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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알랭 드 보통 지음, 지주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작가의 책을 한 권만 읽고서 무한한 신뢰감을 느낀다고 한다면 누군가 성급한 판단이란 비난을 해도 반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내게 있어 알랭 드 보통의 처녀작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나는 이 작가가 "우리가 명확히 서술할 수는 없었으나 우리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느낌들을 지적해 주는 능력"(둘, 자신을 위한 독서법, 41쪽)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열광했다.
그렇지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연상시키는 이 책의 친근한 제목에도 불구하고, 혹시 이 책이 미리 프루스트의 작품을 읽어두지 않은 나의 게으름을 후회하게 만들지 않을까 조금 걱정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이 책이 프루스트를 읽을 수 있는 훌륭한 동기 유발이 된다고 생각한다.
프루스트를 우리말로 쓸때마다 어김없이 '푸르스트'라고 쓰는 버릇은 대학교때부터 시작됐는데, 어쩌면 그 귀찮은 헷갈림으로부터 나는 프루스트와 멀어졌는지도 모르겠다. 2학년 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부분독해를 하면서, 한 페이지가 넘어가도 끝나지 않는 문장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당시에 국내에는 번역본이 1편 '스완네 집쪽으로'만 나와있었기 때문에, 그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전부인줄로만 알았던 나는 그것이 7편으로 이루어진 장대한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완전히 용기를 상실했다. 그 후로 이 작품의 완역본이 나오면서 다시 한 번 시도해보고픈 생각이 들긴 했지만 역시 실천은 하지 못했고 결국은 이렇게 간접적으로 프루스트를 만나게 됐다.
이 책은 프루스트에 대한,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본격적이고 전문적인 연구서는 아니다. 하지만 나처럼 여러 번 용기를 상실했거나, 여전히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프루스트에 대한 애정을 갖게 하는 아주 따뜻하고 친절한 안내서이다. 이것은 프루스트의 세계로 들어가는 조금 색다른 문이기도 한데, 알랭 드 보통은 특유의 유머를 곁들여 이 느릿하고, 지루하고, 긴 작품 속에 녹아있는 프루스트의 통찰을 우리의 실제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쉽게 설명해준다. 그런데 솔직히 어떤 부분에서는 이것이 속물적이고 나약한 작가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한없는 애정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프루스트를 옹호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나역시 알랭 드 보통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한없는 애정을 발휘하여, 이것은 프루스트에 대한 참신하고 새로운 조명이라고 기꺼이 주장하고 싶다.
이 책의 효과는 실로 즉각적이었는데, 심지어 나는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으며 내 앞에 앉은 여자가 흘끔흘끔 쳐다볼 때도 관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눈빛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뭔가 나에게 불만이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냥 무시하려고 했지만 눈길이 여러 번 닿았기 때문에 나도 그녀를 몰래 쳐다볼 수밖에 없었는데, 나는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본 끝에, 그 이유가 내 옷차림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렸다. 내 평범하다 못해 촌스럽기 그지없는 옷차림과는 달리 그녀는 언뜻 봐도 공들여 멋을 낸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같은 여자인 내가 좀 못마땅하게 여겨졌을 수도 있을 것이고, 실제로 내가 집에 와서 거울을 본 결과 그렇게까지 흘끔 쳐다볼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다지 맘에 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초대받기를 원했던 사람에게서 초대받지 못했다고 해서 괴로워했던 베르뒤랭 부인처럼 자신을 비하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더 많을 수밖에 없"(넷, 훌륭하게 고통을 견디는 법,103쪽)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배웠기 때문이리라.
더불어 이 책의 또 한 가지 장점은 바로 독서의 쾌감이다. 책을 읽다보면 그냥 그런 책, 쫌 재미있는 책 등 여러가지 감정이 들기도 하고, 아무런 느낌이 안 들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리뷰를 쓰든지 대화를 나누든지 어떻게든 피드백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때는 쓰는 즐거움이 읽는 즐거움을 능가하고, 내가 뭔가에 활발히 반응하고 있음을 스스로 느낀다. 이것이 바로 독서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즐거움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 책은 드물게 원서 제목보다 고친 제목이 더 잘 어울리는 책이다.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는 약간 자기계발서 냄새가 나는데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는 우리의 호기심을 은근히 자극하면서 '프루스트 한번 읽어보실래요?'라고 권하는 것 같다. 알랭 드 보통은, 마들렌을 홍차에 적셔 한입 베어무는 순간 한꺼번에 떠오른 잃어버린 기억들을 우리들에게 일깨워 준 프루스트가, 과거에 고착되지 않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유효하다는 것을 유쾌하게 입증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