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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파니에서 아침을
트루먼 카포티 지음, 공경희 옮김 / 아침나라(둥지)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영화를 그래도 한 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봤다고 생각했는데, 뜨문뜨문 떠오르는 몇 장면은 줄거리를 엮는데는 별 소용이 없다. 우선 영화 포스터의 검은 드레스와 검은 안경을 낀 할리 골라이틀리(오드리 햅번)가 기억나고, 가짜인게 분명한 돌출 앞니의 일본인 유니오시가 할리를 내려다보며 버럭버럭 소리지르던 장면, 그리고 할리와, 그녀가 프레드 혹은 버스터라고 부르던 작가 '나'(조지 페퍼드)가 빗속에서 고양이를 찾아 헤매던 마지막 장면이 기억난다. 헨리 맨시니의 Moon River는 말할 것도 없고. 영화와 원작의 내용이 다소 다른 면도 있고, 좋지 않은 기억력이 오히려 도움이 되어서 이번에는 영화와 좀 덜 섞인 소설만의 재미를 즐길 수 있었다.
사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이 있었다는 것은 최근에 하루키의 『먼북소리』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아니 카포티를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거다. 당시에는 영화와 별반 다를 게 없겠지 싶어 당장 읽고픈 마음은 생기지 않았는데, 서점에 갔다가 보고 '인연을 맺게 되었다'. 몇달 전 일들을 돌이켜보니, <카포티>가 2006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국내에 영화의 배경 소설인 『인 콜드 블러드』가 출간됐다. 이것들이 내게 0순위의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나를 스쳐가는 이 소식들에 나는 한쪽 귀를 열어두고 있었고, 이렇게 해서 내게 있어서 카포티의 처녀작은『티파니에서 아침을』이 되었다. 책을 읽게되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일과 같다고 본다. 어떤 상황과 조건이 맞고,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분명 동기가 있으며 잘 생각해 보면 그 바탕엔 분명 운명이나 인연이 존재한다.
제목만으로는 굉장히 낭만적이고 발랄한 줄거리가 예상되지만 어쩌면 그런 섣부른 예상 때문에 책을 덮었을 때 더 진한 아이러니와 슬픔이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로 본다면 할리가 티파니의 쇼윈도에서 아침을 먹던 모습이 제일 쓸쓸한 장면으로 기억된다. 쇼핑하기엔 너무 이른 아침이라 휑한 거리에서 조깅복이 아닌 이브닝 드레스 차림으로 빵과 커피를 들고 티파니의 보석을 바라보던 할리. 그녀가 티파니의 찬란한 보석들에 열광하는 속물스런 여자라고?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그녀는 마흔 살 이전의 여자에겐 다이아몬드가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하는, 때론 분별도 있는 여자이다. 적어도 마흔 살 이전의 할리에게 보석은 내적 치장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녀는 두렵고 공허하고,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아득한 나날'이 계속될 때 티파니에 간다. 거기서 그녀는 티파니의 당당한 분위기로 헛헛한 마음을 채운다. 나는 이러한 그녀를 환상을 좇고 허영심에 찬 여자라고 비난할 수 없다. 티파니는 아무데도 정착할 수 없는 - 할리의 아파트엔 가구도 없고, 이제 막 이사를 온 건지 아니면 곧 떠날 것인지 알 수 없는 가방과 짐들이 놓여있으며, 문패엔 항상 '여행중'이라는 문구가 써 있다 - 그녀가 언젠가 삶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안전함을 느낄 집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그녀 자신과 우리에게 암시하기 때문이다. 할리의 삶에 대한 불안감은 '내일 어디에 살지 어떻게 알겠냐'며 명함에 새겨넣은 '여행중'이라는 문구로 요약되는데, 이것이 안이함이나 포기 혹은 막연한 방랑벽 같은 걸 뜻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건 살고 싶다는 강한 애착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만큼 사랑을 베풀수 있기를 바라는 따뜻한 애착이다. 사실 앞에서 티파니 쇼윈도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쓸쓸해보였다고 했지만, 검은 선글라스에 가려진 그녀의 두 눈이 어떤 빛을 띨지는 아무도 모른다.
카포티는 할리 골라이틀리를 사회적 지탄을 받을 수 있는 소위 고급 창녀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깨끗하고 순수한 사람은 그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것은 사회적 통념상의 도덕성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이건 오히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 관한 문제이다. 그녀의 삶은 기괴하고 불운한 운명으로 가득찼지만, 자기 마음을 들여다볼 줄 모르고 사는 우리는 어쩌면 그보다 더 불행한게 아닐까..
"난 그날의 즐거움에 도움이 된다면 보석이라도 훔치겠어요. 25센트짜리 동전이라도 훔칠 거예요. 내 자신에게 정직한 걸 말하는 거예요. 겁쟁이, 허풍쟁이, 감정 이상자, 창녀만 아니면 뭐든 되겠어요. 정직하지 않은 심장을 갖느니 암에 걸리겠어요. 좋은 예는 아니네요. 그냥 현실적으로 생각해봐요. 암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만, 정직하지 않은 마음도 문제이긴 마찬가지죠." (13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