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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연대기 -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시간의 모든 것
애덤 프랭크 지음, 고은주 옮김 / 에이도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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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About Time ; Cosmology and Culture at the Twilight of the Big Bang(2011;미국)

 

인문학의 감성 더한 물리학의 시간

    

인간의 시간을 최근 새롭게 이해하게 된 우주의 시간과 연관시켜 설명함으로써, 우리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어떤 다른 시간을 창조할 수 있는지를 더 잘 알 수 있다.

- 애덤 프랑크, 저자 서문

 

석 달째 매월 1일이 되면 전달 출간한 인문, 사회, 과학, 예술 신간을 모조리 검토하고 있다. 중복 포함해서 1,000권에서 1,200권 정도를 보는데 최소한 3시간에서 5시간 정도는 투자한다. 분석 글을 쓰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걸린다. 그보다 빨리 훑으면 얻는 것도 없고 책과 출판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평소에도 틈틈이 신간 정보를 검색하고 괜찮은 신간들을 제목을 기억해두거나 얼른 구해 읽어보긴 하지만 신간 목록 전체를 보면 또 느낌이 다르다. 그 달의 흐름도 보이고, 그 달 출판 관련 뉴스와 잡지들이 쏟아냈던 기사들이 한 번에 정리된다. 석 달을 하니 습관 같이 느껴진다. 목록을 보면 책도 책이지만 이달에 새로 생긴 출판사도 발견하고 눈이 가는 심상치 않은 출판사도 발견하게 된다. 에이도스가 그 중 하나였다. ‘신선한 주제, 단단한 편집과 디자인, 아름다운 과학책을 표방하는 출판사. 2011년에 창립해 이제 17권의 책을 냈지만, 버릴 책 하나가 없이 괜찮은 책들만 내고 있다. 최근엔 기획회의나 언론에서 ‘8대 루키출판사로 꼽으며 주목하고 있다.

 

 

<시간 연대기>는 에이도스가 출간한 열여섯 번째 책이다. 1월 말 출간되었고, 미국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애덤 프랭크가 2011년에 낸 About time을 번역한 책이다. 각주 포함 500쪽이 넘어가는 두툼한 책,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시간의 모든 것이라고 에이도스가 붙인 부제가 무척 인상 깊어 예사롭지 않은 두께임에도 솔깃해하며 읽기 시작하였다. 이공계열 전공자들에게 철학이 그렇게 느껴질까, 물리학은 접할 때마다 놀라웠다. 이 한 학문 안에 우주가 있고 만물의 원리가 있었다. 공학에서도 수학에서도 물리학이 있었다. 흔히 만학의 근간을 철학이라고 하는데, 철학과 가장 가까운 학문을 꼽으라면 단연 물리학이 아닐까 싶다. 분량이 상당한 만큼 학문적으로 깊이 들어가 비전공자, 특히 비이공계 독자들에게 어렵지 않을까 생각하고 책을 폈는데 웬걸, 아무리 책장을 넘겨도 과학서보다 인문서로 느껴졌다. 물리학의 시간에 관한 책이긴 한데 인문학의 감성이 더해져 있는 책이었다.

 

 

저자는 인간의 시간은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며, 시간의 역사는 곧 물리학과 천문학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이 책은 현대 물리학 일반교양서라기보다는 천체물리학 교양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주제는 천체물리학이되 문화사처럼 서술해놓았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이다. 저자는 문화를 인간과 우주의 연결고리로 보기 때문이다. 인간이 겪은 모든 시간의 역사를 다룬 책이기에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시간의 범위는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다. 신화적이고 비과학적인 시간이 고대 철학을 거쳐 SF를 방불케 하는 현대 물리학의 치열한 쟁점을 입고 있는 현재의 과학적인 시간까지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그러면서 계속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시간에 대한 인간의 접근이 달라져왔듯이 지금 우리의 생각은 타당한지, 시간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지 말이다. 그래서 책 내용이 여러 관점에서 읽어도 흥미롭고 천체물리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어도 읽는 데 별 문제가 없었던 책이었다. 일독은 끝났지만 한 동안 사로잡혀 있을 것 같다. 아직은 책장을 덮고 싶지 않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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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5-03-30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연대기도 에이도스였군요. 전 새의 감각 을 읽었는데 에이도스였어요. 두 책 모두 눈여겨본 책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출판사가 같네요.
 
