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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탑
윌리엄 골딩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먼저 이 책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해두어야 할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소설의 흐름 중간중간에 불현듯 끼어드는 주인공의 내면독백들, 그들의 불안, 환상들로 인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어느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한참을 헤매고 겨우겨우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문득 이러한 혼란스러움이 소설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독자로서의 나'의 혼돈이며, 더 나아가 신앙인 혹은 피조물로서 신의 뜻을 알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의 혼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환상이 첨탑 건설의 가장 중요한 필연성이 되었다는 말씀이시지요?" (206쪽)
환상과 계시(신탁)는 전설과 신화 그리고 성서 속에서 영웅들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모험을 예고하고, 신의 위대한 뜻을 전달한다. 조슬린 역시 굉장한 흥분 속에서 자신이 주임신부로 있는 대성당에 우뚝 선 첨탑의 환영을 보고, 그것이 "나의 돌로 된 기도의 정확한 형상"(236쪽)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왜 "이 보잘 것 없는 종을 하느님께서 이 자리에 앉히셨는가"(239쪽)를 깨닫고 자신의 그 사업에 "선택"되었다고 믿는다.
영웅은 모험의 시련을 통해 단련되고, 예언자는 제 고향과 집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마태오 13장 57절)고 했다. 조슬린도 성당의 주요인사들과 첨탑을 올리는 인부들로부터 끝없는 반대와 조롱에 시달린다. 그러나 첨탑을 올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일은 더욱더 신의 뜻에 합당하다고, 조슬린은 생각한다.
"우리에겐 겁나고 불합리한 일이기도 하지. 그렇지만 언제부터 천주께서 당신이 선택하신 이들에게 합리적인 요구를 하셨는가?"(147쪽)
조슬린의 환영 체험과 믿음을 뒷받침 해주기라도 하듯 천사는 계속해서 그의 등을 따뜻하게 덥혀준다. 그러나 첨탑이 올라가고 세찬 바람 속에서 음울한 소리를 내며 휘청일 때, "천사는 축복이면서 또한 엄청난 피로를 안겨주"고(151쪽), 로저 메이슨과 구디가 내는 욕망의 신음 소리 앞에서 그는 "천사의 무게에 눌려 허리가 구부정"해진다(152쪽). 이제 그의 등을 따스하게 덥혀주던 천사는 육체적 통증으로 변한다. 아니 그의 곁을 늘 따라다니던 천사 역시 통증에 대한 조슬린의 환상이었다...
나는 건물 전체를 살아 있는, 기도하는 사람의 형상으로 보았었다.(237쪽)
성당의 기초가 튼튼한가를 살펴보기 위해 교차부에 파놓은 구덩이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꿈틀 거리고, 거기서는 몸을 흠칫하게 만드는 악취가 풍겨나온다. 그 위로 "불뚝, 꼿꼿이, 터질 듯, 뿜을 듯, 절정과 위용을 드러내며 새 첨탑이 치솟는 것이다." (9쪽)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형상이라기 보다는 팽골과 구디, 로저 메이슨과 그 아내, 그리고 조슬린의 뒤섞인 욕망의 분출이며, 은폐되고 지워진 죽음으로 얼룩진 형상이다.
"무너졌소?"
초점에 맞춰진 아담 신부 얼굴이 수그리며 다가와 미소했다.
"아직은요."(271쪽)
조슬린의 일그러진 환상이 빚어냈고,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장난으로 추진된 이 첨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이것은 조슬린의 환상이 진정 하느님의 계시였다는 의미일까. 모르겠다. 조슬린은 단지 신앙심이 너무 깊었을 뿐이고, 하느님께 닿고 싶었을 뿐이고, 그래서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어리석음을, 그 어린애 같은 마음을 우리가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나는 단지 그가 죽음을 앞두고 차마 내뱉지 못한 마지막 체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 죄를 짓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하느님이 계신 곳은 하느님만 아실 뿐.(2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