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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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가장 크나큰 매력은 바로 이제까지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일인 것 같다. 자신도 모르고 있던 자신의 습성, 성격, 감정, 그 변화, 행동, 번민, 혹은 환희를 마치 타인의 것처럼 경험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사랑은 나를 대상화하고, 낯설게 느끼고,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면서도 이해하려고 해보는, 다양한 담론들을 파생시킨다. 
그런데 이 신비스러운 타자화의 심화가 사랑의 파국과 동반되면 그 결과는 자못 심각하다. 그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나보다 더 사랑했던 '나'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들로 결별을 선언하면, 원래의 나는 그 신비스러움과 똑같은 크기로 이번에는 고통을 느낀다. 사랑한만큼 고통받는다고나 할까.

   책을 읽다보면, 사랑인지 연애인지 종잡을 수 없는 지난한 것들이라고, 내심 그 상처만 부각시키며 되도록 안보이는 가슴 한구석에 감춰두려고만 했던 그런 것들을 다 끄집어 내게 된다.' 낭만적 운명론'을 거쳐 '사랑이냐 자유주의냐' 사이에서 한 번 투닥거리고, 극도의 '친밀성'을 확인한 뒤에는 '낭만적인(내가 보기엔 광기어린) 테러리즘'을 저지르는데, 재밌는 건 언제나 테러리스트 자신이 제풀에 지친다는 거다. 난 이 부분에서 알랭에게 감사했다. 늘 그냥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해봐도 별 수 없는, 나로서는 '미친짓'이라고밖에 명명할 수 없었던 그 행동들을 멋지게 포장해주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 라는 낭만적 변론이 누군가를 죽음의 위협으로 몰아가기도 한다니 참 이율배반적이다.

   그런데 이 낭만적 테러리즘이 실로 무서워지는 건 테러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자폭을 감행하려한다는 거다. 이 부분에선 좀 신파적이고 심지어는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나와 동일시했던 대상이 떨어져나갔으니 삶의 의미를 잃고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그저 논리로서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런 사람들을 어리석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불행히도 그건 내가 목숨을 걸 만큼 절절한 사랑을 해보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이런 과격한 행동을 할까봐 마음을 전부 주는 걸 미연에 방지하는 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는 나 자신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고, 또 다시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죽으려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알랭은 꿋꿋하게 자아를 회복하고, 그렇게 또 다른 낭만적 운명의 대상을 찾았으니 말이다.  

   이제는 왠지 클로이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때로는 나와 동일시하고, 때로는 한없는 부러움을 느꼈던 클로이. 나라면 이렇게 섬세한 남자를 견뎌낼 수 있었을까. 클로이의 태도를 보면 사랑은 자기만족적 행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상호교감이라기 보다는 그냥 자기가 주는 것을 즐기는 것. 이상하게도 사랑만큼 give-and-take의 원리가 성립되지 않는 것도 없는 것 같다. 뭐, 그 이상한 마르크스주의 같은 이유도 있겠지만, 암튼 이건 해보면 다 알 수 있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를 악하다 할 수 없고, 배신자라 부를 수 없는 거다. 

사랑의 교훈.  모든 걸 토막내고 끊어서 단절시켜버린 과거들을 현재완료의 시점으로 끌어올리는 것. 내가 죽어버리지 않는 한 어쨌든 짝사랑이라도 하긴 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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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고의 숲
로버트 홀드스톡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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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끼리는 상호교감한다. '아발론 연대기'와 '미사고의 숲'의 경험을 통해 교감에 동참한다. 미사고의 숲 심장부에는 불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는 라본디스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아발론(성배가 숨겨져 있는 신비의 섬), 천국, 혹은 티르나노우라는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없는 원초의 세계이다. 그곳은 '인간의 영혼이 계절에 얽매여 있지 않은 장소'로 인간 세계의 시공간의 개념이 무너지고 신석기인부터 왕당파 병사에 이르기까지 전시대의 신화적 인물들이 섞여 움직인다.

기독교의 윤색을 거치지 않은 켈트 신화는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그리스나 로마 신화처럼 정제되지 않고, 기독교의 신화처럼 천상의 신화가 아닌 땅의 신화, 숲의 신화이다. 여기서 귀네스는 '카멜롯의 전설' 등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왕비 귀네비어의 이미지가 아니라 '킹 아더'에서 나타나는 녹색과 흰색의 도료로 얼굴을 가린 강인한 여전사의 이미지와 가깝다. 그녀가 대지의 딸을 상징하는 것처럼 켈트 신화는 땅과 자연으로부터 아직 인간이 덜 분리된 시대를 이야기한다. 정제되지 않은 이러한 이미지들은 수많은 매체를 통해 우리의 뇌리에 '야만 savage(英), sauvage(佛)'이라는 단어로 폄하되었다. 요즈음 켈트 신화가 부쩍 자주 거론되는 것이 지금의 문명의 자연파괴를 억제하고 공생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흐름의 일환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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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4-22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4년전 리뷰 썼던 책이네요. 무척 인상깊었죠.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부엉이 2006-04-23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녘에 읽을 땐 공포영화 뺨치게 무서운 느낌도 들더군요~^^
 
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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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의 반을 달리며 읽었다. 하루키가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달리면서, 달릴 때의 느낌을 통해 그 세상을 이해하는 것처럼. 달리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물론 하루키처럼 가벼운 조깅보다 조금 더 빠르게 달리면서는 책을 읽을 수 없다.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거나 (버스는 거의 타지 않지만) 혹은 자전거를 타면서 책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자전거란 실내에 고정되어 있는 운동기구용 자전거를 말한다. 

