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이 책의 반을 달리며 읽었다. 하루키가 낯선 도시에 가면 반드시 달리면서, 달릴 때의 느낌을 통해 그 세상을 이해하는 것처럼. 달리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물론 하루키처럼 가벼운 조깅보다 조금 더 빠르게 달리면서는 책을 읽을 수 없다.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거나 (버스는 거의 타지 않지만) 혹은 자전거를 타면서 책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자전거란 실내에 고정되어 있는 운동기구용 자전거를 말한다. 

아직 우리의 문화는 조깅이 자연스럽지 못하기도 하고, 또 나는 달리는 것보다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하루키는 차를 타고 달리는 것은 너무 빠르고, 걷는 걷은 너무 느리기 때문에 달리는 것이 낯선 도시를 둘러보는 가장 좋은 속도라고 한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일단 달리면 너무 숨이 차고 걷는 것보다는 집중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달리기는 잡념을 없애고 싶을 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집중력이 형편없는 나는 지하철에서도 옆사람의 이야기소리가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하면 (그러니까 내가 그 대화의 내용을 이해하고, 흐름을 파악하게되면), 같은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는 정도가 모르긴 몰라도 남들보다 심하다. 그러니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은 내겐 몸을 움직이며 동시에 책을 읽는다는 것이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앉아서 책을 읽다보면 처음에는 바른 자세로 시작하지만 점점 자세가 흐트러지고, 책상 앞에서 소파로 소파에서 바닥 혹은 침대로 그러다보면 마지막엔 누워서 책을 읽게 된다. 눕기는 또 거기서 반듯이 누운 자세에서, 엎드렸다가, 옆으로 누웠다가 하는, 온 몸을 한 바퀴 돌리는 여러 자세로 변형된다. 그런데 이런 자세들은 안경알은 점점 두꺼워지고, 눈은 점점 작아보이게 만드는 원인이 되므로 절대 삼가야 한다. 그리고 장시간 꼼짝 않고 있으면 몸이 둔해지고 살도 찌고 근육도 약해진다. 그래서 한때는 집에 휴대용(?) 무중력실이 있었으면 했었다. 거기선 온갖 자세가 가능하고, 특히 누워서 책을 읽기에 안성맞춤일 것 같으니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운동기구용 자전거 위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건 여러 모로 기분 좋은 일이다. 하루키가 움직이며 쓴 이 책을 '달리며 읽었다'는 것이 나름대로 색다른 의미부여를 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기한 건 가만히 앉아서 읽을 때보다 달리며 읽을 때 집중이 더 잘됐고, 왠지 더 즐거웠다는 점이다. 짧지만 깊은 몰입의 순간, 실제 비포장의 오솔길을 달리는 착각을 하기도 했고, 심지어 한번은 아주 미세한 현기증과 더불어 공중에 붕 뜬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쉽게도 이런 환각과 취기를 방해하는 건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언급이었다. 하루키는 여행지의 표정 묘사를 작품의 분위기나 등장인물로 대신한다. 예를 들어 그는 스펫체스 섬의 수수한 옷차림에 건강하고 혈색좋은 그리스인들을 '조르바계 그리스인'이라고 부른다. 운좋게도『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본 적이 있다면, 호탕하고 거칠지만 순수한 조르바를 떠올리며 하루키식 유머에 가볍게 동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운나쁘게도 트루먼 카포티의 단편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비관광철에 스펫체스섬에 들를 사람들에게 문닫은 상점에 대한 괴괴함은 아쉽고 빈약한 상상으로 남는다. 

그리고 또, 하루키는 여행지에서의 무료함을 독서로 달래는데 하루키의 여행이 무료해질수록 그의 독서 목록도 늘어난다. 그런데 그는 '심심해서 책을 읽었다'가 아니라 꼭 '누구누구의 무슨무슨 책을 읽었다'고 쓴다. 이러한 언급들은 『먼북소리』라는 에세이 전체의 방향과는 무관하므로 건너 뛰고, 이탈리아에 대한 하루키의 애정어린 짜증을 가볍게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도 그만이다. 그렇지만 나는 간선도로의 분기점 같은 그 표지(판)들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고, 그(작가)들이 누군지 작품의 내용이 어떨지 궁금했고, 그 표지를 따라 이탈을 시도했다.
그래서 하루키의 책들은 그의 다른 소설들은 물론, 서양의 고전과 현대 소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일깨워주는 책 속의 숨어있는 지도 같다. 그 지도에는 내가 가야할 지점들만이 단순하게 X자로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나보다 먼저 그 지점들에 도달했던 하루키는 내게 있어 미지의 땅인 그곳엔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다고, 그곳에서 너의 가슴을 울리는 북소리가 들려오지 않느냐고 내게 말한다. 이 여행기가 나를 그리스와 이탈리아로 떠나고 싶게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아이러니랄 수 있지만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면 소심한 나는 정말 그런 말도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에 가도될지 망설이게 된다) 나를 또다른 세계로 초대하는 안내서임에는 틀림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6-04-21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엉이 2006-04-23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한번 해보시길, 일석이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