[한자의 탄생]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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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文字的故事(문자적 고사;2001;대만)

 

한자를 노닐다

 

 

 

구체적인 사물을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글자 상형자, 추상적인 생각이나 뜻을 점이나 선으로 나타낸 글자 지사자, 한자와 한자를 합쳐 새로운 뜻을 나타내는 글자 회의자, 뜻을 나타내는 한자와 음을 나타내는 한자를 합쳐서 일부는 뜻을 일부는 음을 나타내는 글자 형성자. 한자나 한문을 배울 때 한자의 짜임을 배운다. 한자문화권 국가인 우리나라는 점점 한자어의 비중이 줄어들어간다고는 하지만 전체 국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점점 한자교육이 줄어든다고는 하지만 한자 자격증 응시자도 꾸준하고, 어릴 적부터 한자 교육을 접할 기회가 많다.

 

 

문자가 생겨남으로써 인류의 사유와 표현은 시간의 독재에서 벗어나 순간적으로 공기 속으로 흩어지지 않으면서 축적되기 시작하고, 점차 두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문자는 공간적 거리와 시간적 거리를 포함하는 언어 연계의 확장력을 크게 증가시켰고, 인간의 영감, 발견과 발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인간의 사유를 지속시켜주는 중요한 근원으로서의) 곤혹감을 더 이상 고독하지 않고 안정적이며 지속적이고 면밀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 p.21

 

공동의 기억이 크고 두터워질수록 문자가 부담해야 하는 정보의 양은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문자를 더 경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 p.79

 

오래된 문자들 위에 남아 있는 모든 못자국과 홈, 호도 등은 이 문자들의 유구한 역사와 사라지지 않는 경력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 p.123

 

 

책 제목과 출판사 홍보 글을 봤을 때는 갑골문자에서 현재 한자에 이르는 한자의 탄생과 역사를 논하는 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그런 내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상한 모양새와 전혀 다른 책이었다. 어떻게 보면 한자를 소재로 저자의 인문학적 내공을 여실히 드러낸 전 방위적 인문서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역사책이라고 하기엔 언어학 책에 가깝지만 특정 학문 교양서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 묘한 책이다. 보르헤스, 마르케스, 롤랑바르트, 벤야민이 한자와 도대체 뭔 관련이 있는지 궁금하다면 책을 펼쳐보시길. 한자를 예상치 못한 대상들과 엮으며 논하는 걸 보고 읽는 내내 감탄하였다.

 

 

갑골문에서 보면 자는 처음에는 음식의 종류가 아니라 혹형의 일종이다. 형태를 살펴보면 큰 절구 안에 놓여 있는 것이 음식이 아니라 절망적인 표정을 한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윗부분은 두 손으로 절굿공이를 잡고 있는 회자수로서 산 채로 사람을 내리쳐 육장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사방으로 피가 튀고 있다. - p.211

 

말이나 돼지, 토끼, 코끼리, 호랑이, 코뿔소 등은 어째서 하나같이 서 있는 것일까? 해담은 너무도 시시하다. 쉬진슝 선생이 내린 해답은 글쓰기 도구의 제약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갑골문의 주요 글쓰기 도구는 이후에도 계속 사용된 죽간으로 붓에 먹물을 묻혀 그 위에 글씨를 썼다. 중국의 동물들은 죽간의 좁고 긴 형태의 제약 때문에 늘 환상적인 진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 p.245

 

문자는 완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문자를 만들려는 야망조차 갖지 않는 것이 좋다는 깨달음이다. 실질적이지 못한 부담이 문자를 긴장시키고, 보수적이게 하며, 가능성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안전하고 배타적인 길로만 가게 하기 때문이다. 가능성이야말로 문자가 우리의 사유에 가져다주는 가장 훌륭한 선물이자 은혜다. - p.331

 

 

