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독자가 될게요 - 혼란을 끌어안는 쓰기에 대하여
정세랑 지음 / 마음산책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의독자가될게요 #정세랑 #마음산책

 



한 권의 책을 쓰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꾸준히 써야 하고, 결과물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 조금씩 쓰는 습관이 필요하다. 작은 메모들이 쌓여 커다란 산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진리다. 메모장이 모여 산을 이룬 장면을 생각하니, 유명 관광지에 있던 것들이 생각났다. 그저 예술작품으로 바라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작가들은 글쓰기라는 숙제에 대하여 고민하는 듯하다. 작가의 글쓰기 방식은 당연히 궁금하다. 하지만 미래의 창작자가 궁금해하는 글쓰기는 좀 더 다를 듯도 하다. 주로 언제 써야 하는지, 어떤 주제를 설정해야 하는지 세부적인 사항이 궁금할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독자에서, 좀 더 나아가 자신의 글을 써보라고. 툭 던지듯 말한다. 글을 쓰고 싶어도 망설이고 있는 이들에게 건네는 선물 같은 책이랄까. 하물며 독자들에게 건네는 응원 같은 책이라고 해도 좋겠다.



 

창작은 그 능력이 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있겠지만, 창작자는 신이 내려주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여겼다. 독자와 달리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고, 인물에 대하여 좀 더 깊이 구상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가의 글을 읽다 보니 누구라도 노력하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미래의 창작자들에게 할 수 있다는 힘을 불어넣어 준다.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소설이 좋다. 작가가 그리는 세계관 속에서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배운다. 작가란 상상의 세계가 남다른 존재다. ‘당신은 어떤 종류의 창작자인가를 묻는 편에서,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는지, 공감을 이끌어 내기 위해 쓰는지, 들리지 않던 새로운 목소리를 담고 싶은지를 묻는다. 공감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어떨 때는 익숙한 주제보다 새로운 시각을 주는 작품이 좋다. 생각할 거리, 미래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게 좋다는 뜻이다.







 

다른 장르보다 소설이 더 좋은 나는 꽤 많은 작품을 찾아 읽는다. 전작주의자 같은 행동을 보일 때도 있다. 나는 책을 쓰는 사람이 아닌 읽는 사람, 즉 독자라는 신분이 좋다. 변화 없는 일상에서 하나의 선물처럼, 마치 여행하듯 타인의 삶을 훔쳐본다. 쓰는 자의 고단함을 알기에 독자로 머무는 것에 만족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인물에 대하여 다양한 질문을 건네야 한다.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를 주어야 하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인물로 만들어야 한다. 몇 명 되지 않은 인물들이면 단조로울 수 있으니 여러 명의 주변 사람들을 배치하여 주인공의 마음을 흔들고 헤집어야 한다. 괴로운 상황을 즐길 수 있으며, 나라면 이렇게 행동하겠다는, 어쭙잖은 충고 같은 것도 할 수 있으리라.

 



표절에 대한 것도 미리 파악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작품이 출간되면 그 내용을 살펴본다. 읽다 보면 비슷한 주제와 설정을 만나곤 하는데 자칫 표절로 이어질 수 있다. 놀랍지 않은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것 자체가 놀랄 일이다. 발 빠른 자가 먼저 완성한 쪽이 진정한 주인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늦은 자는 고이 간직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이러한 상황을 우리 같은 꿈을 꿨나 봐요.’라고 말한다.



 

작가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하다.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작가와 미래의 어느 세계에 있는 듯 상상력의 세계를 표현하는 작가들이 있다. 예전의 나는 ‘SF소설은 나랑 안 맞아’, 이렇게 생각했었다. 내 마음이 열리지 않았던 거였다.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이라 미래의 나를 상상하지 못하겠다고만 여겼다. 지금은 어떤가.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든, 현실적인 미래든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 그걸 몰랐다.



 

오늘의 볼품없이 짧은 메모가 훗날 작품의 기둥과 보가 될 수도 있다. 지금 쓰는 작품과 전혀 상관없는 메모라도 무방하다. 메모의 무작위성이야말로 메모의 힘이다. 번뜩 떠오르는 이미지, 아직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인물의 대사, 전개를 모르는 사건 등 뭐라도 좋다. (193페이지)

 



작은 메모 하나 허투루 버려서는 안 되겠다. A4 한 장을 채우는 게 힘들뿐더러, 글 한 줄 쓰기가 어려울 때도 있다. 작은 메모 하나가 한 장의 글을 쓸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는 걸 깨달았다. 때로는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지 못해도, 꾸준히 쓰는 것만큼 좋은 습관도 없다는 걸 알려준 작품이었다.

