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 - 그리움 많은 아들과 소박한 아버지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
박동규.박목월 지음 / 강이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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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 모든 아비와 맏이의 이야기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을 들고 나와 아버지와의 인연을 글로 쓰고자 한 것은 참 오래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그해 내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돋아났고 나는 이 머리카락을 만지며 아버지의 우산 안에 살았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했는가를 뼛속 깊이 깨달았다. 그때부터 아버지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셨는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고 이 생각의 골짜기를 타고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서 글로 남겨보고 싶었다. (...) 아버지의 글 곁에 내 글을 가져다놓은 부끄러움을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살다 가셨다’는 목매인 소리를 하면서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잡고 살았던 행복을 이제야 고백함을 기억해주시기 바란다. - 박동규(머리말 中)

 

 

 

나의 아버지는 젊을 적에 몹시 아들을 갖고 싶어 하였다. 목욕탕에서 같이 등을 밀 수 있는 인생의 경쟁자이자 벗이자 제자인 당신을 꼭 닮은 동성, 비단 우리 아버지 뿐 아니라 피가 뜨거운 모든 사내의 본능이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매우 이름은 매우 여성스럽게 짓고선,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진 선머슴처럼 나를 키우셨다. 나에게 아버지는 평생의 태산이다. 어릴 적엔 아버지에게 칭찬을 들어보는 것이 소원이었고, 내 방황과 성장의 대부분도 아버지를 의식하는 데서 일어났다. 아버지를 단 한번이라도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여전히 나는 아버지에게 “제발 책 좀 읽어라 그렇게 무식해서 어디다 쓰니” 따위의 핀잔을 듣는데 언젠가부터 그 소리가 싫지 않아졌다. 영원히 나의 영웅 나의 거인 아버지가 나보다 강하고 똑똑하셨으면 한다.

 

 

대부분의 남자는 얼떨결에 아버지가 된다. 열 달 동안 몸과 마음으로 품으며 차근히 어미가 되어 가는 여자와 달리, 어느 날 갑자기 아내의 임신 사실을 듣고 다시 또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닮은 핏덩이를 품에 안아보게 된다. 처음 똥기저귀를 갈고 밤에도 분유를 먹으며 1일 몇식을 하는지 모르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의존하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인간이 어느 날 삶에 등장한다. 그래서 부모로서의 성장은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더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고 성질도 약간은 다른 듯 하다. 언젠가 나의 아버지는 내게 그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부모에게 맏이는 ‘함께 처음’ 해본 일이 많아서 자식보다 동지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세상의 모든 맏이들에게, 모든 부모와 맏이 간에는 공통적인 특유의 정서가 있다. 설령 맏이 구실을 못하는 맏이라 하더라도, 맏이는 맏이구나 싶은 다른 형제들과 다른 구석이 있다.

 

나의 아버지는 서른 먹은 딸에게 아직도 종종 아기라고 부르곤 하신다. 남동생은 한번도 그렇게 부른 적이 없다. 나는 그것이 맏이 구실도 제앞가림도 못하는 내 무능력을 욕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응급실에 실려 갔던 작년 가을, 비로소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어떡해요. 우리 아기가 아파요. 많이 아파요.” 손을 떨며 병원에 전화를 건 부모님의 이구동성, 늙고 큰 내가 언제든 당신을 핏덩이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서툴고 어린 부모로 돌아가게 만든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의 ‘함께 처음’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박동규 교수는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를 엮으며 ‘아버지와 아들’을 강조했지만, 아버지 박목월 시인과 영원히 아버지를 그리고 좇는 장남 박동규 교수를 보며, 이 책이 모든 아비와 (성별을 초월한) 맏이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같이 있어도 눈에 가득 담아도 늘 그립고 애틋한 내 아버지를 새삼스럽게 품고 책에 감정이입을 많이 하였다.

