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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피할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 ㅣ 보림문학선 4
오카다 준 지음, 박종진 옮김, 이세 히데코 그림 / 보림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아마모리 씨가 내게도 마법을 부렸나 보다. 아무리 멀지 않다, 멀지 않다 주문을 걸어 봐도 점점 더 멀게 만 느껴지는 출퇴근길. 그런데 신기하게도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정차 역을 확인할 때마다, 분명 한 정거장 지난 것 같은데 두세 정거장 씩 거리가 줄어들어 있다. 책 읽는 재미도 재미지만, 한 번에 두세 개씩 줄어드는 정거장 수가 신기해서 연방 고개를 책에 파묻었다 들었다 했다.
출근 길 먼 사람이 비단 너뿐이겠냐고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요즘 들어 적잖이 스트레스가 쌓이던 참이었다. 재밌는 책들은 아마모리 씨가 아니어도 가끔씩 내게 마법을 부려 주지만, 어디 그런 책을 만나는 게 그리 쉬운가. 하지만 책을 너무 금방 읽어 버려서, ‘해 질 때까지만’이라던 이치로의 모험처럼 내게 걸린 마법도 너무 아쉽게 금방 끝나 버렸다.
아쉬운 만큼 간절한 마음도 더 커지는 법인가 보다. 아마모리 씨는 그렇게 아이들 마음속에, 내 마음속에 남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아마모리 씨는 뭔가 대단하고 큰 소원이 아닌, 우리들의 소소한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작은 욕망들을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판타지로 풀어내 주었나 보다.
나이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야구 실력도 다른 아이들은 그렇게 아마모리 씨를 매개로 비밀을 터놓고 서로를 알아간다. “아이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하는 아이의 고백이 참 예쁘고 감동적이다. 아마모리 씨의 마법은 지금 미끄럼틀 아래서 비를 피하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아이들이 마법을 부릴 차례다.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지만, 정작 자신은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는 아마모리 씨에게, 그리고 무료한 일상에 젖어 그냥저냥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