 


 

#당신의독자가될게요 #정세랑 #마음산책 #산문 #한국문학 #한국에세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스커레이드 라이프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스커레이드라이프 #히가시노게이고 #현대문학


 

히가시노 게이고의 문학이야말로 별다른 선택을 하지 않아도 즐거움을 준다. 마치 찍어내듯 작품을 내는 것 같은데도 때로는 감동을, 때로는 재미를 선사한다. 출간하는 작품마다 추리소설 팬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닛타 고스케가 나오는 매스커레이드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 매스커레이드 라이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닛타 고스케는 이번 작품에서 경찰을 그만두고 호텔 리어로 변신했다. 매스커레이드 게임에서 도움을 받았던 나오미와 함께 활약을 이어간다.

 


호텔 코르테시아에 경시청의 아즈사 경감이 찾아오며 새로운 사건이 시작된다. 규에이사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일본 추리소설 신인상수상작 선정을 위한 심사가 이 호텔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수상 후보자인 작가가 살인 용의자이며 그를 중요 참고인으로 연행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경찰 출신인 닛타 고스케가 보안과장으로 있으므로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추리소설 신인상 후보자인 살인 용의자만 있으면 재미가 없다. 추리소설이란 다양한 인물의 군상과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 줄 모르는 인물의 등장이 매력 아닐까. 하필 그때 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아버지가 닛타가 근무하는 호텔에 등장한다. 30년 전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이 한데 어우러져 진행되는 방식이다.


 

호텔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호텔리어는 가면을 쓴 이들을 존중하고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신인 문학상 후보자가 살인 용의자다. 살인을 위한 치밀한 계략이 추리소설에 그대로 나타나 있는 형식이라 짜릿함과 두려움을 안겨주었다는 게 옳은 말일 것이다. 또한 문학상을 만든 출판사의 행태에 대하여도 말한다. 수상작 발표와 동시에 출간해야 많은 사람이 책을 읽을 것이고, 그게 판매 부수로 연결된다. 하지만 유력한 수상 후보자가 살인 용의자라면 출판사는 그 부담을 떠안을 수 없다.

 





그 어떤 작품보다 매력적인 후보작이지만, 그가 살인범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부담을 안고 있는 건 출판사뿐만 아니라 문학상 수상 후보를 가려야 하는 심사위원도 마찬가지다. 유력 후보가 중요 참고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위원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부담감에 공감하게 되었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술술 읽힌다. 소설 속 액자소설, 즉 신인상 후보작인 남은 목숨의 내용도 파격적이다. 시한부를 선고받은 연인이 우연히 살인을 저지르고 느꼈던 희열을 다시 안겨주기 위해 사냥감을 찾기 시작했다는 내용이다. 문득 욘 린드크비스트의 소설 렛미인이 떠올랐다. 피를 필요로 하는 소녀를 위해 사람을 숲으로 데려가 거꾸로 매달았던 한 남자의 순애보 말이다. 번역자도 말했지만, 이와 별도로 남은 목숨도 소설로 나온다면 상당히 짜릿할 것 같다. 다섯 가지의 살인, 다섯 가지의 트릭을 사용한 작품이라니. 기대되지 않은가 말이다.

 


가면으로 지켜온 인생 말입니다. 호텔을 방문하는 고객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호텔리어는 그 가면을 존중하고 절대로 벗기려 해서는 안 된다. (207페이지)

 


마음 속에 가면을 품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때로는 가면을 쓰고 때로는 가면을 벗고서 살아가죠. 그렇기에 인생이 풍부하고 즐거워지는 거고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427페이지)

 


경찰을 그만두었다고 하지만, 닛타 고스케의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리하다. 아즈사 경감이나 독자가 보기에도 호텔 직원으로 있기에는 안타까운 인물이 아닌가 말이다. 복수의 사건이지만 깔끔한 진행 방식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된다. 감추고 싶은 모습,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대변하는 작품이라고 봐도 좋겠다. 그나저나 닛타 고스케는 다시 경찰로 돌아갈 수 없나. 물론 호텔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해결하지만, 경찰은 경찰일 때 가장 멋진 모습이 아니던가.

 


사건의 해결이 다소 밋밋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호텔이라는 특성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닛타 고스케의 또 다른 활약을 기대해 본다.

 

 

#매스커레이드라이프 #히가시노게이고 #현대문학 #닛타고스케 #일본소설 #일본문학 #매스커레이드시리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상 속의 삶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상속의삶 #앤드루포터 #문학동네



 

아들이 아버지를 닮지 않기란 어렵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애써도 아버지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비슷한 행동을 한다. 본인은 다르게 행동했다고 하더라도 제3자가 보기에 그 흔적을 쫓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앤드루 포터의 신작 상상 속의 삶은 스티븐으로 하여금 40년 전에 사라진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여정을 통해 아버지를 비난했던 자신을 돌아보는 소설이었다. 아버지는 우리 삶의 큰 축이다. 어렸을 때 부모와 함께 자랐던 과정을 통해 성격이 형성된다. 삶의 방향까지도.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다.