 

내 필명은 내 글의 지향을 상징하는 두 명의 시인을 품고 있다. 그러나 정작 내게 시는 좀처럼 가까워질 줄 모르는 콤플렉스다. 박목월 시인 역시 학창시절 문학시간에 배운 몇 시들을 제외하면 아는 바가 거의 없는 그저 먼 당신이었다. 친일하지 않은 대표적 시인이라 존경하는 정도였을 뿐이다. 그래서 우습게도 시인으로서의 박목월 시가 아닌 아버지로서 박목월 일기 발췌본으로 그에게 더 먼저 다가간 셈이 되었다. 분명 이 책이 7년 전 다른 출판사에서 다른 제목 같은 내용으로 나온 것으로 아는데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란 제목으로 책을 기획했다는 책 머리말을 읽고 처음에 잠깐 갸우뚱하였다. 알고 보니 제목만 수정해 머리말을 쓴 것이었다. 본문은 같지만 아버지 박목월의 글보다 아들 박동규의 글이 먼저 나오는 것도 재간본의 다른 점이다. 두 분 다 워낙 한국문학계의 거목이다 보니, 부끄럽게도 처음엔 나도 모르게 부자의 문장미를 따지면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반성할 겨를도 없이 내용 자체에 빠져 들어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비와 맏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울림에, 문장 수준의 높고 낮음은 무의미하였다.

 

 

박목월 시인의 일기를 읽으며 내 아버지의 일기를 떠올렸다. 꼼꼼하게 기록한 하루의 소사와 그 정결한 글씨하며, 책벌레 문학청년다운 문장력에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존경했는데, 박목월 시인의 일기를 읽으며 그 생각과 함께 시인은 일기조차 군데군데 시 같은 면모가 있구나 싶었다. 많지 않은 발췌 분량임에도, 소재도 내용도 문장도 별로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데도 참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일기들이었다. 박동규 교수의 글과 함께 읽으면 책 속에 일기 외 실린 박목월 시인들의 시들과 잡문들의 배경을 알 수 있어서 더 감흥과 이해가 배가되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모든 자식들을 ‘어린 것들’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훗날 박동규 교수 역시 자신의 자녀를 그리 부르게 되는데, 별것 아닌 호칭인데도 자녀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애정과 안쓰러움 등 복합적인 감정이 함축적으로 묻어나오는 것 같아 가슴에 박혔다.

 

 

‘아버지와 아들’을 주제로 한 공동 저작을, 박동규 교수는 아버지 사후에야 아버지 글 옆에 자신의 글을 나란히 슬쩍 얹는 모양새로 완성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서 아버지에 대한 한없이 수줍고 인간적인 아들의 고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책과 정서는 맏이만이 낼 수 있는 것 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눈물범벅인 내 손을 꼭 잡고 우리 아버지가 내게 해주셨던 말이 있다. 두 가지 일을 모두 겪을 때야 진짜 어른이 될 수 있는데 하나는 부모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양친을 모두 잃는 것이라고, 당신은 25년에 걸친 성장통 끝에 마흔 다섯인 오늘 진짜 어른이 된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덧붙였던 말, 스무 살 때 아버지를 여윌 때 단 한 번도 돈 벌이를 해보지 못하고 아프기만 했던 병약하고 무능력한 아버지였지만 당신에겐 온 세계가 무너진 느낌이었다고, 그런데 어머니를 놓아드린 오늘은 슬프지만 제법 견딜 수 있는 것은 이제 당신이 아버지고 아내와 우리 남매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어린 나는 부모가 되는 것은 성인으로 무사히 성장한 인간이 사회를 위해 할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조금 커서는 어떤 인간을 20년 이상 지켜보며, 그의 삶을 도와주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래서 누구보다 아이를 간절히 원했지만, 지금은 감히 품어볼 엄두가 안 나는 사치가 되었다. 철딱서니 없는 ‘어른이’에 멈춰버린 내게, 그냥 여전히 맏이(자식)이기만 할 뿐인 내게 장남에서 장남이자 아버지가 된 박동규 교수와 그 부자의 글이 담긴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은 아버지에서 아이로 다시 그 아이로 이어지며 혈관에 새겨지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게 했다. 진짜 어른만이 남길 수 있는 한 부자의 글 모음을 보며 마지막 책장을 덮던 날, 아버지를 맏이를 어른을 한없이 헤며 꼬박 밤을 지새웠다. 생판 남인 부자의 글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우리 부자를 겹쳐보며 속에 담고 곱씹다 보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생각난 김에 아버지 좋아하는 팥찹쌀도너츠나 몇 개 사서 쭐래쭐래거리며 찾아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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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우아한 거짓말의 세계 - 광고의 눈으로 세상 읽기
한화철 지음 / 문이당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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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우아한 거짓말의 세계] 어쩌다 광고쟁이가 된 남자의 열정회고록

 

 

 

