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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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의 『전날의 섬』을 읽다가 불현듯 생각나서 동시에 읽기 시작했다. 아마도 에코의 책을 읽으며 나의 무의식이 몇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 것 같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병치되어 전개되면서 조금씩 섞여드는 과정이라든가, 햇빛에 약해 밤을 도와 행동하는 주인공 등등. 한 권의 책이 또 다른 책으로 이끌고 서로 교감을 이루는 것을 체험하는 일은 독서의 크나큰, 그리고 색다른 묘미이다. 『상실의 시대』에서 『위대한 개츠비』로 나를 이끈 하루키는 이번에는 스탕달과 투르게네프와 발자크로 이끈다. 이런 책을 만나면 다음 번에 읽을 책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가끔은, 읽지 않은 수많은 책이 꽂혀 있는 책꽂이 앞에서 서성거리는 일이 책들 보기에 민망스럽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나는 소설의 첫관문인 엘리베이터 장면에서부터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건 엘리베이터가 자주 등장하는 내 꿈 속의 장면들과 너무나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처음 이 책을 사고 나서는 초반부를 읽다가 그만 두었는데, 책을 다시 읽었을 때는 그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엘리베이터 이야기가 그 당시 내 무의식 속에 깊은 흔적을 남겼을 수도 있다. 내 꿈 속에서 엘리베이터는 단순히 수직이동하는 기계가 아니라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건물과 건물 사이를 무서운 속도로 넘나든다. 내부는 고급스런 응접실로 꾸며져 있기도 하고 때로는 큰 사무실 하나를 엘리베이터로 개조한 것처럼 널찍하다. 어쩌면 내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패스워드는 '기묘한 엘리베이터'일지도...
엘리베이터 뿐만 아니라 소설의 많은 상황들이 악몽의 순간들과 비슷하다. 건물 내부에서 지하 깊숙이 숨어있는 노박사의 연구실, 손에 잡힐 듯한 덩어리진 어둠, 그속에서 활동하는 야미쿠로 같은 악의 세력들은 악몽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미지들이다. 아마도 하루키는 정신없이 꿈속을 헤매다 한밤중 벌떡 일어난 뒤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다시 각설하고.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의식'의 세계라면, 세계의 끝은 '무의식'의 세계이다. 직업이 계산사인 이 소설의 주인공 '나'는 그 자체로 컴퓨터와 같은 기능을 하는 일종의 정보처리사이다. 우리 사회의 정보처리사가 컴퓨터를 이용해서 정보를 처리한다면, '나'는 자신의 두뇌, 즉 몸을 이용하여 어떤 수치를 계산해낸다. '코드명 J(Jonny Mnemonic)'의 조니처럼. 그런데 '세계의 끝'은 '나'가 자신의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패스워드이기도 하다. 이 '세계의 끝'은 이 소설에서는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도시처럼 부정적 이미지로 나타나지만,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주인공 다무라 카프카가 도달해야할 궁극적 세계이기도 하다. 
'세계의 끝'에서 '나'와 분리된 그림자는 이곳이 완전하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럽다'고 말한다. 이곳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생기없는 평화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미움과 슬픔, 욕망과 시기를 느끼지 않고 아무런 고통없이 살 수 있기 때문에 '세계의 끝' 외부에서 그러한 고통을 느끼며 살았던 사람들은 이곳이 완전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완전'이라는 것의 개념이 무엇일까. 완전이란 불완전을 포함해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완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미움과 슬픔, 욕망과 시기와 같은 고통이 빠진 곳에서 '나'는 부자연스러움을 느끼고 그곳에 동화되지 못한 채 그림자와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사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이 사라진 이곳에서 사랑은 그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을 것 같지만, 사람들은 사랑을 알고는 있되 느끼지를 못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무의식의 세계 속에 자신이 꿈꾸는 유토피아인 원더랜드를 만들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그 세계는 실제로는 하드보일드(hard boiled : 무감각한)한 원더랜드, 즉 모순적인 세계였다.  고통이 없기 때문에 행복할 것 같지만 그곳은 '경이로운' 곳이 아닌 '이상한'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매트릭스>의 설계자는 매트릭스를 고통과 악을 뺀 상태로 프로그래밍했더니 사람들이 다 죽어버렸다고 했다. 인간이란 행복해지기 위해서, 즉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진보를 추구하고 애써 노력하지만 결국 고통이란 실존의 본질이며 행복의 일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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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3 13: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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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이마고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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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도정일 선생의 글을 자주 접하게 된다. 선생은 최재천 선생과의 <대담>에서 '인문학적 경험은 타인에 대한 고통의 이해다'라고 말했고, 최근 신문기고에서는 '세계의 양극화를 해소하는 길은 사회적 구성원 모두가 책임의 윤리 의식을 지니고 사회적 삶의 고통에 대한 공동 책임감을 지녀야한다'고 말했다.
인문학과 윤리 의식.
최근까지 이 둘은 내게서 각각 따로따로 존재하던 것들이었다. 책을 통해서 내가 경험할 수 없었던 슬픔과 고통, 기쁨과 환희를 간접 체험하긴 했지만 그것은 감정적 체험이었을 뿐 실천적 경험으로까지 확산되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우리에게 낯선 고통에 대한 관찰을 통해 우리가 소위 '정신병자' 내지는 '미친 사람'이라고 사회적으로 소외시켜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 처음에 책의 제목이나 커버의 삽화를 보고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와 비슷한 부류의 소설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책 속 알맹이는 신경학의 전문지식과 에세이류의 문학적 측면을 동시에 갖춘, 심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따뜻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책은 한 마디로 '문학적 임상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올리버 색스는 '들어가는 말'에서 책머리에 쓸 인용문을 고르는 일에 관해 쓰고 있는데, 책을 읽은 후 다시 인용문을 읽어보니 그가 이 작업에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의사는 자연학자와는 달리... 단 하나의 생명체, 역경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하나의 개체, 즉 주체성을 지닌 한 인간에 마음을 둔다. - 아이비 맥킨지.