아직 우리의 문화는 조깅이 자연스럽지 못하기도 하고, 또 나는 달리는 것보다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하루키는 차를 타고 달리는 것은 너무 빠르고, 걷는 걷은 너무 느리기 때문에 달리는 것이 낯선 도시를 둘러보는 가장 좋은 속도라고 한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일단 달리면 너무 숨이 차고 걷는 것보다는 집중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달리기는 잡념을 없애고 싶을 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집중력이 형편없는 나는 지하철에서도 옆사람의 이야기소리가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하면 (그러니까 내가 그 대화의 내용을 이해하고, 흐름을 파악하게되면), 같은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는 정도가 모르긴 몰라도 남들보다 심하다. 그러니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은 내겐 몸을 움직이며 동시에 책을 읽는다는 것이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앉아서 책을 읽다보면 처음에는 바른 자세로 시작하지만 점점 자세가 흐트러지고, 책상 앞에서 소파로 소파에서 바닥 혹은 침대로 그러다보면 마지막엔 누워서 책을 읽게 된다. 눕기는 또 거기서 반듯이 누운 자세에서, 엎드렸다가, 옆으로 누웠다가 하는, 온 몸을 한 바퀴 돌리는 여러 자세로 변형된다. 그런데 이런 자세들은 안경알은 점점 두꺼워지고, 눈은 점점 작아보이게 만드는 원인이 되므로 절대 삼가야 한다. 그리고 장시간 꼼짝 않고 있으면 몸이 둔해지고 살도 찌고 근육도 약해진다. 그래서 한때는 집에 휴대용(?) 무중력실이 있었으면 했었다. 거기선 온갖 자세가 가능하고, 특히 누워서 책을 읽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으니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운동기구용 자전거 위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건 여러 모로 기분 좋은 일이다. 하루키가 움직이며 쓴 이 책을 '달리며 읽었다'는 것이 나름대로 색다른 의미부여를 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기한 건 가만히 앉아서 읽을 때보다 달리며 읽을 때 집중이 더 잘됐고, 왠지 더 즐거웠다는 점이다. 짧지만 깊은 몰입의 순간, 실제 비포장의 오솔길을 달리는 착각을 하기도 했고, 심지어 한번은 아주 미세한 현기증과 더불어 공중에 붕 뜬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쉽게도 이런 환각과 취기를 방해하는 건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언급이었다. 하루키는 여행지의 표정 묘사를 작품의 분위기나 등장인물로 대신한다. 예를 들어 그는 스펫체스 섬의 수수한 옷차림에 건강하고 혈색좋은 그리스인들을 '조르바계 그리스인'이라고 부른다. 운좋게도『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본 적이 있다면, 호탕하고 거칠지만 순수한 조르바를 떠올리며 하루키식 유머에 가볍게 동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운나쁘게도 트루먼 카포티의 단편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비관광철에 스펫체스섬에 들를 사람들에게 문닫은 상점에 대한 괴괴함은 아쉽고 빈약한 상상으로 남는다. 

그리고 또, 하루키는 여행지에서의 무료함을 독서로 달래는데 하루키의 여행이 무료해질수록 그의 독서 목록도 늘어난다. 그런데 그는 '심심해서 책을 읽었다'가 아니라 꼭 '누구누구의 무슨무슨 책을 읽었다'고 쓴다. 이러한 언급들은 『먼북소리』라는 에세이 전체의 방향과는 무관하므로 건너 뛰고, 이탈리아에 대한 하루키의 애정어린 짜증을 가볍게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도 그만이다. 그렇지만 나는 간선도로의 분기점 같은 그 표지(판)들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고, 그(작가)들이 누군지 작품의 내용이 어떨지 궁금했고, 그 표지를 따라 이탈을 시도했다.
그래서 하루키의 책들은 그의 다른 소설들은 물론, 서양의 고전과 현대 소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일깨워주는 책 속의 숨어있는 지도 같다. 그 지도에는 내가 가야할 지점들만이 단순하게 X자로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나보다 먼저 그 지점들에 도달했던 하루키는 내게 있어 미지의 땅인 그곳엔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다고, 그곳에서 너의 가슴을 울리는 북소리가 들려오지 않느냐고 내게 말한다. 이 여행기가 나를 그리스와 이탈리아로 떠나고 싶게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아이러니랄 수 있지만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면 소심한 나는 정말 그런 말도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에 가도될지 망설이게 된다) 나를 또다른 세계로 초대하는 안내서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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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1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엉이 2006-04-23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한번 해보시길, 일석이조랍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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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구제불능일 정도로 따분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46쪽

