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에코의 『전날의 섬』을 읽다가 불현듯 생각나서 동시에 읽기 시작했다. 아마도 에코의 책을 읽으며 나의 무의식이 몇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 것 같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병치되어 전개되면서 조금씩 섞여드는 과정이라든가, 햇빛에 약해 밤을 도와 행동하는 주인공 등등. 한 권의 책이 또 다른 책으로 이끌고 서로 교감을 이루는 것을 체험하는 일은 독서의 크나큰, 그리고 색다른 묘미이다. 『상실의 시대』에서 『위대한 개츠비』로 나를 이끈 하루키는 이번에는 스탕달과 투르게네프와 발자크로 이끈다. 이런 책을 만나면 다음 번에 읽을 책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가끔은, 읽지 않은 수많은 책이 꽂혀 있는 책꽂이 앞에서 서성거리는 일이 책들 보기에 민망스럽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나는 소설의 첫관문인 엘리베이터 장면에서부터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건 엘리베이터가 자주 등장하는 내 꿈 속의 장면들과 너무나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처음 이 책을 사고 나서는 초반부를 읽다가 그만 두었는데, 책을 다시 읽었을 때는 그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엘리베이터 이야기가 그 당시 내 무의식 속에 깊은 흔적을 남겼을 수도 있다. 내 꿈 속에서 엘리베이터는 단순히 수직이동하는 기계가 아니라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건물과 건물 사이를 무서운 속도로 넘나든다. 내부는 고급스런 응접실로 꾸며져 있기도 하고 때로는 큰 사무실 하나를 엘리베이터로 개조한 것처럼 널찍하다. 어쩌면 내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패스워드는 '기묘한 엘리베이터'일지도...
엘리베이터 뿐만 아니라 소설의 많은 상황들이 악몽의 순간들과 비슷하다. 건물 내부에서 지하 깊숙이 숨어있는 노박사의 연구실, 손에 잡힐 듯한 덩어리진 어둠, 그속에서 활동하는 야미쿠로 같은 악의 세력들은 악몽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미지들이다. 아마도 하루키는 정신없이 꿈속을 헤매다 한밤중 벌떡 일어난 뒤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다시 각설하고.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의식'의 세계라면, 세계의 끝은 '무의식'의 세계이다. 직업이 계산사인 이 소설의 주인공 '나'는 그 자체로 컴퓨터와 같은 기능을 하는 일종의 정보처리사이다. 우리 사회의 정보처리사가 컴퓨터를 이용해서 정보를 처리한다면, '나'는 자신의 두뇌, 즉 몸을 이용하여 어떤 수치를 계산해낸다. '코드명 J(Jonny Mnemonic)'의 조니처럼. 그런데 '세계의 끝'은 '나'가 자신의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패스워드이기도 하다. 이 '세계의 끝'은 이 소설에서는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도시처럼 부정적 이미지로 나타나지만,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주인공 다무라 카프카가 도달해야할 궁극적 세계이기도 하다. 
'세계의 끝'에서 '나'와 분리된 그림자는 이곳이 완전하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럽다'고 말한다. 이곳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생기없는 평화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미움과 슬픔, 욕망과 시기를 느끼지 않고 아무런 고통없이 살 수 있기 때문에 '세계의 끝' 외부에서 그러한 고통을 느끼며 살았던 사람들은 이곳이 완전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완전'이라는 것의 개념이 무엇일까. 완전이란 불완전을 포함해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완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미움과 슬픔, 욕망과 시기와 같은 고통이 빠진 곳에서 '나'는 부자연스러움을 느끼고 그곳에 동화되지 못한 채 그림자와 함께 탈출을 시도한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사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이 사라진 이곳에서 사랑은 그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을 것 같지만, 사람들은 사랑을 알고는 있되 느끼지를 못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무의식의 세계 속에 자신이 꿈꾸는 유토피아인 원더랜드를 만들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그 세계는 실제로는 하드보일드(hard boiled : 무감각한)한 원더랜드, 즉 모순적인 세계였다.  고통이 없기 때문에 행복할 것 같지만 그곳은 '경이로운' 곳이 아닌 '이상한'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매트릭스>의 설계자는 매트릭스를 고통과 악을 뺀 상태로 프로그래밍했더니 사람들이 다 죽어버렸다고 했다. 인간이란 행복해지기 위해서, 즉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진보를 추구하고 애써 노력하지만 결국 고통이란 실존의 본질이며 행복의 일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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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3 13: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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