졸업생 열에 아홉이 마케터로 취업하는 전공이었기에, 광고는 형제분야 같이 친근했고 실제로 광고홍보학과와 연계공유하는 전공수업도 몇 있었다. 그런 까닭에 새내기 때 4대동에 들어가려 기를 쓰다가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저지 당한 적이 있는데, 쉽게 미련을 못 버려서 여름방학 때 방송국 마케팅기획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광고 수주와 자체 광고를 제작하는 부서였다. 일하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중대냐는 질문이었다. 4대동에서 주워들은 얘기까지 더해져, 새내기에게 광고업계는 중대-4대동-공모전 필수여야 하는 세계라는 선입견이 생겼다. 학부시절 광고쪽에서 유명했던 선배도 전공은 심리학-국문이지만 역시 4대동 출신이었고 제일기획에 다니던 사촌도 경영학 전공에 영어 네이티브였지만 인턴으로 번역 등 영어 관련 일만 줄창하는 데 그쳤다. 나 역시 우연한 기회에 B2B광고회사에 입사할 뻔 했지만, 제의받은 보직은 광고직이 아닌 전산직이었다. 그 외 주위에 영 광고직이 없다보니 어떤 사람들이 다니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은근한 환상이 있었다.

 

 

 

 

좋은 사회학자가 되고 싶었던 나는 어쩌다 ‘광고쟁이’가 되었다. 광고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다. PT, 프레젠테이션을 프롤레타리아로 독해할 정도였다. 사회학자와 광고쟁이라는 이 모순된 상황은 지금도 가끔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광고의 어느 언저리에 분명히 있으면서도 광고에서 한 발짝 물러서려는 심리적 저항 같은 것을 느낀다. - p.13

 

나는 어쩌다 광고쟁이가 되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광고를 업으로 삼고 있는 이유는 광고 일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나는 광고가 재미있어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광고를 하면서 광고의 재미를 시나브로 알게 되었다. 가끔 자문해 본다. 처음부터 광고에 나를 맞추려 했다면, 지금까지 내가 광고인으로 살 수 있었을까? - p.23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광고업계는 ‘미친 쟁이’들만의 세계며 광고직 종사자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마케팅 쪽도 그랬다. 성적, 전공 다 초월하였는데 제일 많이 취업되는 부류를 둘 꼽으면 ‘미친 놈’과 ‘각종 언어 능통자’였다. 휴대폰에 미쳐서 뽐뿌도 없던 시절부터 거의 한달에 한번꼴로 바꾸는 애, 전세계를 돌며 립스틱을 사는 애 등등 과 특성상 각종 ‘미친 놈’이 흔해 빠졌는데 학점이 1점대든 2점대든 스펙이 있던 없든 이런 애들은 그 쪽 업계 마케터로 백이면 백 취업했다. 그저 성실히 공부하고 과제량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던 평범한 나는 학교 다니는 내내 이런 아이들이 무척 부러웠다. 마케터를 전공무관으로 뽑는 회사가 많기 때문에 러시하는 다른 인문계열 학생들과 달리, 4년 내내 타고난 남다른 애들을 보다보니 자괴감이 많이 들었다. 유일하게 꿈꾸던 대학원 진학이 좌절된 후 더 이상 전공을 살리지 않은 것도, 무의식 중에 절망이 쌓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광고장이라는 말보다 광고쟁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사전적으로 보면 ‘쟁이’가 아닌 ‘장이’가 맞다. ‘장이’는 대장장이, 석수장이 같은 기술자에게 붙이는 말이다. 15년 넘게 광고를 했으니 광고 기술자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반면 ‘쟁이’는 수다쟁이, 거짓말쟁이처럼 성격이나 버릇 따위에 붙인다. 나는 ‘장이’보다 ‘쟁이’가 좋다. 광고를 잘할 것 같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이 좋다. 동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며, 항상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좋다. - p.38

 

사회학의 가장 큰 무기는 ‘상상력’이다. 특히 ‘문학적 상상력’이다. 사회학은 방대한 인문학의 여러 분야와 걸쳐 있다. 역사와 가깝고, 철학과 가깝고, 심리학과 가깝다. 문학적 상상력은 통섭의 관점에서 이 모두를 꿰는 황금 실이다. 문학적 상상력의 직관적 통찰을 극대화하는 것이 사회학과 한국 사회의 선택적 친화력을 높이는 길이다. 생활 속으로, 대중 속으로 사회학이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가장 유용한 문이 문학적 상상력이다. - p.75

