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베스 시공 RSC 셰익스피어 선집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원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맥베스] 천국에서 겪는 지옥

 

<맥베스>는 꿈이 어떻게 악몽이 될 수 있는지, 낮이면 둥지를 트는 새들의 유쾌한 자리가 밤이면 음산한 기지가 넘치는 문지기가 문 앞을 지키는 지옥 그 자체로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관한 극이다.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뒤죽박죽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한 극이다. 던컨 왕이 살해된 다음 날 아침에 태양은 떠오르기를 거부하고, 다른 이상한 현상들은 자연 질서의 혼란으로 해석된다. - p.24

 

운명인가 의지인가. 능력 있는 영주였고 왕의 총예를 받는 충신이었다. 부도 충분하였다. 그러나 맥베스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던컨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다.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고, 야심 가득한 부인의 부추김도 있었다. 원하던 천국을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밤, 하늘에서 곡소리가 들리는 등 온 세상이 이상해진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마지막 작품이자 가장 짧고 빠른 비극 <맥베스>, 천국에서 지옥을 겪는 사내의 이야기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이기도 했던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에게 바쳤다. 그는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한 지 몇 주 만에 셰익스피어의 극단을 국왕 극단으로 격상시킨 이였다. <맥베스>에서 잉글랜드 궁정이 피난처이자 축복의 장소로 제시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스코틀랜드의 실존 인물이었던 던컨과 맥베스의 이야기를 자신의 상상력을 보태 재해석하였고, 1906년 초연하였다. 각색의 아이디어 전부 셰익스피어의 것은 아니고 라파엘 홀린셰드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의 연대기(1587)>에서 상당 부분 차용하였다.

 

- 맥베스에게 -  

마녀1: 맥베스, 만세! 글램즈의 영주, 만세!

마녀2: 맥베스, 만세! 코도의 영주, 만세! 

마녀3: 맥베스, 만세! 장차 왕이 되실 분이여, 만세! 

- 뱅쿠오에게 -

마녀1: 맥베스보다 못하지만, 더 위대하리라.

마녀2: 그만큼 운은 없지만, 훨씬 더 큰 행운을 누리리라. 

마녀3: 스스로 왕이 되지는 못해도 왕을 낳으리라. - pp.61~62/12

 

그래서 <맥베스>는 결말을 아는 상태에서 보는 희곡(연극)이다. 실존 인물의 이야기인데다가, 마녀의 예언과 엮여 극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맥베스>에는 '변덕스러운 자매들'로 언급되는 세 명의 마녀들이 등장한다. 그녀들을 심술궂은 숙녀들이라고 한 라파엘 홀린셰드와 달리 셰익스피어는 무척 수다스럽고 턱수염 난 노파로 설정하고 있다. 마녀들의 예언을 정리해보면 크게 네 가지다. 맥베스는 코도의 영주가 된다(12), 맥베스는 왕이 되지만 왕을 낳지는 못한다(31), 뱅쿠오는 왕이 되지는 못해도 왕을 낳는다(12), 여자에게서 태어난 어떤 자도 맥베스를 해치지 못한다.(41) 

 

맥베스 부인: 얻은 것도 없이, 힘을 모두 써버렸군. 욕망은 달성했지만 만족은 없는 셈이지. 없애버리고도 이렇게 불안한 기쁨 속에 사느니 우리가 없애버리는 그것이 되는 게 차라리 낫겠다. - p.115/32

맥베스: 괴상한 망상에 휩싸이는 것은 단련하지 않은 풋내기의 두려움이오. 우린 그 일을 하는 데에 아직 미숙한가 보오. - p.130/34

맥베스: 그걸 치료해 주시오. 상처 입은 마음을 치료할 수 없다면 뿌리박힌 슬픔을 기억에서 뽑아버리시오. 머릿속에 기록된 괴로움을 잘라내고 감미로운 망각의 해독제를 써서 마음을 무겁게 하는 저 해로운 물질을 답답한 가슴에서 씻어내시오. - p.174(53)

 

맥베스가 왕이 된 이후 맥베스 부부는 행복도 금슬도 모두 잃어버린다.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을 뿐이다. 특히 전령과 환영을 계속 겪는 맥베스는 미칠 지경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라를 잘 다스리는 듯 했으나 곧 폭군이 되어버린다. 당연히 뱅쿠오도 제거한다. 슬슬 맥베스를 경계하기 시작한 다른 영주들, 그 중 맥더프는 던컨 왕이 죽은 후 잉글랜드로 도피한 던컨왕의 아들 맬컴과 연합해 맥베스를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스코틀랜드의 수많은 이들이 살인귀로 변한 맥베스에게 크게 실망해 맥더프-맬컴 연합과 함께 한다. 맥베스는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의 파멸을 부정하지만, 맥더프는 어미의 배를 가르고 태어난 인물이었고 맥베스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맥베스>에서 맥베스 못지않게 주목 받는 인물은 맥베스 부인이다. 작품이 발표되고 나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극악무도한 악녀로 그려진다. 맥베스보다 연상이자 스스로 남편을 바꾼 아내고, 아이를 잃고도 슬퍼하지 않은 어머니이다. 맥베스의 악행을 부축이고 그가 약해지는 것을 막는 인물이다. 어떤 남자보다도 독한 야심가이다. 맥베스 부인 뿐 아니라 마녀들의 여왕 헤카네와 마녀 세 자매, 맥더프 부인 등 시대를 앞선 매력적인 여성 인물이 많이 등장하고 비중이 상당하다.