 

스티븐은 아내 앨리슨과 별거에 들어서며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거라고 생각되면서도 왜 그는 아버지를 찾으려 하는가. 자기 모습에서 보이는 아버지의 흔적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가 아버지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이들을 찾아다닌다. 그들에게 들었던 말은 왜 더 일찍 아버지를 찾지 않았느냐는 거였다. 스티븐은 아버지가 사라진 후 어머니를 사랑하면서도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꼈다. 아버지가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풍경을 떠올린다.


 






스티븐에게 아버지는 수영장이 있는 집 뒷마당에서 열린 디너 파티다. 대학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 교수와 가족들이 참석하여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의 파티를 떠올리면 늘 데릭 에번슨이 떠올랐다. 종신교수 준비를 한다는 핑계로 집안에 들어오지 않고 카바나에 머물렀던 아버지. 이해할 수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장면들이다. 어머니는 그 장면을 보고 울음을 삼켰고, 술을 마셨다. 어머니를 외롭게 했던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흔적을 쫓으려 아버지의 서재에서 아버지의 책을 살폈다. 아버지의 내면세계를 이해하게 해줄 단서 하나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를 외롭게 했던 아버지, 그러나 뛰어난 대학교수였으며 교수들에게 좋은 동료였다. 종신 교수직에서 밀려나 혹은 다른 이유로 스스로 제어하지 못했던 듯하다. 무엇보다 스티븐의 말이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소설에서는 스티비 닉스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다소 중성적인 목소리, 몽환적인 목소리를 가졌다. 어렸을 적 스티븐이 좋아했고, 자주 들었던 노래다. 아버지와 데릭 에번슨이 들었던 노래이기도 하다. 스티비 닉스의 음악을 따라 과거의 시간이 흘러간다. 아버지와 데릭 에번슨, 그리고 스티븐의 과거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살아있을까. 아버지의 동료 교수들을 찾아다니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데 진실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스티븐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다니며 비로소 아버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자기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열한 살 스티븐의 눈에 비쳤던 아버지와 아버지의 나이가 된 스티븐이 생각하는 아버지는 달랐다. 아무래도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버지에게 건넸던 상처의 말, 스스로 용서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스티븐이 아버지의 삶을 상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가 종신교수에 임용되고, 사라지지 않았던, 어머니와 스티븐의 곁에서 함께 살았던 삶이었다. 과거를 바꾸고 싶은 자의 염원이 담겨있는 장면이었다.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고, 아픔과 상처는 존재하지 않았던 삶을 꿈꾸지만, 결국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의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닫는 여정이었다. 그가 따뜻하고도 행복한 풍경이라고 기억했던 모든 장면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우리가 부모님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알 뿐이다. 불완전함을 간직한 인간이라는 자꾸 잊는다. 비로소 그는 삶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좀 더 나다운 삶에 매진하지 않을까.

 

 

#상상속의삶 #앤드루포터 #문학동네 #책추천 #영미소설 #영미문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미지
조세핀 하트 지음, 공경희 옮김 / 녹색광선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데미지 #조세핀하트 #녹색광선

 



줄리에트 비노쉬와 제러미 아이언스가 출연한 영화 <데미지>가 개봉된 지 30년이 지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금기와 파격적인 문제작이라고 하여 논란이 되었던 거로 기억한다. 아들의 연인을 사랑한 남자, 아들과 아버지를 동시에 사랑하는 여자, 충격적인 베드신으로 기억되는 작품에 원작 소설이 있었다는 건 몰랐다. 소설로 보는 데미지는 어떨까. 영화의 잔상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상태에서 이 소설을 읽으니 안나가 왜 그렇게 욕망에 집착했는지 그 실체에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을 가진 남자. 부와 명성은 기본이고, 아름다운 아내, 완벽한 아들과 딸, 의사에서 정치인으로서 미래의 수상이 될 재목인 남자였다. 그가 아들의 연인을 욕망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파국과 그 심리를 제대로 담은 소설이었다. 안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평생 아버지처럼 건조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파티에서 안나를 마주치며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데 비극의 시작이었다. 제어할 수 없는 욕망에 굴복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지나간 삶을 참회하며 죽을 때까지 안나를 욕망하며 그리워하지 않을까.