엘베스트의 광고기획자, 대홍과 금강 등 굵직한 회사의 마케터와 광고기획자를 거치고 얘기하면 다 아는 유명 광고들을 숱하게 만들어 온 작가, 그런 그가 PT가 뭔지도 모르고 사회학밖에 모르던 사람이었으며 그런 그가 광고쟁이로 거듭나는 15년과 나름의 광고론을 단행본으로 정리해냈다기에 냉큼 집어들었다. 고정관념을 깨는 인물일지, 광고와 사회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치지 않는 궁금함에 마음만 급해져, 장을 넘나들며 책을 읽었다. <우아한 거짓말의 세계>는 총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2장이 작가 나름의 광고철학이라면 3장은 광고쟁이로서의 출발부터 현재까지 담았다. 그 중간에 있는 2장과 3장을 아우르는 총론적 성격이고 2, 3장과 겹치는 부분도 있다. 결론은 얼떨결에 이상한 광고의 나라에 들어선 앨리스 작가가 부단한 노력으로 광고쟁이DNA을 만드는 것 같지만,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역시 타고난 기질과 적성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 한번 재밌고 신기하며 이상한 광고업계를 느꼈던 시간이었다.

 

 

 

광고는 거짓말이다. 광고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은 광고하는 대상의 일부를 전체인 듯 만드는 것이다. 광고는 광고하는 대상의 부분적 타당성만을 유일한 인식 체계로 만들어 버린다. 알튀세르는 전체를 부분인 것처럼, 부분을 전체인 것처럼 인식시키려는 모든 것을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그래서 광고는 이데올로기다.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보면 광고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데올로기 속에서만 작동하며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이데올로기적인 실천이다. - p.109

 

광고인이기 때문에 공유하고 있고 그것을 어겼을 때 도덕적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직업윤리라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종종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광고인의 자부심은 줄어들고 점점 회사원이 되어 가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토로하곤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결론은 외적 조건의 변화를 어쩌겠냐는 자조로 끝이 난다. 광고 심의 규정에 저촉되지 않는 것이 광고인이 공유해야 하는 직업윤리의 전부라면, 광고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문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광고의 위기라는 말이 심심찮게 회자되고 있다. 광고인 스스로 광고업 전반에 대한 자기반성과 성찰이 요구되는 시기다. - p.136

 

광고나 관련 업계에 종사하게 되지 않는다면 이 책이 그저 재미졌던 구경으로 그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직업이든, 어떤 꿈을 꾸든 한창 인생을 설계하고 달리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우아한 거짓말의 세계>는 유용한 자극제이다. 지금 나보다 10년, 15년 더 앞선 프로페셔널 선배의 고군분투 성장담, 열정 회고록을 보며 많이 배우고 자신을 깰 수 있었다.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고, 또 개인마다 인상점이 다르겠지만, 몇 가지 언급해보자면 5년 단위로 계획을 세운다거나 무조건 30대에 반드시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행한 일이나 후배를 열심히 키우고 그 후배에게 밟히는 것을 기꺼이 반기되 그 내일이 되도록 멀도록 노력하자는 얘기 등이 있다. 각종 좋은 얘기들을 무수히 짜깁기한 전형적인 자기계발서 수권보다 좋은 본보기가 되는 프로들의 노하우 아닌 노하우가 담긴 이런 책들이 훨씬 인생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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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l Meets Football 그녀, 축구를 만나다 - 여성을 위한 축구 핸드북
이승용.정예은 지음 / 북마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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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축구를 만나다] 정말 dogcow 속성 과외북, 그보다 함의

 

 

 

여러 가지 니즈가 얽혀 집은 책이었다. 물론 글로라도 좋으니 궁금한 축구를 이제는 꼭 알아야겠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사면선비 30, 더 이상은 못 참겠). 대단히 얇게, 그리고 여자들을 위한’ ‘쉬운내세운데다가 월드컵 시즌에 맞춰 기획한 신간이기에 단연 선택 0순위였다. 또래가 쓴 책인데다가, 주저자가 스포츠 마케터라는 점에서 잿밥이 더 탐나서였던 감도 없지 않다. 책장을 펴며, 2009년 졸업을 앞두고 여성마케팅랩에 있던 때를 떠올렸다. 당시 랩에서 활발하게 얘기하던 주제가 여성 야구 마케팅이었다. 앞으로 여성 야구팬은 계속 증가세일 것으로 전망하기에 미리 무기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처럼 작가 역시 여성 야구팬 얘기로 운을 떼며 축구로도 시선을 확장해야 한다는 얘기를 한다.