보통 연극 분량이다. 330여 쪽인 이 책에서 <맥베스> 대본 자체는 140쪽이 채 되지 않는다. 그만큼 작품 해설이 풍부하다. 시공사의 RSC(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셰익스피어 선집은 2012 런던올림픽 특수를 염두하며 나왔으나, 그 전후로 출간된 다른 출판사의 완역본도 수없이 많아 크게 주목 받지 못하였다. 20154월 말 현재도 1쇄 분을 팔지 못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일반 대중들에게 셰익스피어 완역본이나 연극이 크게 소비되지 않다는 점도 판매 부진의 한 이유이다. 일찌감치 마니아들 사이에선 좋은 평가를 받았던 선집, 지금이라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제대로 읽고 싶다면 꼭 고려했으면 좋겠다. 강력 추천하는 완역본이다.

 

셰익스피어는 극작가이면서 직접 무대에 올라 가 연기한 적이 많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텍스트로 읽기보다 연극을 보거나 직접 연기하는 것이 이상적인 감상법이라고들 한다. RSC 셰익스피어 선집은 극으로서의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즐기는 데 어떤 판본보다 가장 최적화되어 있다. RSC는 주디 덴치, 제러미 아이언스 등 수많은 명배우를 배출한 전통 있는 극단이자 셰익스피어 연구와 교육으로 유명하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주기적으로 공연하는 것은 물론 시대별로 새롭게 재해석한 극을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RSC<맥베스> 대본은 처음 출간된 셰익스피어 전집 제1이절판(1623)을 기초로 최대한 원전에 가깝게 복원하였으며, RSC판본 번역본은 시공사본이 유일하다.

  

셰익스피어를 읽을 때 까다롭게 판본을 검토해야 하는 이유는 셰익스피어의 전작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물론, 남아 있는 작품 역시 완전한 원본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사후 수세기 동안 서지학자들과 편집자들이 정리해 출간해온 텍스트란 점이다. <맥베스>의 경우 토머스 미들턴이 개작한 부분이 있다. RSC판본 95% 운문, 5% 산문으로 이루어진 <맥베스>의 음률을 그대로 살리고 풍부한 주석과 꼼꼼한 지문 처리로 독자들이 셰익스피어의 진가를 알도록 돕는 최상의 판본이다. 심지어 배역별 비중 분석에, 장면별 요약까지 담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영어극시의 이상적 형식인 약강오보격(열 개의 음절, 다섯 개의 강세, 그리고 두 번째 음절마다 강세)를 기반으로 후기로 갈수록 운문 형식이 느슨해지고 운문과 산문 사이의 변화가 빈번해진다. 그런 셰익스피어의 섬세한 언어를 가장 섬세하게 편집한 판본이 RSC본인데, 번역 과정에서 언어적 차이로 그걸 다 살릴 수는 없지만 최대한 노력한 흔적이 역력한 시공사본이다. 번역진 역시 쟁쟁한데 <맥베스>의 경우 한국셰익스피어학회와 현대영미드라마학회 이사를 역임했던 한국방손통신대 영문과 교수 이원주가 번역을 맡았다.

 

<맥베스> 연극 연출과 연기에 대해 풍부한 인터뷰와 사진을 곁들이며 서술하고 있는 대목도 있어 여러모로 셰익스피어를 공부하며 읽기에 굉장히 좋은 선집이었다. 5대희극과 <템페스트> 정도만 해서 2차 선집도 꼭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읽는 데 무척 고통스러운 작품이었다. 어려워서 그렇다기보다 작품 속에 빨려 들어가 읽고 또 읽으며 헤어 나오질 못해서였다. 어둠과 피의 희곡이라는 둥 셰익스피어 작품 중 가장 외롭다는 둥 하는 이유를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맥베스 부부는 분명 악인이었다. 하지만 그 인간적 감정과 악을 저지른 후 시달리는 고통들이 충분히 공감되었다. 너무도 인간적이기에 천국에서 지옥을 겪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파멸에 자신 있게 통쾌하며 손가락질할 수가 없었다. 산 자의 해피엔딩을 죽은 자의 비극이 완전히 덮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