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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피스트
헬레네 플루드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0년 7월
평점 :
남편의 실종. 그리고 거짓말.
이 책은 이 두 개의 사건에서 시작한다.
이른 아침, 잠결에 인사를 하고 나간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두절된다.
그리고 그는,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않다.
"나는 언제나 모순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p.13)
직업이 테라피스트(심리분석가)인 주인공 사라는 그때부터 기억의 파편들과 여러 정황들을 끌어모아 이 모순적 상황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해보려 애쓴다. 결국 사라는 남편의 '실종'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인정하고 경찰에 신고하지만, "실종자 대다수는 몇 시간 뒤에 나타난다"는 무심한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다. 모든 게 꿈이기를 바라지만 남편은 없다. "이 집에서 비명을 지르는 부재. 시구르."
"뭐, 선생님은 대화할 친구가 있어요?... 아니, 친구가 있기는 해요?"(p.29)
사라의 미성년 환자인 베라가 "푹 찌르듯 심술궂고 신랄하게" 말한 것처럼, 사라는 외롭다. 예전에는 서로 무척 가까웠고, 무슨 얘기든 할 수 있었던 친구들과는 이제 연락이 잘 닿지 않는다. 지금 같은 때에 친구가 필요하지만, 사라는 아무에게도 중요한 얘기를 털어놓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이야 어떻든 일단 속에 있는 것을 쏟아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라는 망설이고, 상황을 재고, 자신에겐 그럴 사람이 없고 사람들은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먼저 마음을 닫아버린다. 소통하는 방법을 잃은 사람들, 소통을 닫아버린 사람들을 치유하는 테라피스트가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지는 설정의 아이러니는 극도의 긴장감을 몰고 온다.
가족도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엄마는 사라가 어렸을 때 알츠하이머로 세상을 떠났고, 아빠란 사람은 피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있는, "매우 가까워지거나 비밀을 공유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다. 시어머니는 "놀랍도록 합리적이고, 쉽게 흥분하고 예민한 사람들을 마뜩잖아" 한다. 그나마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준 언니가 있지만, 언니에겐 방해해서는 안 될 가족이 있다.
비단 사라만 이런 외로움을 느낄까? 문제가 없을 때는 '혼자'라는 것이 큰 걸림돌이 되지 않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나는 '혼자'여도 괜찮을까?
"나는 중요한 요소를 하나 빠트렸던 것이다. 인적 요소를. 나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동료들의 이름에 줄을 쓱쓱 그으며 지우던 그때의 나는 내가 엄청나게 외로워할 것임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소극적으로 변하게 되리라는 것도. 1년 전에 누군가가, 광고를 해서 환자를 더 끌어오는 일을 내가 얼마나 어려워하게 될지- 그 일을 얼마나 꺼리게 될지-말해줬다면 나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p.11)
타향에 7년을 내려와 살면서 새로 사귄 친구가 없다시피 한 나는 저 문장들에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이들과 씨름하며 일할 시간도 겨우 내는 판에, 친구 사귈 시간은 사치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도 가끔씩 위기가 찾아왔다. 대화 상대라고는 평균 연령이 10세인 아이들과, 그저 얘기를 나누려던 것뿐인데 항상 불평불만을 늘어놓게 되는 남편이 전부인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한계가 자주 그리고 깊이 찾아왔다. 어쩌다 가끔 만나는 사람들하고는 뭔가 맞지 않는 느낌이 들어 난생처음 '차단'이란 걸 해보기도 하고, 속이야기를 나누는 친구와도 거의 텍스트 메시지로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의사전달이 명확히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피상적이고, 임시적인 관계가 될 것임을 전제한 만남들은 '빈 껍데기'뿐이었다.
이런 공감 포인트 때문인지, 이 책이 심리 스릴러임에도 나는 여기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과 해결 과정보다는,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에 더 깊이 몰입했다. 작가는 "인간 심리와 관계의 어두운 이면을 조명할 수 있기" 때문에 처녀작으로 스릴러라는 장르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믿고 의지하던 사람, 모든 걸 다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 사라지고, 더는 왜 그랬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그 사람의 거짓말이 잔인한 현실을 드러낸다면, 우리 역시 사라처럼 내면의 온갖 어두운 상처들을 끄집어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또한 작가는 "인간이 가진 악의 속성, 악의 심리학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 잠재된 악의 속성은 우리가 외롭고 가장 취약한 순간에 고개를 드는 게 아닐까.
모르겠다. 나는 작가가 열어젖힌 어두운 이면에서 소위 말하는 무시무시한 악한이 아니라, 여전히 '어둠 속에 앉아' 외로움에 떨고 있는 한 소녀를 본 것 같다. 책을 덮고 나니, 악의 생리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자의적으로 해석한 선의에서 배양되는 게 아닐까 하는 비릿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막내는 '친구와 사이 좋게 지내자'라는 규칙(?)보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을 더 먼저 배운 것 같다. 문득 앞으로 나의, 우리 아이들의 인간적 거리는 얼마나 더 멀어질 것이며, 그 외로움들의 무게를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암울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구야, 우리는 정기적으로 [우리와 정신적 연령이 맞는] 성인들과 대화를 나눠야 해"라고 말해주는 오랜 친구의 한마디에서 기운을 차리게 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육지에서는 물난리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고, 내가 머무는 제주는 딴 나라 일이라는 양 이재민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 단 이틀이었지만, 이 책이 주는 외로움의 서늘한 한기 때문에 잠깐은 더위를 잊었다. 더불어 부록으로 딸려 온 만다라를 두 딸과 함께 정성껏 채운 시간도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