나는 사랑 때문에 불구가 되었다.-51쪽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사랑을 한다.-62쪽

사랑을 바라지만, 자신의 진정한 자아가 드러나면 상대가 실망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76쪽

우리 내부에 부족한 것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80쪽

우리는 서로에 대한 지식이 소유와 자유를 허용한다고 여겼다.-103쪽

웃을 수 없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들의 상대성, 사회나 관계에 내재된 모순, 욕망의 다양성과 충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109쪽

유머가 있으면 직접적으로 대립할 필요가 없었다.-110쪽

아름다움에 대한 주관적 이론은 기분 좋게도 관찰자를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어버리므로.-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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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0 1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엉이 2006-04-20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의 화자가 지극히 세심하긴 하죠, 표현문화가 아닌 풍토에서 자란 우리에겐, 더욱이 한국의 남성분들에겐 약간 동떨어진 얘기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첨탑
윌리엄 골딩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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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해두어야 할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소설의 흐름 중간중간에 불현듯 끼어드는 주인공의 내면독백들, 그들의 불안, 환상들로 인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어느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한참을 헤매고 겨우겨우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문득 이러한 혼란스러움이 소설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독자로서의 나'의 혼돈이며, 더 나아가 신앙인 혹은 피조물로서 신의 뜻을 알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의 혼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환상이 첨탑 건설의 가장 중요한 필연성이 되었다는 말씀이시지요?" (206쪽)

환상과 계시(신탁)는 전설과 신화 그리고 성서 속에서 영웅들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모험을 예고하고, 신의 위대한 뜻을 전달한다. 조슬린 역시 굉장한 흥분 속에서 자신이 주임신부로 있는 대성당에 우뚝 선 첨탑의 환영을 보고, 그것이 "나의 돌로 된 기도의 정확한 형상"(236쪽)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왜 "이 보잘 것 없는 종을 하느님께서 이 자리에 앉히셨는가"(239쪽)를 깨닫고 자신의 그 사업에 "선택"되었다고 믿는다.
영웅은 모험의 시련을 통해 단련되고, 예언자는 제 고향과 집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마태오 13장 57절)고 했다. 조슬린도 성당의 주요인사들과 첨탑을 올리는 인부들로부터 끝없는 반대와 조롱에 시달린다. 그러나 첨탑을 올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일은 더욱더 신의 뜻에 합당하다고, 조슬린은 생각한다.


"우리에겐 겁나고 불합리한 일이기도 하지. 그렇지만 언제부터 천주께서 당신이 선택하신 이들에게 합리적인 요구를 하셨는가?"(147쪽)

조슬린의 환영 체험과 믿음을 뒷받침 해주기라도 하듯 천사는 계속해서 그의 등을 따뜻하게 덥혀준다. 그러나 첨탑이 올라가고 세찬 바람 속에서 음울한 소리를 내며 휘청일 때, "천사는 축복이면서 또한 엄청난 피로를 안겨주"고(151쪽), 로저 메이슨과 구디가 내는 욕망의 신음 소리 앞에서 그는 "천사의 무게에 눌려 허리가 구부정"해진다(152쪽). 이제 그의 등을 따스하게 덥혀주던 천사는 육체적 통증으로 변한다. 아니 그의 곁을 늘 따라다니던 천사 역시 통증에 대한 조슬린의 환상이었다...


나는 건물 전체를 살아 있는, 기도하는 사람의 형상으로 보았었다.(237쪽)

성당의 기초가 튼튼한가를 살펴보기 위해 교차부에 파놓은 구덩이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꿈틀 거리고, 거기서는 몸을 흠칫하게 만드는 악취가 풍겨나온다. 그 위로 "불뚝, 꼿꼿이, 터질 듯, 뿜을 듯, 절정과 위용을 드러내며 새 첨탑이 치솟는 것이다." (9쪽)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형상이라기 보다는 팽골과 구디, 로저 메이슨과 그 아내, 그리고 조슬린의 뒤섞인 욕망의 분출이며, 은폐되고 지워진 죽음으로 얼룩진 형상이다.


"무너졌소?"
초점에 맞춰진 아담 신부 얼굴이 수그리며 다가와 미소했다.
"아직은요."(271쪽)

조슬린의 일그러진 환상이 빚어냈고,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장난으로 추진된 이 첨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이것은 조슬린의 환상이 진정 하느님의 계시였다는 의미일까. 모르겠다. 조슬린은 단지 신앙심이 너무 깊었을 뿐이고, 하느님께 닿고 싶었을 뿐이고, 그래서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어리석음을, 그 어린애 같은 마음을 우리가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나는 단지 그가 죽음을 앞두고 차마 내뱉지 못한 마지막 체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 죄를 짓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하느님이 계신 곳은 하느님만 아실 뿐.(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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