<한자의 탄생>에 혹했던 이유는 탕누어라는 저자의 책 자체가 초역일뿐더러, 상대적으로 자주 접하지 않는 대만 저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역자의 말에 탕누어의 책은 번역하기 힘들다는 얘기가 나오는 걸 보고 호기심이 증폭하였다. 탕누어는 대만 최고의 문화비평가로 자칭 직업 독자(professional reader)’이다. 학부 전공은 역사학이지만 온갖 분야를 넘나들며 인문학 콘텐츠를 생산한다고 한다. 그래서 <한자의 탄생>엔 한자와 한문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 같은 것은 없다. 그와 관련한 기본적인 지식은 있다는 전제 하에 동서양을 넘나들고 언어 일반을 논하고 여러 학문을 논하며 한자를 이야기한다. 책 내내 한자는 장난감이다. 한자를 노닐고 한자가 노니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읽어보시길. 현란한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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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5-03-30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참 흥미롭게 읽었어요. 저자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골수 팬이라 백년동안의 고독 을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는..

이섬 2015-03-30 05:35   좋아요 0 | URL
마르케스 뿐 아니라....어우 소재만 한자인 책이었습니다.
어찌나 현란하게 다양한 대상과 엮어 한자를 논하던지.
저도 이거 나왔을 때부터 읽는다 읽는다 벼른 책인데, 저는 한자의 탄생과 역사와 관련한 책을 보고 읽었거든요. 전혀 예상 밖의 책이었음.
작가 내공이 장난이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이 어느 정도 있는 독자에게 재밌지 좀 어려운 감이 있는 책이네요.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2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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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 셜로키언이 뤼팽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1886, 한 젊은 영국인 의사가 생활고 때문에 연재하게 된 탐정소설 셜록 홈즈 시리즈가 초대박이 났다. 옆 나라 프랑스에도 곧 번역되어 큰 인기를 누렸지만 프랑스인 독자들은 셜록 홈즈 시리즈를 즐겁게 읽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우리 프랑스에는 내로라 할 만한 이런 소설이 없을까 하며 씁쓸해 한다. 항상 옆 나라를 의식했던 프랑스지만 대영제국도, 셜록 홈즈도, 그리니치 본초자오선도 죄다 못마땅했다. 의욕적인 잡지 편집장 피에르 라피트는 프랑스의 코난 도일을 만들고자 적당한 작가를 찾다가 모리스 르블랑을 발굴하였다. 그렇게 아르센 뤼팽 시리즈가 시작되었고, 몇 편의 단편소설 연재가 끝나자 모리스 르블랑은 대놓고 셜록 홈즈를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 셜록 홈즈와 왓슨을 등장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코난 도일은 자신의 캐릭터를 쓰고자하는 모리스 르블랑의 요청을 거절한다. 그래서 모리스 르블랑은 이름을 교묘하게 바꿔 에헐록 쇼메즈(헐록 숌즈)’윌슨이 등장하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들을 내놓았다.

 

문제는 모리스 르블랑이 셜록 홈즈 시리즈에 대한 조예가 별로 깊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시작할 때 그는 코난 도일이 누군지도 몰랐다. 그리고 재능 있는 작가였지만 코난 도일과 글 스타일이 정반대였고, 애초부터 셜록 홈즈를 희화화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아르센 뤼팽에서 숌즈는 외모 상으로는 셜록 홈즈지만 셜록 홈즈와 많이 다르다. 그래서 <기암성>까지 발표가 되었을 때 코난 도일은 강하게 불쾌함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셜로키언들이 뤼팽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아르센 뤼팽 시리즈 두 번째 책으로 뤼팽과 숌즈가 대결한 두 가지 사건을 다룬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는 자신이 셜로키언인지 아닌지 테스트할 수 있는 지표가 되는 책이기도 한다. 전편인 <괴도 신사 아르센 뤼팽>의 마지막 단편 헐록 숌즈, 한발 늦다에 이어 이 책까지 별 거부감 없이 즐겁게 읽었다면 전체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읽고 뤼팽의 매력에 빠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을 것이다.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에는 금발 여인이라는 장편소설과 유대식 등잔이라는 중편소설 두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단행본 상으로는 첫 번째 사건, 두 번째 사건해서 마치 장편 소설 하나인 것처럼 해놓았고 내용적인 연결도 어느 정도 있지만 공백을 두고 따로 연재했던 별개의 작품이다. 금발 여인은 사사건의 핵심까지 다가가는 데까지의 전개가 무척 재밌는 작품이다. 수학교사 제르부아는 딸 쉬잔에게 생일 선물로 주기 위해 중고 마호가니 책상을 사는데 한 젊은이가 자신에게 되팔라고 하는 것을 거절한다. 그런데 다음 날 책상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본격적인 불행은 두 달 후 제르부아는 복권에 당첨되는데 그 복권이 도둑맞은 책상 속에 있어 당첨금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책상을 다시 사려 했던 젊은이가 뤼팽이었고 뤼팽이 이 책상을 훔쳐서 복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뤼팽은 쉬잔을 납치해 당첨금을 50만 프랑씩 나누자고 협박하고, 쉬잔 때문에 당첨금 절반을 뺐긴 제르부아는 이를 간다.