환자는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하나의 개체'라는 사실은 곧, 이 책의 모든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상적'이라는 모호하고 극히 주관적인 기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 자신은 자신의 그러한 행동을 인식하고 있을까? 이 책의 대상자들 중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사례도 소개된다. 자기 자신의 팔과 다리를 느끼지 못하고 누군가가 유기한 사지의 한 부분이라고 느끼는 사람들. 영화 <메멘토>에서처럼 기억이 지속되지 않는 사람들. 이러한 감각과 인식과 기억들은 자신을 자신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즉 인간이 "자아에 의해 통일을 유지하는 확고한 존재이게 해주는"(p. 240)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신경계의 이상으로 이러한 감각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우리는 곧 우리를 우리 자신이게 해 주는 주체성을 상실하고 이 세상에서 무의미한 호흡을 반복하게 되는 것 뿐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상실, 과잉, 이행, 단순함'의 세계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우리 신경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굉장한 혼란을 겪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곧, 그렇지 않은 보통의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정교한 존재이며, 그 능력과 생김새, 부유함과 가난함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얼마나 완벽한 존재인가 하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얼마 전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다룬 틱 증후군을 보고 혹시 내가 아는 어떤 아이가 그 증후군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 아이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책을 읽어치우는데, 무언가에 집중하지 않을 때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부쩍 산만하다. 게다가 늘 이상한 버릇을 달고 다녔는데, 처음에 봤을 때는 습관적으로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마른 기침처럼 목소리를 가다듬을 때 하는 것과 같은) 그 버릇이 없어지고 나서는 고개를 두 번 짧은 간격으로 흔드는 버릇이 생겼다. 계속해서 그런 행동을 반복하는데, 나중에는 나마저도 고개를 흔들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의 엄마가 고개좀 흔들지 말라고 하면서 "네가 그렇게 고개를 흔드니까 상대방이 그걸 '아니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잖니."라며 나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에게 네가 고개를 흔든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책을 읽느라 대답이 없었지만 분명 그것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그것을 나쁜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해의 차원에서 '병'으로 인식했더라면 소통의 문제나 엄마의 다그침은 조금 덜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어제는 지하철에서 계속해서 차량 안을 왔다갔다하는 한 청년을 보았다. 사람들이 없었던 터라 지하철 한 량의 한 끝에서 한 끝까지 정확히 점을 찍고 왔다갔다했는데, 내 앞에 앉은 아저씨는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고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거나 초점없는 시선을 어딘가에 두고 있었다. 지하철을 갈아탔는데 아까 그 청년이 갈아탄 지하철에서 또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  예전 같았으면 그 미소가 음흉하고 무섭게 느껴졌을텐데, 어쩐지 그 얼굴이 순박하게까지 보였다.  타인의 눈에 자폐처럼 비친다 하더라도, 그는 그렇게 왔다갔다하면서 자기 자신임을 느끼는 지도 모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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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6 2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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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2006-03-16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부끄럽네요^^;;
 
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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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문구처럼 포복절도할 만큼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머꼬네나 삼미 슈퍼스타즈를 읽을 때만큼 대소(大笑)가 터지지는 않았지만 시종일관 만면에 미소를 띠게끔 해준다고나 할까.

