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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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 챕터씩 천천히 읽었다. 중간중간 들어간 농담들이 내내 좀 아재개그처럼 썰렁하고 싱겁다 생각했는데, 에필로그를 읽다 빵 터졌다. 아무래도 저자의 끈질긴 개그코드에 세뇌가 된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하고 40대가 된 마당에 무슨 공부를 해야 할까 늘 마음속으로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객관식 사지선다의 정답 같은 명확한 답변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방향성을 얻었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대로만 해도 늙어서 꼰대 소리 들을 확률은 좀 낮아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최근에 생긴 한 가지 두려움은, 내가 지금 우리 부모님과의 사이에서 느끼는 세대 간 소통의 장벽 같은 것을 우리 아이들이 나에게서 느끼면 어떡하나 하는 것이다. 부모님에게 나는 착한 딸이니까, 아니 착한 딸이어야 하니까 조금 의견이 달라도 그냥 ‘네네’ 하며 비위를 맞춰드리는 게 일상이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애초에 다른 의견 제시 자체를 부모님이 용납하지 못하게 되신 것 같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생각의 근육’이 굳어버려서 다른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릴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고나 할까. 
그런 면에서 내게 공부는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것뿐 아니라 항상 젊음의 상태로 유연하게 유지하는 행위이며,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공부란 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그렇다는 건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의 생각이 아니라 두 개의 생각, 즉 복수의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새로운 대상을 경험할 수 있는 여행이나 독서가 창의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자기 관심 영역에서 경험이 일정 정도 쌓이고 나면, 경험 대상을 새로운 영역으로 확대해야 한다. [...] 한국을 공부하는 사람도 동유럽을 알아야 하고, 현대를 공부하는 사람도 중세를 알아야 하고,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시를 읽을 필요가 있다. 관습이라는 감옥에 갇히기 싫다면.
여러 경험과 생각이 쌓여서 하나의 성채를 이루고 나면, 그 성 내에는 일정한 온실효과가 발생하여, 이런저런 입체적인 잡생각이 추가로 생겨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견 별로 관계없어 보이는 생각과 경험들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용기라는 덕목이 필요하다. - P133

물론 갑자기 큰 용기를 내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그래서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용기를 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생각이 혹은 자신의 글이 원래 계획했던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을 때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글이 진짜 창의적이 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뭔가 엉뚱한 길로 간다는 것은 위험하지만 멋진 일이다. - P134

여유가 필요하다는 말이 곧 자신을 편한 상태에 두라는 뜻은 아니다. 어렵게 손에 쥔 여유를 가지고 과감하게 험지로 떠나야 한다. 너무 안온한 환경에 자신을 방치해두면, 새로운 생각을 할 역량 자체가 퇴화해버릴 것이다 - P137

미국의 작가 수전 손택은 말했다. "독서는 재게 유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 세상이 못 견디겠으면 책을 들고 쪼그려 눕죠. 그건 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에요." - P139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보르헤스는 말했다. "가장 행복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이에요. 아, 책 읽기보다 훨씬 더 좋은 게 있어요.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인데, 이미 읽었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 P142

그때 이후로 책에 대한 물욕을 상당히 버렸다. - P157

책을 사야 한다는 것은 그것을 간수할 공간까지 사야 한다는 의미다. - P160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향해 자신의 인생을 던지는 위엄이 기획자에게도 있다. - P196

취향을 넘어선 자기합리화가 일정 정도 타당성을 얻어, 마침내 상대를 설득하고자 할 때 비로소 견해라는 것이 확립되기 시작한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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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피스트
헬레네 플루드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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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실종. 그리고 거짓말.

이 책은 이 두 개의 사건에서 시작한다. 

이른 아침, 잠결에 인사를 하고 나간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두절된다. 

그리고 그는,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않다.  


"나는 언제나 모순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p.13)


직업이 테라피스트(심리분석가)인 주인공 사라는 그때부터 기억의 파편들과 여러 정황들을 끌어모아 이 모순적 상황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해보려 애쓴다. 결국 사라는 남편의 '실종'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인정하고 경찰에 신고하지만, "실종자 대다수는 몇 시간 뒤에 나타난다"는 무심한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다. 모든 게 꿈이기를 바라지만 남편은 없다. "이 집에서 비명을 지르는 부재. 시구르." 


