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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보다 조금 더 용감하고, 지금보다 조금 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살 수 있을 베짱을 지녔더라면 난 분명히 주인공 꽁스땅스처럼 살았을거다. 어떤 사람들이 보기엔 소설속의 그녀가 정말 할일 없고 게으르고 한심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한심하고 게으르게, 때로는 자기 본위대로 제 멋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능력인가.
브리짓 존스처럼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걸 가지지 못했어도 당당한(조금 안쓰러운당당함이지만) 모습을, 조금은 애처로워 보여서 사람들이 혀를 끌끌차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도 좋다. 항상 채워져 있는 그릇은 뭔가를 더 넣기 위해 뭔가를 버려야 하지만, 항상 덜 채워져 있는 그릇은 언제나 채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 책을 세 번 읽었다. 늘 줄거리를 잊어서 읽을때마다 새롭다는 느낌,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가 기억력을 부여하는 대신 항상 새롭게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을 줬나보다.(얼토당토않은 자기 변명..) 세 번만에 이러한 구절이 머리에 들어왔다. '사랑에는 살을 섞는 일이 필요하다. 그건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서로의 몸을 섞는 일은 사랑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 아직까지 그게 전부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서로의 알몸을 봐야 진정으로 마음을 열수 있게 되는 거라는 데에는 동의한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사회적 관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자와 남자가 자는 문제. 나로서는 당분간일지라도 탁상공론일 수 밖에 없는 문제로다.
혼전 경험자를 외계인 취급하고, 그것은 저 멀리 파란 눈동자의 사람들 속에서나 자연스런 일이라고 생각하는게 너무 유아기적인 발상인가.. 파란 눈동자의 사람들 속에서는 아름다운 일인데, 왜 내 나라에서는 그게 어떤 가해와 손해라는 냉정한 경제원리에 따르게 되었을까. 그녀의 자연스런 경험에서 나온 삼척동자도 다 안다는 이 한구절이 동거문화를 정착시킨 서양인들의 합리적 사고방식 운운하는 데까지 내 생각을 끌어내게 되었으니, 내 무지의 소산으로 그렇게 되었는지, 그녀의 필력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사랑에는 살을 섞는 일이 필요하다'의 뉘앙스는 결과론적이다. 사랑은 비로소 살을 섞는 일로 완성된다라는 결론을 암시하는 듯한. 어떻든 삼척동자도 안다는데, 그녀가 그렇게 확신하는데 한번 믿어볼까. 위에 거론된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절대 아니다. 이 책은 풍부한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쓰여진 재기발랄한 책이며 한 여자가 사랑을 찾게 되는 여정을 그린 참 마음에 드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