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1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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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아홉 단편으로 나타난 사내

 

 

 

어째서 한 가지 외모로만 살아야 하나? 매번 똑같은 인물로 살아가는 위험을 왜 감수해야 하나?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나를 분간해낼 수 있는데 말이네. 아무도 이 사람이 바로 아르센 뤼팽이다라고 단언하지 못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네. 중요한 건 누구나 아르센 뤼팽이 이런 일을 했다라고 확신한다는 것이지. - 아르센 뤼팽(p.28)



2010년과 2011년만 해도 조용해 별 주목을 못 받다가 2012년 출판계를 뒤흔든 문제아가 있다. 미르북컴퍼니의 더클래식 시리즈이다. 저작권에서 자유로운 유명 작품을 엄청 빠른 속도와 싼 가격으로 번역본을 내놓았다. 일본 책이든 독일 책이든 영미 책이든 모두 영문판을 붙여 어학 학습서(실용서)로 판매함으로써 개정 전 도서정가제에서도 출간과 동시에 마음대로 할인이 가능했고 개정 후 도서정가제에서도 재정가가 가능한 18개월 이상 구간은 재정가를 통해 예전 같은 파격가로 판매하고 있다. 전자책은 더욱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팔았다. 빠른 번역과 낮은 가격 때문에 좋은 번역가를 구하기 쉽지 않아 엉망인 번역본들이 속출했지만, 출판사는 일단 책부터 빨리 내놓고 박리다매로 얻은 수익을 얻은 후 수정쇄를 만들고 다른 책의 번역 질을 높이는 전략을 고집하였다. 많은 출판사들이 번역서 생태계를 파괴한다고 비난하였다. 하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간간히 좋은 번역본도 나왔고, 특히 평소 책을 많이 안 읽고 책값이 비싸다고 투덜대던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더클래식 시리즈와 유사한 시리즈가 또 하나 나타났다. 참돌의 출판브랜드 코너스톤, ‘원전’ ‘완역본원칙을 고수하면서 낱권 당 5900원에서 9900원의 파격적인 가격을 자랑한다. 그로 모자라 세트로 사면 낱권 당 가격이 평균 3000원대에서 4000원대로 떨어지고, 전자책으로 사면 몇 푼 안 되는 가격에 영문판을 끼워주는 기적의 셈법을 자랑한다. 번역은 번역집단 중 가장 신뢰를 많이 받으며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이탈리아어 6개 국어 번역이 가능한 바른번역에게 맡겼다. 2012년 셜록 홈즈 전집, 올 초 데일 카네기 전집에 이어 이달 초 아르센 뤼팽 전집 절반 분을 내놓았다. 특히 아르센 뤼팽 전집은 잘 만들어져야 하는 책이었다. 현재 바른번역의 명성은 전적으로 영미번역 때문에 만들어졌다. 영미번역으로 시작했고, 다른 외국어 부문은 아직 약한 편이다. 프랑스어 부문의 경우 번역가 풀 자체가 굉장히 빈약하다. 기존의 까치글방 완역본과 황금가지(민음사) 완역본이 12년 이상 되었기 때문에, 잘만 만든다면 출판사에게도 바른번역에도 보배가 될 수 있었다.

 

 

아직 나머지 절반분이 나오지 않았지만 이번에 나온 1차분만 놓고 보면 일단 합격점이다. 바른번역 자체도 왓북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영미번역 그룹에서 2013년 아르센 뤼팽 단편들을 500원짜리 전자책으로 내놓았던 적이 있다. 번역이 거의 번역가 지망생의 연습 숙제 같은 조악한 수준이었는데, 단 한 문장도 쓰지 않고 이번에 완전히 새로운 번역본을 내놓았다. 코너스톤 아르센 뤼팽 전집엔 원전에 대한 정보라든가 작품 해설, 역자 후기가 전혀 없다. 그래서 중역본인지 직역본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은 아쉽지만, 문장이 가독성 좋고 깔끔해서 만족스럽다. 장르문학 전문가인 장경헌과 나혁진에게 감수를 맡겨 비 장르문학 번역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주석은 그렇게 많지 않고, 본문 상에서 괄호로 처리하였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 자체가 마니아 코드가 심하다거나 내용이 어려워 주석을 많이 필요로 하는 작품이 아니기에 이 정도의 주석 양도 충분하다.

 

 

모리스 르블랑은 20대 중반부터 작가 생활을 시작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지만 별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40대 초반 편집장의 제의로 신간 잡지 <주 세 투>에 연재한 아르센 뤼팽 단편들이 돌풍을 일으켰고, 죽을 때까지 아르센 뤼팽 시리즈 집필에만 매달린다(오랫동안 아르센 뤼팽 시리즈 마지막 작품은 <아르센 뤼팽의 수십 억 달러>로 알려져 왔으나 그 후에도 써왔고 죽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은 원고가 있다는 사실이 19년 전에 발견되었음.). 모리스 르블랑은 양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었는데, 전쟁 중에도 발표 공백이 2년이 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래서 아르센 뤼팽 전집은 모리스 르블랑의 출세작이자 그의 전부이다. 모리스 르블랑은 젊은 시절 지금의 아이돌 소녀 팬들처럼 당대 쟁쟁한 프랑스 문인들을 쫓아다녔고 특히 모파상을 열렬히 숭배하였다. 뤼팽은 평생 프랑스적인것을 고민하던 그가 만든 궁극의 프랑스적 슈퍼 히어로였다.