 

한편 도트렉 남작을 죽이고 그가 갖고 있던 푸른 다이아몬드가 도난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푸른 다이아몬드는 경매에 붙여져 크로종 백작 소유가 되는데 크로종 백작 역시 도난을 당한다. 두 사건에는 모두 뤼팽의 한 패인 금발 여인이 있었다. 복권 사건에서 쉬잔을 납치했고 뤼팽과 함께 사라졌던 여인이 푸른 다이아몬드를 훔치고 살인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래서 크로종 백작 부부와 도트렉 남작의 상속자, 제르부아는 뤼팽을 잡기 위해 가니마르 형사 외에 숌즈와 윌슨을 부른다. 이미 전작에서도 모리스 르블랑은 뤼팽과 여성 캐릭터들을 잘 엮는 편이었지만 이 장편을 통해 뤼팽 시리즈 전개에 있어 뤼팽의 여인들역시 주요한 코드임을 분명히 한다. 유대식 등잔에서는 금발 여인 사건 후로 별다른 사건 의뢰가 없어 심심해하던 숌즈와 윌슨이 도둑맞은 유대식 등잔과 그 안에 든 보석을 찾아달라는 앵블방 남작의 의뢰와 이 사건에 개입하지 말라는 뤼팽의 경고장을 동시에 받고 다시 프랑스로 오면서 뤼팽과 대결한다. 그리고 뤼팽 때문이라기보다는 한 여자의 의리 때문에 어이 없이 숌즈가 당한다.

 

뤼팽 씨, 무슨 일을 한다 해도 놀라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두 명 있습니다. 한 명은 나고, 다른 한 명은 당신입니다.”

이들 사이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숌즈는 아르센 뤼팽을 체포하지 못했다. 숌즈에게 위팽은 체포를 포기해야 할 만큼 어려운 적수였으며 맞붙는 과정에서 번번이 뤼팽에게 우위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 영국 탐정은 끈질긴 집념으로 결국 유대식 등잔을 찾아냈다. 푸른 다이아몬드를 찾아냈던 일과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에서 숌즈의 공적은 덜 빛났다. 유대식 등잔을 되찾은 정황도 그렇고 범인의 이름도 모른다고 발표해야 했으므로 대중이 보기에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사나이 대 사나이, 뤼팽 대 숌즈, 도적 대 탐정으로서 볼 때 이 대결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막상막하의 싸움이었다. 두 사람 모두 승리자인 셈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무기를 내려놓은 채 서로의 정당한 가치를 알아보는 맞수로서 점잖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p.297

 

코난 도일은 자신의 캐릭터가 다른 작가의 소설에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에 기분 나빠 했지만, 모리스 르블랑은 다른 작가의 캐릭터를 자기 작품에 쓰면서 어쨌든 뤼팽과 숌즈는 서로 인정했다고 하면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자 하였다. 단행본으로 출간되며 원래 연재분에 없던 에필로그가 추가되었다고 하는 게 이 부분을 말하는 것 같다. 제목은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인데 의외로 여인들의 활약에 더 눈이 갔던 책이었다. 문득 코난 도일과 모리스 르블랑이 사이좋게 교류하며 함께 글을 쓰면 어땠을까 상상해 봤다. 서로에게 없는 면을 채우고 서로의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 완벽한 꽤 재밌는 책이 나왔을 것 같은데 조금 아쉬웠다. 더 아쉬운 것은 아르센 뤼팽 전집에서 숌즈의 등장은 세 번째 책인 <기암성>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총 장편 16, 중단편 37, 희곡 4편으로 총 20권으로 구성된 아르센 뤼팽 시리즈 전체세서 숌즈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숌즈 때문에 뤼팽이 나타난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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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1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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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아홉 단편으로 나타난 사내

