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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수은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프랑스/핀란드/스페인,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영국,인도,남아프리카,호주/일본/루마니아
*각국의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의 책표지 디자인이다. 코엘료 공식홈페이지에 일본어로 보기는 되어 있는데 한국말로 보기는 없는 것이 아쉽고, 또 일본판 표지는 저렇게 게시되어 있는데 우리 것은 없어서 아쉽다*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나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다한다면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신께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영적 모험에 대한 내 의무감은 종교 때문은 아닙니다.
What is your religion?
I'm a Catholic. But I think that each and every religion, if chosen with sincerity, leads to the same God. And I don't transfer to my religion my responsibility for my spiritual search.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에서 얘기된 '신의 얼굴에 깃들인 여성성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보인다'라는 생각을 가톨릭 교회가 수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50년 혹은 200년이 걸리더라도 수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Do you think the Catholic Church will accept the idea of the feminine side to God's face, manifest in the presence of the Virgin Mary, as narrated in By The River Piedra I Sat Down & Wept?
Yes, I do. It might take fifty or two hundred years, but it will be accepted.
코엘료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이 소설과 관련된 질문과 답변이다.
사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의견이 가톨릭 외부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조차도 분분한 우리의 상황에서, 그에 관한 이토록 극적이고 직접적인 '대중소설'이 번역 출판되었다는 것이 실은 좀 놀랍기까지하다.
몇 해전까지 나에게 이 소설은 신비로움을 가미하기 위해서 종교 이야기가 덧대어진 사랑 이야기일 뿐이었다. 특히 '시벨레, 대지의 여신, 이시스' 등 보편 신화에 성모를 포함시키는 표현과 '그'의 이적 행위는 필라가 느꼈던 것처럼 '신성모독 같았고(p.107)' 약간 거부감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 작가는 우리에게 성모의 존재를 일깨우기 위해 이 글을 썼나, 아니면 공격하기 위해 교묘한 우회적 수법으로 이 글을 썼나, 이 작가는 가톨릭에서 세례받은 신자인가 아니면 단지 종교를 소재로 작품을 쓰는 작가인가. 작가와 작품은 별개라지만, 적어도 이 작가의 종교 성향은 어떤지, 이 작품을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혼란스러웠을 때 들었던 의문들이었다. 어쨌든 그는 가톨릭 신자라 하니, 기본적 의구심은 걷어내고 소설을 읽도록 해보자.
소설을 읽다보면 필라의 심정과 시선은 자연스레 우리의 그것과 겹친다. 사랑 앞에서 두려워하고, 마음보다는 외모에 신경을 더 쓰는 젊은 여성의 모습, 모험보다는 돌아갈 현실에 급급하는 꿈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모습, '성모 존재의 신비'를 거부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신앙인의 모습.
결국 코엘료는 성모 신심을 발견하는 영적 과정을 통해 필라가 이러한 모습들을 극복해나가는 것처럼, 우리들을 그 신비에로 초대하는 것이 아닐까.
여정
마드리드의 시벨레 광장에 있는 분수에서 물을 본 소녀가 "물은 그녀의 현현(顯現)"(p.39)이고, 시벨레가 "대지의 여신의 현현"(p.40)이라고 말했을 때, 필라는 그녀를 "확실히 미친 여자애"(p.41)라고 생각한다. 아직 필라는 미명아래 있다. 그렇지만 암시적 단어들을 듣게 되면서 여신/성모의 존재를 자각한다.
필라와 그는 비 내리는 빌바오를 지나 한밤중에 안개낀 생사뱅에 도착한다. 생사뱅에서 그는 필라에게 "하느님은 사랑이지만, 그걸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성모님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냉담자가 되버린 필라,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야. 마리아는 단지 당신의 자궁에 예수를 받아들였던 한 여인에 불과해."라고 반박한다.(p.90) 이 말은 우리의 한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필라를 다그치거나 더 이상의 종용없이 그저 미소를 짓는다. 그녀가 이해하는 순간이 오길 기다리는 것이다.
생사뱅에서의 첫번째 밤, 저녁식사를 마치고 포도주를 마시며 그는 본격적으로 성모 마리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에 대한 필라의 반응이란, 역시 우리의 반응과 같다.