이라부는 아이러니하게도 상담을 받으러 그를 찾아오는 환자들보다 더 비정상적인 정신과 의사다.  환자들이 그를 '변태 의사'라거나 '미친 얼간이' 쯤으로 여기면서도 두 번, 세 번 자꾸만 찾아올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가 '비정상적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이라부의 치료법은 어려운 전문 용어들을 들먹이며 피상적인 처방을 내려주는 정신과 의사들과는 달리, 바로 '환자 그 자신이 되어보기'를 통해 환자로 하여금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안도감을 주는 것에서 출발한다.

때로 우리의 고민들은 누군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눈녹듯 사라져버리는 수가 있다. 이라부를 찾아오는 환자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직업과 관련하여 자신이 가장 잘한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어처구니없이 못하게 되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아주 사소한 곳에서 발생한 불균형은 심리를 불안정하게 하고, 한 번 그것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하면 눈감고도 했던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항상 '잘' 해야하고, 실수는 용납할 수 없고, 고민을 털어놓는 것은 곧 약점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현대인들을 압박하는 공통사항인 듯하다. 

이라부는 그런 압박과 금기 따윈 과감하게 무시하고 인생을 가볍게 만들어준다. 무겁고 불필요한 허례허식의 투구들을 벗게 해주고, 나비처럼 가볍게 삶을 즐기도록 해준다. 환자 스스로가 납득할 수 없는 자신의 문제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또 자연스럽게 소멸되도록 도와준다.

전에 어떤 친구가 '너 나랑 하루만 같이 미친척 해줄래?'라는 희한한 부탁을 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아마 그때 실연을 겪고, 미치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했던 것 같다. 순간 머리속에 떠오른 건 다름 아닌 두려움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어떻게 미칠거냐고 물어봤다. 들어보고 결정하자는 심산이었다. 친구 역시 구체적 계획은 없었다. 솔직히 '미친다'는 건 그냥 미친 '척'에 불과한 것 아닌가. '광인'에 대한 사회적 금기에 세뇌된 우리들로선 미친다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기' 정도? 그 정도면 가능할 것 같다. 불발에 그친 그 부탁, 지금 생각하니 친구에게 미안한 감이 든다. 그냥 함께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친구에겐 큰 위안이 되었을텐데, 정말 같이 미쳐줘야하는 줄 알고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던 내가 웃기기도 하고 바보같기도 하다.

머리가 복작거리던 참에 100%까지는 아니어도, 마유미짱이 막무가내로 놓아주는 비타민 주사 한방 맞은 기분이다. 마치 플라시보 효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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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09 1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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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2005-11-09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정말 한 번 미친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그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면 훨씬 살기가 편할 것 같기도 해요. 물론 좀 외롭긴 하겠지요. 어제는 엄마 모시고 병원에 갔다가 예진하는 신참내기 의사가 하도 틱틱거려 확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의사란 어찌보면 가장 친절해야할 직업이잖아요? 가장 약자를 상대로 하니깐 말이죠. 이라부 같은 의사는 정말 소설에서나 만날 수 밖에 없나봅니다...

2005-11-09 1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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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수은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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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핀란드/스페인,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영국,인도,남아프리카,호주/일본/루마니아
                
*각국의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의 책표지 디자인이다. 코엘료 공식홈페이지에 일본어로 보기는 되어 있는데 한국말로 보기는 없는 것이 아쉽고, 또 일본판 표지는 저렇게 게시되어 있는데 우리 것은 없어서 아쉽다*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나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다한다면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신께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영적 모험에 대한 내 의무감은 종교 때문은 아닙니다.
What is your religion?
I'm a Catholic. But I think that each and every religion, if chosen with sincerity, leads to the same God. And I don't transfer to my religion my responsibility for my spiritual search.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에서 얘기된 '신의 얼굴에 깃들인 여성성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보인다'라는 생각을 가톨릭 교회가 수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50년 혹은 200년이 걸리더라도 수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Do you think the Catholic Church will accept the idea of the feminine side to God's face, manifest in the presence of the Virgin Mary, as narrated in By The River Piedra I Sat Down & Wept?
Yes, I do. It might take fifty or two hundred years, but it will be accepted.
                                            