 

정말 기획의도에 충실한 책이다. 축덕인 남친 세윤을 좀 더 이해하고 싶어 축구를 알려고 고군분투라는 축구문외한 상여자 여대생 새롬이, 그리고 새롬이의 멘토를 자처한 축구여신 동기 빛나와 빛나의 오빠 필승의 속성 과외담이란 콘셉트로 책을 구성하였다. 스토리텔링에 사진도 많고, 전반적으로 여유시간에 잠깐 커피 한잔 하며 잡지 넘기듯 가볍게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한글만 읽을 수 있다면 금붕어도 읽을 수 있는 dogcow(개나소나) 책이다. 알고 봤더니 빛나에겐 나름대로 노력한 역작 축구노트가 있었고, 착한 벗을 둔 새롬이는 날로 먹을 수 있었다. 매우 최소한의 기본 규칙과 등번호의 의미, 주요 축구 리그와 선수 및 감독, 경기 관람이나 쇼핑 팁까지 본문 내용만 숙지하면 당장 방언 터지듯 TV랑 쌍방향 대화 축구 중계할 기세가 되고, 축구커뮤니티를 종횡무진하며 키보드 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어도 남자들 얘기에 끄덕끄덕하며 상냥한 리액션은 가능하다.

 

 

최근 여성 스포츠팬의 숫자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축구 책을 접해 오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바로 축구에 완전히 문외한인 여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 없다는 것이었다. (...) 최근 여성 야구팬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모습을 보며 이제 축구도 여성들이 함께 즐기고 참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입문서 형식의 들고 다니기 좋은 포켓북을 만들고 싶었다. 또한 남성들이 여자 친구나 아내에게 자신의 세계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선물해주고 싶은 책으로 남았으면 한다. (...) 이 책의 집필 목적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축구문화 혹은 지식 전파는 아니다. 그보다는 남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최소한의 축구지식 축소판에 가깝다. - 머리말

 

나 역시 이게 여성들의 축두에 대한 지식수준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그녀들에게는 여전히 잘생긴 선수가 관심 1순위일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선수보다 연예 뉴스에서 접할 수 있는 유명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현실이었다. - 머리말

 

남자에게 축구는 자신만의 왕국이었다. 남성들에게 축구는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하나의 배출구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축구 하나로 말이 통하는 것을 보면 그저 대단하다. 그래서인지 남성들은 축구로 더 대동단결하고 문을 굳게 걸어 담근 뒤 다른 이들, 특히 여성의 존재를 얼굴만 보고 좋아하는 얼빠일거야라는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 (...) 축구가 의외로 여성들이 남성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는 매개체라는 사실이다. (...) 밤낮과 주말 안 가리며 축구에 죽고 못 사는 남성들이 한심해 보일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관점의 전환, 터치 포인트이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고, 한발 안으로 들어가 축구를 바라보라. 축구 하나로 이전에 알지 못했던 남성들의 심리를 꿰뚫을 수도, 또 그들과의 유대감이 쉽게 생길 수도 있다. 남성들이 왜 축구, 축구 하는지 그 이유를 안다는 사실 하나로 당신은 이미 (남성들 사이에서)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여성 중 한 명이 되어 있을 것이다. - 에필로그

 

내가 정말 이 남자를 사랑한다면 축구가 뭔지 한 번 알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p.18)

 

그녀는 학교 내 밴드에서 보컬을 하는 등 굉장히 활발한 스타일로 늘 주변에 남자가 많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특정 짓는 이미지 중 하나는 축구였다. 빛나는 한국대 공대 내에서 축구여신으로 불린다. 가끔 학과 친구들과 밥을 먹으러 가도 항상 그녀는 남자들과 축구를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내가 다른 여자애들과 다른 얘기를 할 때도 그녀는 늘 남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독차지하며 축구얘기 하나로 여신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p.20)

 