  

 

장르문학계에서 아르센 뤼팽 시리즈는 장르문학사의 중요한 고전으로 인정하는 것 외에 크게 평가를 하지도 않고 관심도 별로 없다. ‘오타쿠로서 팔 거리가 별로 없는 책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독자가 정교한 트릭을 맞추는 재미를 별로 느낄 것도 없고, 변신에 능하고 로맨티스트이며 기타 등등 성격적으로 엄청나게 매력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허구한 날 잡혔다가 도망갔다가 난리다. 하지만 그런 점들 때문에 아르센 뤼팽 시리즈는 국민 오락 소설이 되었다. 부자들이 가진 온갖 보물들을 훔치지만 순전히 재미로 즐기는 것일 뿐 탐욕이 없다. 길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를 만큼 별별 모습으로 분하며 프랑스 전역을 활보하고, 프랑스인의 온 몸은 낭만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 중에 잠시 현실 도피하게 해준 웃기는 친구였고, 30년 이상 이어지며 당대 프랑스와 같은 시공간을 공유했으니 어떤 프랑스인이 뤼팽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주 세 투>의 편집장 피아르 라피트은 셜록 홈즈의 대항마를 원했고, 자신의 잡지가 프랑스의 <스트랜트 매거진(셜록 홈즈 시리즈 연재처)>가 되기를 바랐다. 재밌는 것은 모리스 르블랑은 코난 도일도 셜록 홈즈도 전혀 모른 상태에서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내놓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처음엔 셜록 홈즈 시리즈의 의식은커녕 홈즈 자체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독자들이 뤼팽에 처음 전율을 느낀 것은 허를 찌르는 설정들 때문이었다. 주인공이 도둑인데 정의와 불의의 경계에 있는 애매한 인물이라 선악을 판단할 수 없고,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첫 두 단편 제목은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감옥에 갇힌 아르센 뤼팽이었다. 이미 셜록 홈즈의 인기가 대단했던 프랑스였지만, 뤼팽은 자존심 강한 프랑스인들의 심리 기저-프랑스를 대표하는 새로운 영웅에 대한 갈망-를 건드리며 단숨에 그들을 사로잡았다.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 우연히 뤼펭의 친구가 된 이가 뤼팽에게 직접 들은 체포담. 항해 중인 프로방스 호에 아르센 뤼팽이 타고 있다는 전보에 가니마르 형사 일행은 촉각을 곤두세우는 중. 마침 승객 넬리 양의 보석 도난 사건이 벌어지는데…….

감옥에 갇힌 아르센 뤼팽 프로방스 호 사건으로 수감 중인 뤼팽, 말라키 성에 사는 카오른 남작에게 그의 보물을 훔쳐 가겠다는 뤼팽의 예고장이 도착하는데…….

아르센 뤼팽, 탈옥하다 말라키 성 사건 이후 가니마르에게 탈옥하겠다고 호언장담한 뤼팽, 정말 감쪽같이 심리법정에서 사라지는데…….

불가사의한 여행객 뤼팽의 회고담. 포박에 가방을 빼앗기는 굴욕을 당한 뤼팽, 그것도 모자라 다들 범인이 뤼팽이라고 생각하는 상황. 뤼팽은 줄을 풀고 가짜 뤼팽을 잡으러 가는데…….

왕비의 목걸이 꼬마 뤼팽과 연관된 왕비의 목걸이 도난 사건. 뤼팽의 가족사가 처음 등장하는 작품.

하트 7 얼떨결에 뤼팽의 전담 연대기 작가가 된 사연. 하트7이란 이름을 가진 잠수함과 그에 얽힌 사람들의 실체와 관련된 기묘한 이야기

앵베르 부인의 금고 아르센 뤼팽이 유명해지기 전, 뤼팽이라는 이름 자체도 없던 시절의 이야기. 뤼팽은 자신의 생애 최초로 어떤 부인에게 보기 좋게 속은 사건을 친구에게 털어 놓으며 흥분한다.

흑진주 흑진주를 훔치러 간 뤼팽, 흑진주는 없고 한 여인이 죽어 있다. 당연히 가니마르는 범인으로 뤼팽을 의심하고, 뤼팽은 직접 진범을 찾아 나선다.

헐록 숌즈, 한발 늦다 뤼팽과 숌즈(홈즈)의 첫 대면. 뤼팽의 정체를 알고 뤼팽을 잡으러 나선 숌즈는 뤼팽을 보고도 놓치는데다가 뤼팽에게 소매치기까지 당하는데…….

 

모리스 르블랑은 아홉 편 연속 단편소설로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내놓는다. 그걸 엮은 아르센 뤼팽 전집 첫 번째 권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은 아홉 단편으로 표현한 아르센 뤼팽의 자기 소개서 같은 책이다. 때로는 다른 입을 통해, 때로는 뤼팽 자신이 직접, 때로는 전지적 시점을 통해 뤼팽이 벌인 아홉 개의 사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스스로도 자기 자신의 원래 외모를 잘 모르겠다고 할 만큼 변신에 능한 장점을 살려 신출귀몰한 뤼팽, 특히 그가 날리는 예고장은 이후 수많은 괴도물이 오마주로 이용하는 코드가 되었다. 모리스 르블랑은 아홉 번째 단편 헐록 숌즈, 한발 늦다를 통해 처음 뤼팽과 숌즈(홈즈)를 만나게 한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이기려고 만들었기에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서 숌즈는 뤼팽에게 늘 지고, 독자들은 그걸 아는 상태에서 둘이 어떻게 투닥이는지를 지켜보기 위해 책장을 넘긴다. 헐록 숌즈, 한발 늦다를 읽고 아쉬움을 느끼기도 전에 두 중편 소설로 이루어진 뤼팽과 숌즈의 대결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가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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