 
코엘료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이 소설과 관련된 질문과 답변이다.
사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의견이 가톨릭 외부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조차도 분분한 우리의 상황에서, 그에 관한 이토록 극적이고 직접적인 '대중소설'이 번역 출판되었다는 것이 실은 좀 놀랍기까지하다.
몇 해전까지 나에게 이 소설은 신비로움을 가미하기 위해서 종교 이야기가 덧대어진 사랑 이야기일 뿐이었다. 특히 '시벨레, 대지의 여신, 이시스' 등 보편 신화에 성모를 포함시키는 표현과 '그'의 이적 행위는 필라가 느꼈던 것처럼 '신성모독 같았고(p.107)' 약간 거부감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 작가는 우리에게 성모의 존재를 일깨우기 위해 이 글을 썼나, 아니면 공격하기 위해 교묘한 우회적 수법으로 이 글을 썼나, 이 작가는 가톨릭에서 세례받은 신자인가 아니면 단지 종교를 소재로 작품을 쓰는 작가인가. 작가와 작품은 별개라지만, 적어도 이 작가의 종교 성향은 어떤지, 이 작품을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혼란스러웠을 때 들었던 의문들이었다. 어쨌든 그는 가톨릭 신자라 하니, 기본적 의구심은 걷어내고 소설을 읽도록 해보자. 
 
소설을 읽다보면 필라의 심정과 시선은 자연스레 우리의 그것과 겹친다. 사랑 앞에서 두려워하고, 마음보다는 외모에 신경을 더 쓰는 젊은 여성의 모습, 모험보다는 돌아갈 현실에 급급하는 꿈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모습, '성모 존재의 신비'를 거부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신앙인의 모습.
결국 코엘료는 성모 신심을 발견하는 영적 과정을 통해 필라가 이러한 모습들을 극복해나가는 것처럼, 우리들을 그 신비에로 초대하는 것이 아닐까.

                                           

여정
 
마드리드의 시벨레 광장에 있는 분수에서 물을 본 소녀가 "물은 그녀의 현현(顯現)"(p.39)이고, 시벨레가 "대지의 여신의 현현"(p.40)이라고 말했을 때, 필라는 그녀를 "확실히 미친 여자애"(p.41)라고 생각한다. 아직 필라는 미명아래 있다. 그렇지만 암시적 단어들을 듣게 되면서 여신/성모의 존재를 자각한다.
필라와 그는 비 내리는 빌바오를 지나 한밤중에 안개낀 생사뱅에 도착한다. 생사뱅에서 그는 필라에게
"하느님은 사랑이지만, 그걸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성모님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냉담자가 되버린 필라,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야. 마리아는 단지 당신의 자궁에 예수를 받아들였던 한 여인에 불과해."라고 반박한다.(p.90) 이 말은 우리의 한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필라를 다그치거나 더 이상의 종용없이 그저 미소를 짓는다. 그녀가 이해하는 순간이 오길 기다리는 것이다.
생사뱅에서의 첫번째 밤, 저녁식사를 마치고 포도주를 마시며 그는 본격적으로 성모 마리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에 대한 필라의 반응이란, 역시 우리의 반응과 같다.
 
'성모 마리아라니! [...] 그는 여전히 어린 아이의 가톨릭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p.106) 

벗어나지 못한 것은 그가 아니라 필라이고, 우리이다. 이제 그녀는 흥분된 어조로 묻기 시작한다.
 
"왜 성모 마리아는 하필 동정녀야?"(p.106)
"대체 성모 마리아가 누구야?" (p.107)
 
이것은 우리가 했던 바로 그 질문들, 혹은 우리가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그 질문들이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해 그는 "신의 다양한 면모 가운데 하나가 여성의 면모"(p.109)이며, 모든 종교와 전통 속에서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는 여신/성모는 생명의 원천인 물의 속성을 지녔다고 설명한다. 루르드의 기적의 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마침내 "신의 여성적 면모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p.115) 그는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까? 
 