남자에게 축구는 정말 접근이 가장 쉬운 아이템이야. 자동차처럼 돈이 많이 들지도 않고 여자처럼 자기 의지대로 사귀고 헤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 몸을 움직이고 뭔가 에너지를 분출하고 싶은 남자 몇 명이 공 하나만 있고 넓은 공간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축구거든. 또 중고등학교 때 학교 운동장에서 하기 제일 만만한 게 축구, 농구 이 정도인데, 체육시간에 나가서 공 하나 던지고 20~30명 집중시키기에 이만한 게 없지. 이때부터 축구에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어. 모든 남자가 축구를 좋아하진 않겠지. 단지 축구가 가장 보편적으로 어릴 적부터 다가가게끔 되어 있단 얘기야.(p.29)

 

여자가 축구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렇지 않은 여자보다 더 좋아한다고 볼 수는 없어. 아까 빛나가 말한 대로 축구는 남자들의 세계라는 관념이 좀 있어. 그래서 축구에서도 여성은 약간 소비되는 느낌이지 같은 팬층으로 취급하지는 않아왔던 것 같아. 그런 거 보면 확실히 남성들이 축구와 자신들을 더 동일시하는 것 같아. 그래도 한편으로는 축구팬 남성들의 로마이 바로 축구 좋아하는 여자야.(p.34)

 

남자들은 축구 좋아하는 여자들에 대한 환상이 있어. 자신이 응원하는 팀 레플리카를 입은 여자를 보면 눈에서 하트가 자연스럽게 나오지. 남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지. 하지만 여자가 너무 많이 축구를 아는 것보다는 적당한 수준에서 축구를 알아서 남자의 문화를 이해해 주는 수준이 더 좋다고 봐.(p.44)

 

<그녀, 축구를 만나다>23초 젊은 부부가 쓴 책이다. 짐작하듯 당연히 남편이 열혈축구매니아이자 대기업 스포츠 마케터이고, 제약회사에 다니는 아내는 축구의 축도 모르고 군대-축구-군대에서 한 축구 남성3단레파토리를 싫어하는 전형적인 한국여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랐고 유용했던 것은 의외로 축구지식보다 남자가 원하는 축구 좋아하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책의 초반부에 주로 언급되긴 하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문제의식이다. 이 책의 본질은 주제(축구 속성 과외)가 아니라 함의(남성의 니즈 어필)였다. 복잡하고 은근하게 돌려 말하는 건 여자만의 언어습관이라고 생각했던 내겐 다소 충격적이었던 부분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측은하기도 하였다. 얼마나 한국여자는 한국남자들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던 걸까, 이해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거의 하지 않고 사는구나 싶었다.

 

요약하면 축구에 있어 남자가 찾는 여자는 동료가 아니라 해어화이다. 아무리 양성평등하고 싶어도 여자가 손님으로 비즈니스 접대에 끼는 등 남자들이 하는 것 다 하려고 하다간 미친년 취급받으며 양성 모두에게 매장 당하, 축구 역시 남자들만의 동성 유니티 성격이 강한 영역이란다. 축구지식과 뉴스를 다 꿰고 있고 술술 말하는 같이 오타쿠질을 할 광팬보다는 언제 어디서 축구를 봐도 이해해주고 안주나 아이템을 챙겨주는 센스가 있고 축구 얘기에 눈 반짝거리며 잘 들어주는 여자가 남자들이 원하는 축구 좋아하는 여자였다. 화룡점정은 축완얼, 차처럼 같이 응원 다니면 폼 나는 예쁜 여자면 금상첨화이다.

 

원하는 지식 습득 때문에 집었다가 남자들의 적나라한 니즈까지 알고 갈 수 있어 횡재한 기분이었지만 한편으론 야구나 농구 등 다른 스포츠 종목보다 팬질의 진입장벽이 쎄겠구나 싶어 씁쓸하였다. 또 으레 여성들은 그렇다며 자꾸 누가 잘생겼고 타령만 줄창하는 작가에게 화를 내고 싶다가도, 이러한 주장과 시선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맞다, 순도100% 종목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여자가 축구에 빠지기는 정말 쉽지 않다. 얼빠나 이성 때문에 축구를 공부하고 좋아해보겠다는 게 나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책의 카피처럼 씨날두만 알았다고 끝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본 포메이션이나 언제 어떤 경기를 어떻게 보고 즐겨야 하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했던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시작은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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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너머 1318 그림책 2
이소영 글.그림 / 글로연 / 201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그림자 너머] 나는 나의 주인공 : 빛을 찾아 떠난 머리=몸=마음의 여행
 
 
 
어디로 가는 걸까, 다들 뭐 하는 거지? 난 무얼 하고 싶은 걸까
 
채워도 채워도 부족한 기분이 들 땐,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 보는 거야. 그림자 너머.
 
