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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텝파더 스텝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1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출판사에 입사에서 처음 일주일 간은 되도 않는 교정실력이지만 하루 종일 원고 보는 일이 즐겁기만 했다. 책의 꼴은 갖추지 못했지만 어쨌든 글을 읽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 초보 편집자에게 문제가 생겼다. 꿀맛 같던 지하철 독서시간이 '오늘은 너무 열심히 일했어', 혹은 '이렇게 글자만 보다간 눈이 나빠질 거야, 좀 쉬어줘야 해' 등등의 핑계로 멍하니 눈을 감고 있는 버려진 시간에 침식당한 것이다.
그렇게 25일 여간 읽은 책이라곤 애거서 크리스티의 <끝없는 밤>과 그리고... 애석하게도 없다. 일과 취미가 뒤섞여버린 생활의 폐단이랄 수 있다. 어쨌든 좋은 책을 만들려면 많은 책을 접하는 수밖에 없을텐데, 이러다간 안되겠다 싶어 어쨌든 읽고 결과물을 토해내야 하는 강제적 수단을 강구했다. 그리고 운좋게 서평단에 당첨이 되었다. 그것도 다시금 책에 대한 재미와 열망을 풀가동시켜주는.
미야베 미유키는 책 만드는 어떤 분 블로그에서 슬쩍 이름을 들어봤을 뿐인데, 처음 접해 본 이 책 때문에 다른 작품도 궁금해지는 매력있는 작가다. 물론 작가의 인격적 측면은 따로 생각하더라도, 어쨌든 작품에 대해서만은 좋아하고 싶다.
이 책은 미스테리와 유머, 교훈과 감동을 한꺼번에 담고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다. 외국인들도 우리 소설을 읽으면, 작가는 달라도 분명 한국적 공통분모를 감지할 것이다. 일본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니라 속단하긴 어렵지만 하루키나 온다 리쿠 등과 비교해서 분명 공통적인 어떤 코드를 읽을 수 있다. 편부 편모 가정, 혹은 좀 일상적이지 않은 이유로 부모가 둘 다 부재하는 뒤틀린 가족구조, 그런 상황들을 어른스럽게 받아들이는 조숙하고 기묘한 아이들,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들, 미신에 대한 숭배 등등.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무풍지대, 진공 상태, 무중력 상태에서 느낄 수 있는, 뭔가 공기의 흐름과 행동이 일상에서 뚝 떨어져나온 듯한 먹먹함 같은 게 느껴진다. 예를 들면 쌍둥이 형제 사토시와 타다시(그런데 난 처음에 무작정 이 애들이 여자애들일 거라고 생각해 버렸다. 그래서 나중에 이 애들이 남자애들이란 사실을 알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뭐 대강 남자 이름이 '-시'로 끝나고 여자 이름이 '-코'로 끝난다는 사실을 주워들어 알고 있긴 했지만 암튼 일본 소설은 이런 점에서 내겐 좀 낯설다고 할 수 있다.)는 한쪽은 집안일을 보통의 주부들보다 깔끔하게 처리하고, 타다시는 요리에 있어서 그렇다. 일본의 이 또래 아이들이 정말 이런 능력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뭔가 애초부터 완벽하게 갖춰져있는 이런 설정들이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실수나 사고 역시 완벽하다고나 할까.
그리고 오늘 버스를 타고 오면서, 마구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스포츠 신문을 읽던 한 여고생을 보고 여자들은 신문을 잘 접지 못한다는 소설 속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 역시 지하철에서 (감히 버스에서 신문을 읽을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한다) 신문을 접다가 결국 부피를 몇배로 늘려 뭉쳐버린 경험이 있다. 그래서 생각컨데, 펼친 신문의 너비가 여자들 팔 길이에 비해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했다. 신문을 넓게 쫙 펼쳐야 잘 접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문도 남녀차별입네 뭐네 혼자 구시렁대다가, 내가 요즘 지하철에서 보는 타블로이드 무가지도 잘 접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끔 나와 비슷한 여성들을 목격하는 바, 그게 무슨 신체 구조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결국 정말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우울하고 진지한 거 보다는 유쾌하면서 진지한 걸 좋아하는 편인데, 기발한 아이디어와 설정이 재밌는 소설이다. 아울러 지루한 출퇴근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놀라운 마법도 부린다, 이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