 

 

 

어째서 한 가지 외모로만 살아야 하나? 매번 똑같은 인물로 살아가는 위험을 왜 감수해야 하나?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나를 분간해낼 수 있는데 말이네. 아무도 이 사람이 바로 아르센 뤼팽이다라고 단언하지 못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네. 중요한 건 누구나 아르센 뤼팽이 이런 일을 했다라고 확신한다는 것이지. - 아르센 뤼팽(p.28)



2010년과 2011년만 해도 조용해 별 주목을 못 받다가 2012년 출판계를 뒤흔든 문제아가 있다. 미르북컴퍼니의 더클래식 시리즈이다. 저작권에서 자유로운 유명 작품을 엄청 빠른 속도와 싼 가격으로 번역본을 내놓았다. 일본 책이든 독일 책이든 영미 책이든 모두 영문판을 붙여 어학 학습서(실용서)로 판매함으로써 개정 전 도서정가제에서도 출간과 동시에 마음대로 할인이 가능했고 개정 후 도서정가제에서도 재정가가 가능한 18개월 이상 구간은 재정가를 통해 예전 같은 파격가로 판매하고 있다. 전자책은 더욱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팔았다. 빠른 번역과 낮은 가격 때문에 좋은 번역가를 구하기 쉽지 않아 엉망인 번역본들이 속출했지만, 출판사는 일단 책부터 빨리 내놓고 박리다매로 얻은 수익을 얻은 후 수정쇄를 만들고 다른 책의 번역 질을 높이는 전략을 고집하였다. 많은 출판사들이 번역서 생태계를 파괴한다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간간히 좋은 번역본도 나왔고, 특히 평소 책을 많이 안 읽고 책값이 비싸다고 투덜대던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더클래식 시리즈와 유사한 시리즈가 또 하나 나타났다. 참돌의 출판브랜드 코너스톤, ‘원전’ ‘완역본원칙을 고수하면서 낱권 당 5900원에서 9900원의 파격적인 가격을 자랑한다. 그로 모자라 세트로 사면 낱권 당 가격이 평균 3000원대에서 4000원대로 떨어지고, 전자책으로 사면 몇 푼 안 되는 가격에 영문판을 끼워주는 기적의 셈법을 자랑한다. 번역은 번역집단 중 가장 신뢰를 많이 받으며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이탈리아어 6개 국어 번역이 가능한 바른번역에게 맡겼다. 2012년 셜록 홈즈 전집, 올 초 데일 카네기 전집에 이어 이달 초 아르센 뤼팽 전집 절반 분을 내놓았다. 특히 아르센 뤼팽 전집은 잘 만들어져야 하는 책이었다. 현재 바른번역의 명성은 전적으로 영미번역 때문에 만들어졌다. 영미번역으로 시작했고, 다른 외국어 부문은 아직 약한 편이다. 프랑스어 부문의 경우 번역가 풀 자체가 굉장히 빈약하다. 기존의 까치글방 완역본과 황금가지(민음사) 완역본이 12년 이상 되었기 때문에, 잘만 만든다면 출판사에게도 바른번역에도 보배가 될 수 있었다.

 

 

아직 나머지 절반분이 나오지 않았지만 이번에 나온 1차분만 놓고 보면 일단 합격점이다. 바른번역 자체도 왓북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영미번역 그룹에서 2013년 아르센 뤼팽 단편들을 500원짜리 전자책으로 내놓았던 적이 있다. 번역이 거의 번역가 지망생의 연습 숙제 같은 조악한 수준이었는데, 단 한 문장도 쓰지 않고 이번에 완전히 새로운 번역본을 내놓았다. 코너스톤 아르센 뤼팽 전집엔 원전에 대한 정보라든가 작품 해설, 역자 후기가 전혀 없다. 그래서 중역본인지 직역본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은 아쉽지만, 문장이 가독성 좋고 깔끔해서 만족스럽다. 장르문학 전문가인 장경헌과 나혁진에게 감수를 맡겨 비 장르문학 번역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주석은 그렇게 많지 않고, 본문 상에서 괄호로 처리하였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 자체가 마니아 코드가 심하다거나 내용이 어려워 주석을 많이 필요로 하는 작품이 아니기에 이 정도의 주석 양도 충분하다.