"뭐, 선생님은 대화할 친구가 있어요?... 아니, 친구가 있기는 해요?"(p.29)


사라의 미성년 환자인 베라가 "푹 찌르듯 심술궂고 신랄하게" 말한 것처럼, 사라는 외롭다. 예전에는 서로 무척 가까웠고, 무슨 얘기든 할 수 있었던 친구들과는 이제 연락이 잘 닿지 않는다. 지금 같은 때에 친구가 필요하지만, 사라는 아무에게도 중요한 얘기를 털어놓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이야 어떻든 일단 속에 있는 것을 쏟아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라는 망설이고, 상황을 재고, 자신에겐 그럴 사람이 없고 사람들은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먼저 마음을 닫아버린다. 소통하는 방법을 잃은 사람들, 소통을 닫아버린 사람들을 치유하는 테라피스트가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지는 설정의 아이러니는 극도의 긴장감을 몰고 온다.    

가족도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엄마는 사라가 어렸을 때 알츠하이머로 세상을 떠났고, 아빠란 사람은 피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있는, "매우 가까워지거나 비밀을 공유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다. 시어머니는 "놀랍도록 합리적이고, 쉽게 흥분하고 예민한 사람들을 마뜩잖아" 한다.  그나마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준 언니가 있지만, 언니에겐 방해해서는 안 될 가족이 있다.

비단 사라만 이런 외로움을 느낄까? 문제가 없을 때는 '혼자'라는 것이 큰 걸림돌이 되지 않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나는 '혼자'여도 괜찮을까? 


"나는 중요한 요소를 하나 빠트렸던 것이다. 인적 요소를. 나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동료들의 이름에 줄을 쓱쓱 그으며 지우던 그때의 나는 내가 엄청나게 외로워할 것임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소극적으로 변하게 되리라는 것도. 1년 전에 누군가가, 광고를 해서 환자를 더 끌어오는 일을 내가 얼마나 어려워하게 될지- 그 일을 얼마나 꺼리게 될지-말해줬다면 나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p.11)


타향에 7년을 내려와 살면서 새로 사귄 친구가 없다시피 한 나는 저 문장들에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이들과 씨름하며 일할 시간도 겨우 내는 판에, 친구 사귈 시간은 사치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도 가끔씩 위기가 찾아왔다. 대화 상대라고는 평균 연령이 10세인 아이들과, 그저 얘기를 나누려던 것뿐인데 항상 불평불만을 늘어놓게 되는 남편이 전부인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한계가 자주 그리고 깊이 찾아왔다. 어쩌다 가끔 만나는 사람들하고는 뭔가 맞지 않는 느낌이 들어 난생처음 '차단'이란 걸 해보기도 하고, 속이야기를 나누는 친구와도 거의 텍스트 메시지로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의사전달이 명확히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피상적이고, 임시적인 관계가 될 것임을 전제한 만남들은 '빈 껍데기'뿐이었다. 


이런 공감 포인트 때문인지, 이 책이 심리 스릴러임에도 나는 여기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과 해결 과정보다는,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에 더 깊이 몰입했다. 작가는 "인간 심리와 관계의 어두운 이면을 조명할 수 있기" 때문에 처녀작으로 스릴러라는 장르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믿고 의지하던 사람, 모든 걸 다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 사라지고, 더는 왜 그랬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그 사람의 거짓말이 잔인한 현실을 드러낸다면, 우리 역시 사라처럼 내면의 온갖 어두운 상처들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또한 작가는 "인간이 가진 악의 속성, 악의 심리학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 잠재된 악의 속성은 우리가 외롭고 가장 취약한 순간에 고개를 드는 게 아닐까. 


모르겠다. 나는 작가가 열어젖힌 어두운 이면에서 소위 말하는 무시무시한 악한이 아니라, 여전히 '어둠 속에 앉아' 외로움에 떨고 있는 한 소녀를 본 것 같다. 책을 덮고 나니, 악의 생리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자의적으로 해석한 선의에서 배양되는 게 아닐까 하는 비릿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막내는 '친구와 사이 좋게 지내자'라는 규칙(?)보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을  더 먼저 배운 것 같다. 문득 앞으로 나의, 우리 아이들의 인간적 거리는 얼마나 더 멀어질 것이며, 그 외로움들의 무게를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암울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구야, 우리는 정기적으로 [우리와 정신적 연령이 맞는] 성인들과 대화를 나눠야 해"라고 말해주는 오랜 친구의 한마디에서 기운을 차리게 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육지에서는 물난리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고, 내가 머무는 제주는 딴 나라 일이라는 양 이재민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 단 이틀이었지만, 이 책이 주는 외로움의 서늘한 한기 때문에 잠깐은 더위를 잊었다. 더불어 부록으로 딸려 온 만다라를 두 딸과 함께 정성껏 채운 시간도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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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유혹 - 상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2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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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본질에서 심오하게 인간적인 그 부분이 우리로 하여금 마치 우리 자신처럼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그의 수난을 추구하게끔 도와준다. 만일 마음속에 이런 따스하고 인간적인 요소를 지니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는 그런 부드러움과 안도감으로 우리의 마음에 이르지 못했을 터이고, 절대로 우리의 삶을 위한 귀감이 되지 못했으리라.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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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24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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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상해? 자네, 그런 말일랑 아예 하지도 말게. 이 세상에는 죄 짓는 것 외에는 속상할 일은 하나도 없어. 영혼보다 더 소중한 건 없으니까."(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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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자가 보여주는 새 이야기, 인간 이야기
서정기 지음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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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조교로 일할 때 인연을 맺은 선생님이 쓰신 책이다. 우리나라와 세계 곳곳에서 만난 아름다운 새들이 선생님의 정감 어린 글과 함께 실려 있다. 

