들이었다.

 

제목과는 너무 다르게 이들의 사랑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삶에서 상처는 없을 수 없다. 수많은 상처 앞에 초연하기도 힘들다. 인생이라는 배를 항해하다 보면 궂은 날씨로 고생도 하고 암초에 부딪히기도 한다. 그리고 그 위기를 잘 이겨내고 나면 한동안은 순탄한 항해가 기다리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너무 식상한 이야기일지라도 오랜 세월 수많은 상처를 견디어내다 보면 그 믿음은 더 강해진다. 지금 이순간의 아픔을 이겨내며 살아내다 보면, 언젠가 더 행복하고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미칠 것만 같았던 그날 이후 이 자신의 사랑을 찾아 헤매는 마음처럼, 그런 간절함으로 삶에 집착하며 그 순간을 영원처럼 살아가지만, 그런 순간은 낮잠에 불과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상처 때문에 괴롭고 아프고 미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해주고 싶다. 지금의 아픔을 다독이고 위로해 주는 책이 있다고, 그것보다 좋은 책은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삶이란 죽음의 가벼운 옷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살겠다고 생각했고, 살아있는 한은 이 삶을 믿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당신이 그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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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신동준 지음 / 인간사랑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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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모험>을 읽으면서 <장자>의 원전을 읽어보고 싶었는데 <중국현대사>와 <조조 사람혁명>을 통해 접해보았던 고전연구가 신동준의 고전에 관한 해석과 판단이 마음에 들었던지라 ,<장자>를 읽으면서도 흡족한 마음이 든다. 사실 공자나 맹자, 노자등은 많이 접해본 사상가이지만, 장자는 조금 모호한 느낌의 사상가이다. 그저 도가의 뿌리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장자에 대해서 모처럼 제대로 알게 되어 기쁜 마음이 든다.

 

 

21세기에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사상가는 장자이다. 최근에 더욱 장자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기존에 장자에 대한 해석에 오류가 많았던 이유이지 싶다. 저자는 기존에 노장老壯 사상의 통칭으로 노자와 장자를 같이 보게 된 것에는 사마천의 책임이 크다고 보았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두 사람을 ‘무위’를 사용한 점만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탓이라고 한다. ‘무위 자체만을 놓고 볼 경우 한비자가 오히려 노자사상의 정곡을 꿰뚫었다고 평할 수 있다. 여기서 노자가 ’무위‘(無爲)를 주장했던 것은, 통치자가 ’무위‘에 도달하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만, 장자의 무위는 국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진행되는 권력의 집중에 반대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장자는 여타 제자백가와 달리 ’무위자연‘을 역설하며 ’나‘를 중심으로 천지자연과의 합일을 주장했다. 반면 노자는 국가의 권위와 지배를 정당화한 반면 장자는 국가의 권위를 부정하고 민중들의 연대를 추구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 따라서 ‘노장’도 ‘공맹’과 마찬가지로 무위를 전면에 내세운 장자의 주장에 현혹된 결과로 볼 수 있다. 맹자가 묵자사상의 계승자인 것처럼 장자 역시 노자가 아닌 양주학파의 일원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장자사상의 가장 큰 특징을 ‘무위’가 아닌 ‘자연’에서 찾는 이유다.

노자

인→지→천→무위의 도 =무위자연

장자

인→지→천→무위의 도→무위자연

이는 노자사상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같은 도가 계열일지라도 노자사상을 유柔, 열자사상을 허虛, 장자사상을 무無,로 요약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장자는 삶과 죽음을 ‘무’에서 ‘무’로 돌아가는 자연의 순환과정을 파악하였다. 이에 관한 장자의 생각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제물론』에 나오는 호접몽胡蝶夢일화이다. 장자가 말하는 만물의 변화 즉 물화는 ‘나’와 외물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된 일종의 무아지경無我之境에 해당된다. 불가에서 말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와 꼭 같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문 장자사상의 상징어가 바로 ‘호접몽’이라 볼 수 있다. 강신주의『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모험』에서도 호접몽을 삶과 죽음의 경계로 보았는데 꿈에서 깨어나 ‘삶’의 세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은 장자 사상의 정점이다. 이렇게 장자는 ‘나’를 중심으로 생生의 문제를 해석했다. ‘나’와 외물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바로 물아일체의 경지이다.

 

 

“원래 사람의 생명은 임시로 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빌려서 살고 있으니 생명이란 먼지나 때와 같은 것이고, 삶과 죽음 역시 낮과 밤의 교대와 같은 것이다.”

 

 

인간이 죽음에 대처하는 유형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첫째, 향락에 빠져 죽음을 잊는 유형.

둘째, 위대한 업적을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영원히 남기는 경우.

셋째, 종교에 귀의하는 유형.

장자는 이들 3가지 유형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바로 죽음에 초연하는 것,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마음자세를 가지게 되면 세속적인 것에 초연하게 되고 , 유한한 삶 위에 권력과 재물 및 명예를 쌓기 위해 부질없이 남과 원한을 맺으며 정신없이 살아가느니 차라라 천지자연 속에 몸과 마음을 맡겨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장자가 택한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이다. 저자는 우주를 품안에 껴안고 살아가게 되면 삶 자체를 관조할 줄 아는 안목이 생기며 이런 생각을 글과 언행으로 남기면 문예창작과 자연이치의 발견을 남긴다고 한다.

 

 

21세기에 들어와 장자사상을 과학주의와 연결시켜 해석하는 견해가 점증하고 있는 것이 저간의 흐름이다. 특히 장자는 상대성원리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주의 모든 물체는 상호 연결돼 생장소멸의 부단한 순환활동을 한다고 보았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이 내재해 있는 기계론적이면서도 원자론적인 세계관은 ‘인간소외’와 ‘비인간화’를 부추기는데 일조했다. 21세기의 기본과제는 인간이 주체가 되는 인간 삶의 회복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장자가 말하는 세속의 명리에 초월하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 과거에 장자를 현세를 떠나 무위자연속에서 안빈낙도의 삶을 추구한 사상가로서 보았지만, 장자의 사상은 오히려 현실세계에서의 깨어남을 강조하였다.-[소요유]와 [덕층부]. [제물론]에서 나오는 꿈이야기로 보아도 삶을 부정하게 만드는 모든 것은 꿈으로 비유하며, 꿈에서 깨어나서 ‘삶’의 세계를 회복해야함을 역설한다. 저자는 기존의 장자를 문예와 철학의 보고로만 보아오던 것을 장자의 사상안에는 리더십으로서도 훌륭한 보고가 있음을 명시한다. 실제로도 장자의 이야기는 동화같기도 하고, 이야기가 명확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예전에도 장자를 몇 번 읽어보려 시도만 하고 다 읽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지만 조금의 상상력과 해설자의 친절한 설명이 장자를 완독할 수 있게 해주지 않았나 싶다.

 

 

“스스로를 옳다 여기면서 다른 사람을 그르다 하고, 자신을 아름답게 여기면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러하다. 그러나 시비는 비록 다를지라도 ‘나’와 ‘너’는 원래 균등한 것이다. -1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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