 

 

모리스 르블랑은 20대 중반부터 작가 생활을 시작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지만 별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40대 초반 편집장의 제의로 신간 잡지 <주 세 투>에 연재한 아르센 뤼팽 단편들이 돌풍을 일으켰고, 죽을 때까지 아르센 뤼팽 시리즈 집필에만 매달린다(오랫동안 아르센 뤼팽 시리즈 마지막 작품은 <아르센 뤼팽의 수십 억 달러>로 알려져 왔으나 그 후에도 써왔고 죽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은 원고가 있다는 사실이 19년 전에 발견되었음.). 모리스 르블랑은 양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었는데, 전쟁 중에도 발표 공백이 2년이 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래서 아르센 뤼팽 전집은 모리스 르블랑의 출세작이자 그의 전부이다. 모리스 르블랑은 젊은 시절 지금의 아이돌 소녀 팬들처럼 당대 쟁쟁한 프랑스 문인들을 쫓아다녔고 특히 모파상을 열렬히 숭배하였다. 뤼팽은 평생 프랑스적인것을 고민하던 그가 만든 궁극의 프랑스적 슈퍼 히어로였다.

  

 

장르문학계에서 아르센 뤼팽 시리즈는 장르문학사의 중요한 고전으로 인정하는 것 외에 크게 평가를 하지도 않고 관심도 별로 없다. ‘오타쿠로서 팔 거리가 별로 없는 책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독자가 정교한 트릭을 맞추는 재미를 별로 느낄 것도 없고, 변신에 능하고 로맨티스트이며 기타 등등 성격적으로 엄청나게 매력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허구한 날 잡혔다가 도망갔다가 난리다. 하지만 그런 점들 때문에 아르센 뤼팽 시리즈는 국민 오락 소설이 되었다. 부자들이 가진 온갖 보물들을 훔치지만 순전히 재미로 즐기는 것일 뿐 탐욕이 없다. 길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를 만큼 별별 모습으로 분하며 프랑스 전역을 활보하고, 프랑스인의 온 몸은 낭만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 중에 잠시 현실 도피하게 해준 웃기는 친구였고, 30년 이상 이어지며 당대 프랑스와 같은 시공간을 공유했으니 어떤 프랑스인이 뤼팽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주 세 투>의 편집장 피아르 라피트은 셜록 홈즈의 대항마를 원했고, 자신의 잡지가 프랑스의 <스트랜트 매거진(셜록 홈즈 시리즈 연재처)>가 되기를 바랐다. 재밌는 것은 모리스 르블랑은 코난 도일도 셜록 홈즈도 전혀 모른 상태에서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내놓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처음엔 셜록 홈즈 시리즈의 의식은커녕 홈즈 자체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독자들이 뤼팽에 처음 전율을 느낀 것은 허를 찌르는 설정들 때문이었다. 주인공이 도둑인데 정의와 불의의 경계에 있는 애매한 인물이라 선악을 판단할 수 없고,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첫 두 단편 제목은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감옥에 갇힌 아르센 뤼팽이었다. 이미 셜록 홈즈의 인기가 대단했던 프랑스였지만, 뤼팽은 자존심 강한 프랑스인들의 심리 기저-프랑스를 대표하는 새로운 영웅에 대한 갈망-를 건드리며 단숨에 그들을 사로잡았다.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 우연히 뤼펭의 친구가 된 이가 뤼팽에게 직접 들은 체포담. 항해 중인 프로방스 호에 아르센 뤼팽이 타고 있다는 전보에 가니마르 형사 일행은 촉각을 곤두세우는 중. 마침 승객 넬리 양의 보석 도난 사건이 벌어지는데…….

감옥에 갇힌 아르센 뤼팽 프로방스 호 사건으로 수감 중인 뤼팽, 말라키 성에 사는 카오른 남작에게 그의 보물을 훔쳐 가겠다는 뤼팽의 예고장이 도착하는데…….