- 본문 中
 
언젠가부터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에서 우리 작가의 수상 소식들이 속속 들리기 시작하였다. 매년 번역서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우리나라는 현재 출간되는 책 10권 중 4권이 번역서이다. 매출순위 상위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동 및 학습서 출판사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은 가운데,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사랑 받는 작가들이 계속 등장한다는 것은 매우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2014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 수상작들이 한창 출간 중인 요즘,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선정된 우리 작가 이소영의 책 역시 출간되었다. 제목은 <그림자 너머>, 삽화 전부를 실크스크린으로 작업한 이 그림책에 빠져 있노라면 괜찮은 현대미술 전시회에 다녀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많은 색을 쓰지 않음에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삽화의 색감들과 거칠고 단순한 듯 보이지만 주제의식은 뚜렷한 그림, 그리고 그 그림과 어우러지는 스토리텔링에 한없이 빠져들고 작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나는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마음
손해 보지 않고 빨리 갈 수 있는 마음
너 없이는 허전해서 살 수 없는 마음
너를 더 열심히 살게 하는 마음
- 본문 中
 
몸통이 없는 머리가 머리가 없는 몸통을 만나러 간다는 <그림자 너머>의 기본 아이디어는 쉘 실버스타인의 <The Missing Piece(국내에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를 떠올리게 한다. 주목할 것은 머리와 몸통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마음’인데 작가는 이것이 뇌(머리)의 영역이 아닌 심장(몸통)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적·감성적 발상이므로 이에 대한 신경생리학적 오류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머리가 굵어진다’는 표현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는 타인과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에 맞춰 성장하는 것을 ‘머리’의 세계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나’를 깨닫기 위해, 마음의 소리를 듣기 위해 ‘몸(통)’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에게 마음을 품은 ‘몸(통)’이 ‘참자아’이다. 그래서 책 속에서 머리와 달리 몸통은 가슴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대부분의 그림책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가끔 성인을 위한 그림책이 나온다. 하지만 경계인인 청소년을 위한 그림책은 많지 않다. 장르 특성상 웬만한 그림책들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고, 청소년 대상으로 한정할만한 특별한 주제가 거의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한다. <그림자 너머>는 독특하게도 청소년을 위한 그림책이고 이 책을 낸 글로연에서 기획한 1318그림책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그러나 <그림자 너머> 역시 청소년 도서들이 주로 다루는 자아 찾기나 정체성 고민의 주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다만, 이런 주제와 타깃의 ‘우리’ ‘그림책’이 많지 않았다면, 개척자의 차원에서 충분히 존재 가치가 있다.
 
 
예전에 우린 같은 곳에서 함께 세상을 바라봤어
언젠가부턴가 너의 커지는 생각이 나를 작아지게 했지
커진 네 그림자 속에서 내 빛도 점점 희미해졌어
 
내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찾은 너
수많은 너의 마음들을 지나 찾아온 너
그리고 점점 자라나는 너
한층 더 환한 너
 
- 본문 中
 
<노자(도덕경)>에 ‘知人者智 自知者明’란 표현이 나온다. 남을 아는 것을 지혜라 하고 자신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는 말인데 이 밝음(明)이란 개념이 <노자>를 관통하는 明道, 도를 깨우쳐 환함(혹은 그런 사람)이다. <그림자 너머>의 결론을 보며, <노자>를 떠올렸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남의 시선과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세상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그림책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청소년 뿐 아니라, 인간이 평생 안고 가야 할 고민일 것이라고 말한다. 수상 사실만으로도 믿고 가는 삽화의 매력, 그것이 담은 철학적 메시지까지, 청소년 대상이지만 다른 연령대에서도 충분히 공감하고 빠질만한 그림책이다. 책 끝에 부록 성격으로 담은 실크스크린 작업기나, 띠지 뒤의 미니갤러리도 확인해보길, 특히 작가의 에필로그는 꼭 읽어보길 권한다. 작가의 주제의식을 명확히 엿볼 수도 있고, 어떤 서평보다 더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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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너머 1318 그림책 2
이소영 글.그림 / 글로연 / 2014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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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너머] 나는 나의 주인공 : 빛을 찾아 떠난 머리=몸=마음의 여행
 
 
 
어디로 가는 걸까, 다들 뭐 하는 거지? 난 무얼 하고 싶은 걸까
 
채워도 채워도 부족한 기분이 들 땐,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 보는 거야. 그림자 너머.
 