'성모 마리아라니! [...] 그는 여전히 어린 아이의 가톨릭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p.106)
벗어나지 못한 것은 그가 아니라 필라이고, 우리이다. 이제 그녀는 흥분된 어조로 묻기 시작한다.
"왜 성모 마리아는 하필 동정녀야?"(p.106)
"대체 성모 마리아가 누구야?" (p.107)
이것은 우리가 했던 바로 그 질문들, 혹은 우리가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그 질문들이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해 그는 "신의 다양한 면모 가운데 하나가 여성의 면모"(p.109)이며, 모든 종교와 전통 속에서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는 여신/성모는 생명의 원천인 물의 속성을 지녔다고 설명한다. 루르드의 기적의 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마침내 "신의 여성적 면모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p.115) 그는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까?
"나는 성모 마리아의 제자야. 나는 그분을 통해서 배웠어."
"그럼 넌 그녀를 봤단 말이야?"
"그래."(p.116)
자, 이제 필라는 홀로 생각한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필라는 침묵하는 사랑, 잃어버렸던 신앙,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에 대해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잠이 든다. 그리고 그녀의 영혼은 사랑으로 범람한다.(p.126)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직 그가 신학교에 소속되어 있다는 말을 들은 필라는 감히 사랑할 수 없는 대상 위에 넘쳐 흐르는 자신의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고 기도한다.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성모 마리아가 했던 그 기도대로. 마리아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아들을 자신의 뱃속에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처럼.(p.144)
그들은 비로소 여정의 정점, 루르드로 간다. 그는, 그곳에 있는 한 집에서 필라에 대한 사랑을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자신이 받은 은사대신 한 남자로서의 사랑을 택하기로 마음먹고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다. 가랑비가 내리는 루르드의 대성당에서 그가 '기적을 행하는 자'라는 말을 들은 필라는 그의 영적 삶과 자신이 꿈꾸는 속세적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며 성모님께 기도한다.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에 필라는 비로소 변모하기 시작한다. 낯선 언어로 기도할 수 있게됨으로써 "성모님이 그녀를 품에 안고 옷자락으로 덮어 따뜻하게 지켜주심을 느낀다".(p.165)
처음, 그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필라는 그가 가진 성모에 대한 사랑과 그녀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질투한다. 그러나 조금씩 그의 영적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그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지 고뇌하며 기도한다. 이렇게 필라 자신은 스스로 마음을 열고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와 함께 세계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길을 열고 싶어 하는데"(p.214) 원장신부와 그는 그가 사제로서, 혹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서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필라 곁에서 그녀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신을 섬기기를 권고하고 택한다.
피에트라에서 그는 필라에게 고백한다. 자신에게서 은사의 잔을 거두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세상에 봉사하겠노라고. 그녀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자신 때문에 신의 원대한 계획이 포기되었기 때문에? 아니다, 그는 자신이 그것을 포기한다고 해서 은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 자신이 은사의 일부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동참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녀는 그것만이 신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영웅적인 행동만이 신의 뜻을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신께로부터 은사를 받은 이들의 기적을 통해서 신의 계획이 드러나지만, 진정 세상을 구원하는 일은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진정 사랑하는 일을 통해서도 실현될 수 있음을 말하려는 것 같다.
다시 작가노트로.
작가노트에서 코엘료는 두 가지 상반되는 이야기를 한다.
"영적 체험이 구체적인 사랑의 체험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p.13)
그러나 다음 페이지에서 코엘료는
"구체적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적인 길에 가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p.14)
라고 말한다.
결국 상충하는 이 두 문장은 다음의 인용문에서 올바른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영적인 삶은 사랑이다. [...]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과 일치하는 것이고, 상대방 속에서 신의 불꽃을 발견하는 일이다."
코엘료는 "모든 것을 다 내주는 신비를 정확히 이해한 성모님"(p.90)을 알고 있는 한 남자와 그 신비를 깨달아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p.14) 우리는 성모님께 전구함으로써 우리의 사랑이 영적인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맬 때 가장 정확한 길을 보게 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