아르센 뤼팽, 탈옥하다 말라키 성 사건 이후 가니마르에게 탈옥하겠다고 호언장담한 뤼팽, 정말 감쪽같이 심리법정에서 사라지는데…….

불가사의한 여행객 뤼팽의 회고담. 포박에 가방을 빼앗기는 굴욕을 당한 뤼팽, 그것도 모자라 다들 범인이 뤼팽이라고 생각하는 상황. 뤼팽은 줄을 풀고 가짜 뤼팽을 잡으러 가는데…….

왕비의 목걸이 꼬마 뤼팽과 연관된 왕비의 목걸이 도난 사건. 뤼팽의 가족사가 처음 등장하는 작품.

하트 7 얼떨결에 뤼팽의 전담 연대기 작가가 된 사연. 하트7이란 이름을 가진 잠수함과 그에 얽힌 사람들의 실체와 관련된 기묘한 이야기

앵베르 부인의 금고 아르센 뤼팽이 유명해지기 전, 뤼팽이라는 이름 자체도 없던 시절의 이야기. 뤼팽은 자신의 생애 최초로 어떤 부인에게 보기 좋게 속은 사건을 친구에게 털어 놓으며 흥분한다.

흑진주 흑진주를 훔치러 간 뤼팽, 흑진주는 없고 한 여인이 죽어 있다. 당연히 가니마르는 범인으로 뤼팽을 의심하고, 뤼팽은 직접 진범을 찾아 나선다.

헐록 숌즈, 한발 늦다 뤼팽과 숌즈(홈즈)의 첫 대면. 뤼팽의 정체를 알고 뤼팽을 잡으러 나선 숌즈는 뤼팽을 보고도 놓치는데다가 뤼팽에게 소매치기까지 당하는데…….

 

모리스 르블랑은 아홉 편 연속 단편소설로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내놓는다. 그걸 엮은 아르센 뤼팽 전집 첫 번째 권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은 아홉 단편으로 표현한 아르센 뤼팽의 자기 소개서 같은 책이다. 때로는 다른 입을 통해, 때로는 뤼팽 자신이 직접, 때로는 전지적 시점을 통해 뤼팽이 벌인 아홉 개의 사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스스로도 자기 자신의 원래 외모를 잘 모르겠다고 할 만큼 변신에 능한 장점을 살려 신출귀몰한 뤼팽, 특히 그가 날리는 예고장은 이후 수많은 괴도물이 오마주로 이용하는 코드가 되었다. 모리스 르블랑은 아홉 번째 단편 헐록 숌즈, 한발 늦다를 통해 처음 뤼팽과 숌즈(홈즈)를 만나게 한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이기려고 만들었기에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서 숌즈는 뤼팽에게 늘 지고, 독자들은 그걸 아는 상태에서 둘이 어떻게 투닥이는지를 지켜보기 위해 책장을 넘긴다. 헐록 숌즈, 한발 늦다를 읽고 아쉬움을 느끼기도 전에 두 중편 소설로 이루어진 뤼팽과 숌즈의 대결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가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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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성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3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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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성] 명불허전 아르센 뤼팽 시리즈 대표작

 

 

 