학과 조교와 TA를 합치면 꽤 오랜 세월 선생님을 뵈었는데, 그 오랜 시간보다 이 한 권의 책으로 선생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혜화동에서 파주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한 번도 연락을 드리지 못해서 근황을 알지 못했는데(얼마전에 은퇴하셨다는 것만 알았다), 이렇게 멋진 제2의 삶의 살고 계실 줄이야. 새로운 시작에 망설임이 없고 열정을 쏟아붓는 모습은 저 이국의 신비로운 극락조보다 더 감동적이고 존경스러웠다.

이제껏 도감에 실린 사진들을 볼 때 아무 감정이 없었는데, 이 책의 사진들이 어떤 지난한 기다림과 인내를 거쳐 선생님의 카메라에 담겼는지 그 과정을 알고 나니 사진 한 장 한 장이 소중하고 페이지를 넘기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이제 도감을 대할 때는 항상 그 사진을 찍은 이의 노고를 기억하고 넘어가게 될 것 같다. 

평소 까만 글자들만 잔뜩인 책을 읽을 때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우리 막내도 나와 함께 이 책을 두 번이나 읽었다. "엄마는 무슨 새가 제일 좋아?" "이건 암컷이야 수컷이야?" "(동물의 세계에서는 수컷이 암컷보다 아름답다고 설명해주자)난 암컷이 수컷보다 예뻤으면 좋겠어." "이 새는 어디에 살아?" 귀여운 뱁새처럼 어찌나 조잘대는지, 막내 손이 안 닿는 높은 칸에 책을 숨겨놓기도 했다. 

언젠가 탐조하는 사람들에 관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이며 저자는 도무지 기억이 안 나는데, 무슨 탐조 대회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다. 누가 어떤 새를 얼마나 많이 보는지 내기를 하는 것이어서, 그들간의 경쟁이 무척 치열하고 모인 사람들 간에 본 새의 수와 종류를 놓고 온갖 실랑이가 벌어지는 게 탐조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좀 이해되지 않는 면도 있었다. 거기서 누군가 희귀한 새를 봤다는 얘기가 돌면 모두들 우르르 카메라를 들고 뛰는데, 선생님도 그러셨을 것을 생각하니 살짝 웃음이 나기도 했다. 반면 낯선 땅에서 벌레에 물려 고생하셨다는 대목에서는 안쓰럽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탁란 이야기도 나오는데, 여기서 언급하신 다큐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도 EBS에서 뻐꾸기가 탁란하는 방송을 본 기억이 있다. 남의 둥지에 알을 놓는 것도 어이없는 참이었는데, 글쎄 그 알에서 깬 놈이 원래 주인의 알이나 새끼를 둥지 바깥으로 밀어버리까지 했다. 뭘 알고 하는 짓이 아니라 한들 그 잔인함이 잘 용서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뭘 알고도 이보다 더한 이기적인 생존 본능을 다른 종에게, 같은 인간에게 망설임 없이 휘두르고 있지 않은가. 뻐꾸기 욕할 일이 아니었다. 새들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무분별하게 개발하는 것이야말로! 난개발로 여기저기 파헤쳐지고 있는 제주도, 예외는 아니다. 정말 슬픈 일이다. 자연을 조심스럽게 대할 줄 아는 탐조처럼,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는 애틋한 마음과 예의바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세상에 참새, 까치, 비둘기만 있는 줄 알았던 무지렁이가 이 책을 통해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지 눈호강을 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열심히 새를 기다리고 있을 선생님이 늘 건강하시기를 진심을 담아 기도하며,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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