"나는 성모 마리아의 제자야. 나는 그분을 통해서 배웠어."
"그럼 넌 그녀를 봤단 말이야?"
"그래."(p.116) 
 
자, 이제 필라는 홀로 생각한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필라는 침묵하는 사랑, 잃어버렸던 신앙,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에 대해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잠이 든다. 그리고 그녀의 영혼은 사랑으로 범람한다.(p.126)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직 그가 신학교에 소속되어 있다는 말을 들은 필라는 감히 사랑할 수 없는 대상 위에 넘쳐 흐르는 자신의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고 기도한다.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성모 마리아가 했던 그 기도대로. 마리아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아들을 자신의 뱃속에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처럼.(p.144)
 
그들은 비로소 여정의 정점, 루르드로 간다. 그는, 그곳에 있는 한 집에서 필라에 대한 사랑을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자신이 받은 은사대신 한 남자로서의 사랑을 택하기로 마음먹고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다. 가랑비가 내리는 루르드의 대성당에서 그가 '기적을 행하는 자'라는 말을 들은 필라는 그의 영적 삶과 자신이 꿈꾸는 속세적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며 성모님께 기도한다.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에 필라는 비로소 변모하기 시작한다. 낯선 언어로 기도할 수 있게됨으로써 "성모님이 그녀를 품에 안고 옷자락으로 덮어 따뜻하게 지켜주심을 느낀다".(p.165)
 
처음, 그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필라는 그가 가진 성모에 대한 사랑과 그녀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질투한다. 그러나 조금씩 그의 영적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그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지 고뇌하며 기도한다. 이렇게 필라 자신은 스스로 마음을 열고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와 함께 세계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길을 열고 싶어 하는데"(p.214) 원장신부와 그는 그가 사제로서, 혹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서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필라 곁에서 그녀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신을 섬기기를 권고하고 택한다.
 
피에트라에서 그는 필라에게 고백한다. 자신에게서 은사의 잔을 거두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세상에 봉사하겠노라고. 그녀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자신 때문에 신의 원대한 계획이 포기되었기 때문에? 아니다, 그는 자신이 그것을 포기한다고 해서 은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 자신이 은사의 일부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동참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녀는 그것만이 신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영웅적인 행동만이 신의 뜻을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신께로부터 은사를 받은 이들의 기적을 통해서 신의 계획이 드러나지만, 진정 세상을 구원하는 일은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진정 사랑하는 일을 통해서도 실현될 수 있음을 말하려는 것 같다.
 
 
다시 작가노트로.
 
작가노트에서 코엘료는 두 가지 상반되는 이야기를 한다.
"영적 체험이 구체적인 사랑의 체험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p.13)
그러나 다음 페이지에서 코엘료는
"구체적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적인 길에 가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p.14)
라고 말한다.
결국 상충하는 이 두 문장은 다음의 인용문에서 올바른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영적인 삶은 사랑이다. [...]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과 일치하는 것이고, 상대방 속에서 신의 불꽃을 발견하는 일이다."
 
코엘료는 
"모든 것을 다 내주는 신비를 정확히 이해한 성모님"(p.90)을 알고 있는 한 남자와 그 신비를 깨달아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p.14) 우리는 성모님께 전구함으로써 우리의 사랑이 영적인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맬 때 가장 정확한 길을 보게 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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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토토 - 개정판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김난주 옮김,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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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세상에 나쁜 어린이는 없다, 다만 어른들의 나쁜 '시선'이 있을 뿐이다. 아... 과연 이 해맑은 어린 아이들에게 산수 문제 하나, 영어 단어 하나를 가르치는 일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기준이 올바르지 못한데 어떻게 그 기준에 따라 착하고 나쁜 아이를 가려낸단 말인가.

내게 아이가 생기기 전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의 혜택을 받고 나서 주일학교 교사를 했더라면 아이들에게 좀 더 좋은 선생님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에 5년전 만났던 그 아이들에겐 미안한 마음이 든다. 솔직히 아이들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 아이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조급함 때문에 혼을 낸 적이 더 많았다. 내가 이렇게 타이르지 않으면 저 아이는 올바로 행동하지 못할 것이라는 아이에 대한 믿음 부족.

메마르고 쩍쩍 갈라진 마음이라는 밭이 한나절 단비로 홈빡 젖어버린 느낌이다. 어른들의 노파심에 유린당한 우리의 어린시절. 애석한 생각이 들다가도, 이 책을 읽은 사람으로서의 어떤 의무감으로 이제부터 대하게 될 한명 한명의 어린 아이들에게 무한한 인내심을 갖도록 해야겠단 의지가 불끈불끈 솟아오른다.

부모로서 자기확신이 없는 교육의 몫을 일선 학원에 떠맡기는 지금 우리의 모습들. 남들 다 해도 올바르지 않으면 안 할수 있는 용기가 절실히 필요한 것 같다. 방관과 신뢰를 혼동하지 않는 지혜는 물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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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31 09: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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