프랑스 노르망디 북서부 해변에 에트르타(Étretat)라는 도시가 있다. 이 도시 해변에는 에기유 크뢰즈(L'Aiguille Creuse;구멍 뚫린 바늘)라 불리는 독특한 바위 절벽이 있는데 ‘악마의 이빨’이나 ‘코끼리 바위’라는 별칭으로 더 익숙한 곳이다. 코끼리 같은 아치형 절벽이 셋 모여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두 번째 크기의 아치형 절벽. 모리스 르블랑이 속이 비어 해저터널로 연결된다는 상상력으로 아르센 뤼팽의 ‘비밀 창고’의 위치이자 같은 제목의 소설로 만든 장소이기도 한다. 그래서 생김새 자체도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기암성>의 실제 모델이라는 이유로 오늘날에도 관광 명소로 유명한 곳이다. 원제도 그렇고 소설 안에서도 에기유 크뢰즈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되는데 왜 제목은 ‘이상한 바위 성’이란 뜻의 <기암성>일까. 일본이 이 소설을 번역하면서 처음 고안한 이 단어를 우리가 그대로 따라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단 두 나라만 아르센 뤼팽 시리즈 세 번째 책을 <기암성>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소설가 쥘리앵 그라크는 <기암성>을 “프랑스어로 쓰인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라며 극찬을 하였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자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다. 아예 <기암성> 자체가 아르센 뤼팽의 전부인지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을 만큼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작품이다. 모리스 르블랑은 <기암성>을 발표하던 해 피가로 지에 짤막한 에세이 형태로 자신의 추리소설론을 발표하며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 대한 집필 철학을 완전하게 세운다. <기암성>에는 모리스 르블랑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상상력, 프랑스적 가치의 강조, 헐록 숌즈(셜록 홈즈)에 대한 조롱 등이 모두 담겨 있다. <기암성>의 백미 중 하나는 철가면과 뤼팽의 연결이다. 그 때문에 연재 당시 역사적 서술이 늘어졌던 것을 줄여 1909년 정식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이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기암성>이다.

 

 

모리스 르블랑의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1907)>,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1908)>, <기암성(1909)>는 연달아 나온 작품이다. 그런데 <기암성>은 마치 전작들과 오랜 공백이 있었다고 착각할 만큼 작품성에 있어 현격한 발전을 보인다. 복선도 정교해지고 전개도 복잡해지며, 시공간적 폭이나 주제와 소재도 훨씬 확장된다. 아마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은 단편집이었고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 집필 동기인 ‘반 셜록 홈즈’적 철학에 충실해 홈즈를 공격하는 데 최선을 다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기암성>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된 아르센 뤼팽 소설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 같다. <기암성>에도 역시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후반부부터 모습을 드러낸 숌즈가 출연한다. 그런데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보다 더 무능하다. ‘셜록 홈즈’라기 보다는 동명이인의 악당에 가까울만큼 홈즈스럽지 않아 셜로키언들을 부들부들거리게 한다.

 

 

소설은 제르브르 백작 집을 울리는 총소리로 시작한다. 괴한이 침입해 백작의 비서를 죽였는데 훔친 물건은 없다. 백작과 함께 사는 백작의 조카 레이몽드가 쏜 총에 범인이 맞지만, 범인은 용케 도주한다. 대장이 죽었다면 레이몽드는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 협박편지를 남기고선. 유명 외과의사 들라트르가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사건을 통해 대장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보트를레의 활약으로 금세 사건이 종결되는 듯 하지만 보트를레의 아버지와 레이몽드가 납치되고, 본격적인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 <기암성>에서 뤼팽의 적수는 중년의 영국인 숌즈가 아니라 프랑스의 고등학생 보트를레다. 모리스 르블랑은 보트를레를 통해 뤼팽은 ‘셜록 홈즈’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남다른 인물이며, 굳이 뤼팽에 맞설만한 인물이 필요하다면 프랑스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노골적으로 내비친다. 아버지와 레이몽드의 납치로 완전히 국면이 바뀐 사건, 유일한 단서인 암호문을 풀며 보트를레는 뤼팽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마주하는 것이 에기유 크뢰즈에 있는 작은 성 에기유, 영국 왕실에서 프랑스 왕실로 이어져 오며 엄청나게 축적한 보물이 있는 곳이었다. 실제 역사적 사실과 모리스 르블랑의 상상력이 섞여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헷갈리는 이야기가 속도감 있게 전개되기에 정신없이 몰입하게 된다. <기암성>의 이야기판이 얼마나 뒤집히는지, 보트를레에 이입해 함께 암호문을 풀어가면서 얼마나 짜릿함을 느끼는지, 작가가 얼마나 능청스럽게 역사를 이용하는지 꼭 스스로 확인하길 바란다. 강성 셜로키언만 아니라면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저평가하는 독자들도 <기암성> 정도는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아르센 뤼팽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중 하나가 엄청난 로맨티스트라는 점인데, 뤼팽의 손바닥에서 노는 보트를레의 모험 겸 성장소설을 열심히 탐닉하다가 마주하는 그 뜻밖의 로맨스와 인간미란. 명불허전! 역시 대표작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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