- 본문 中
 
언젠가부터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에서 우리 작가의 수상 소식들이 속속 들리기 시작하였다. 매년 번역서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우리나라는 현재 출간되는 책 10권 중 4권이 번역서이다. 매출순위 상위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동 및 학습서 출판사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은 가운데,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사랑 받는 작가들이 계속 등장한다는 것은 매우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2014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 수상작들이 한창 출간 중인 요즘,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선정된 우리 작가 이소영의 책 역시 출간되었다. 제목은 <그림자 너머>, 삽화 전부를 실크스크린으로 작업한 이 그림책에 빠져 있노라면 괜찮은 현대미술 전시회에 다녀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많은 색을 쓰지 않음에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삽화의 색감들과 거칠고 단순한 듯 보이지만 주제의식은 뚜렷한 그림, 그리고 그 그림과 어우러지는 스토리텔링에 한없이 빠져들고 작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나는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마음
손해 보지 않고 빨리 갈 수 있는 마음
너 없이는 허전해서 살 수 없는 마음
너를 더 열심히 살게 하는 마음
- 본문 中
 
몸통이 없는 머리가 머리가 없는 몸통을 만나러 간다는 <그림자 너머>의 기본 아이디어는 쉘 실버스타인의 <The Missing Piece(국내에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를 떠올리게 한다. 주목할 것은 머리와 몸통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마음’인데 작가는 이것이 뇌(머리)의 영역이 아닌 심장(몸통)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적·감성적 발상이므로 이에 대한 신경생리학적 오류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머리가 굵어진다’는 표현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는 타인과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에 맞춰 성장하는 것을 ‘머리’의 세계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나’를 깨닫기 위해, 마음의 소리를 듣기 위해 ‘몸(통)’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에게 마음을 품은 ‘몸(통)’이 ‘참자아’이다. 그래서 책 속에서 머리와 달리 몸통은 가슴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대부분의 그림책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가끔 성인을 위한 그림책이 나온다. 하지만 경계인인 청소년을 위한 그림책은 많지 않다. 장르 특성상 웬만한 그림책들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고, 청소년 대상으로 한정할만한 특별한 주제가 거의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한다. <그림자 너머>는 독특하게도 청소년을 위한 그림책이고 이 책을 낸 글로연에서 기획한 1318그림책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그러나 <그림자 너머> 역시 청소년 도서들이 주로 다루는 자아 찾기나 정체성 고민의 주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다만, 이런 주제와 타깃의 ‘우리’ ‘그림책’이 많지 않았다면, 개척자의 차원에서 충분히 존재 가치가 있다.
 
 
예전에 우린 같은 곳에서 함께 세상을 바라봤어
언젠가부턴가 너의 커지는 생각이 나를 작아지게 했지
커진 네 그림자 속에서 내 빛도 점점 희미해졌어
 
내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찾은 너
수많은 너의 마음들을 지나 찾아온 너
그리고 점점 자라나는 너
한층 더 환한 너
 
- 본문 中
 
<노자(도덕경)>에 ‘知人者智 自知者明’란 표현이 나온다. 남을 아는 것을 지혜라 하고 자신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는 말인데 이 밝음(明)이란 개념이 <노자>를 관통하는 明道, 도를 깨우쳐 환함(혹은 그런 사람)이다. <그림자 너머>의 결론을 보며, <노자>를 떠올렸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남의 시선과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세상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그림책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청소년 뿐 아니라, 인간이 평생 안고 가야 할 고민일 것이라고 말한다. 수상 사실만으로도 믿고 가는 삽화의 매력, 그것이 담은 철학적 메시지까지, 청소년 대상이지만 다른 연령대에서도 충분히 공감하고 빠질만한 그림책이다. 책 끝에 부록 성격으로 담은 실크스크린 작업기나, 띠지 뒤의 미니갤러리도 확인해보길, 특히 작가의 에필로그는 꼭 읽어보길 권한다. 작가의 주제의식을 명확히 엿볼 수도 있고, 어떤 서평보다 더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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