 

녹색광선에서 펴낸 에로스 시리즈 조세핀 하트의 데미지가 그 첫 번째를 차지했다. 러블리한 표지로 근친상간적인 욕망에 굴복한 남자의 비극의 테마. 작가는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냉정하고 건조하게 그렸다. 안나를 좇는 남자도, 안나에게서 헤어나지 못하는 피터도, 비극적인 삶을 맞이하는 마틴도 마치 불나방을 쫓듯 비극으로 치닫는다. 독자는 그를 나무랄 것이다. 아들의 연인을 탐닉하게 되는 그가 아들의 삶을 위해 멀리 떠나야 하지 않았겠느냐고. 소설 속에서 그의 아내 잉그리드가 말한다. 왜 일 년 전에 죽지 않았느냐고. 스스로 죽었으면 이러한 비극은 생기지 않았겠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저 욕망에 이끌려 안나를 바라볼 뿐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편으로 그는 안나와 만나면서 비로소 살아있다는 것을 강렬하게 느꼈다.






 

시간이 흘러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다. 그가 '50세에 죽었다면 대단한 명성은 없어도 의사요, 자리 잡은 정치가로 인생을 마감했을 거'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고, 가족을 파탄에 빠트렸으며, 스스로 비극의 현장에 섰다. 누군가는 이 소설이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작가 또한 소설에서 이 이야기는 그저 러브스토리에 불과하겠지.’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단순한 러브스토리는 아니다. 파멸에 이를 걸 알면서도 안나 바턴에게 향하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남자의 넋두리일 뿐이다.

 



결혼식을 앞두고 마틴이 죽었을 때,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마치 일 처리를 하듯 상당히 차갑고도 깔끔하게 진행됐다. 남자는 앤드류에게 장례식에 참석할 사람, 사퇴와 일의 마무리를 맡기는데,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라고 보기 어렵다. 냉정하게 판단하여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듯 업무 지시를 내리고, 아내와 딸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한다. 그러고 보니, 주인공은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왜 죽지 않았느냐고 울분을 토하는 잉그리드 앞에서 그저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할 뿐이었다. 이를테면 사죄하고 용서를 빌지 않았다는 말이다. 거짓말을 일삼았던 남자가 아들의 죽음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을 아낄 뿐이었다. 평생 보고 싶지 않다는 말에 그러겠다고 말하고, 딸 샐리를 만나도 되겠느냐고 묻고 묵묵히 답변을 들을 뿐이었다.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탐닉하고 빠져드는 남자를 통해 상처가 깊은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의 범주가 어디까지 향할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안나에게는 치유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누구도 사랑할 수 있고,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진정한 자유를 깨닫는 일. 그게 남자를 파멸에 이르는 길이더라도 제어할 수 없었으리라. 금단의 욕망과 이로 인한 죽음. 이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탄에 젖은 한 남자가 걸어간다. 때로 그의 앞에 안나로 보이는 여성이 등장하겠지만, 그저 바라볼 뿐일 것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고, 상처를 입은 인간이 되어 묵묵히 걸을 것이다. 아직은 살아 있다고 느낄 것이다.

 

 

#데미지 #조세핀하트 #녹색광선 #영미소설 #영미문학 #녹색광선해외문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긴긴밤 #루리 #문학동네 


 

우리는 누군가와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을 때 우리라고 부른다. 함께 걷는 것, 함께 나아가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야겠다. 가장 소중한 존재와 함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우리라는 것에 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동화를 읽었다. 인터넷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 오래도록 올라 있던 작가의 책을 두 권 골랐다. 루리 작가의 긴긴밤나나 올리브에게였다. 일상에 지쳐 있던 와중에 오랜만에 동심을 느끼고 싶었다.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와 펭귄 치쿠의 여정을 담은 동화다. 흰바위코뿔소가 어째서 코끼리 고아원에서 발견되었는지 몰랐다. 노든의 첫 기억은 커다란 코를 가지고 있는 코끼리들이었다. 코끼리들 틈에서 자란 그는 코끼리의 보살핌에 익숙해 있었고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코뿔소 노든은 자기의 삶을 찾아 떠나는 여정에 올랐다. 버려진 알을 양동이 담아 길을 떠난 치쿠와 함께 바다를 향해 걸었다. 악몽을 꾸느라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그들에게 긴긴밤이 계속되었다. 무서운 인간들에게 복수하고자 했던 노든의 분노 때문이었다. 바다를 향해 천천히 걷는 여정 속에서 다르지만 함께 있다는 소중함을 느끼는 치쿠와 노든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치쿠는 우리라는 말을 많이 썼다. 노든은 알에 대해 딱히 별 관심은 없었지만 우리라고 불리는 것이 어쩐지 기분 좋았다. (63페이지)

 


알을 지키기 위해 바다로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치쿠는 용기있는 펭귄이었다. 노든이 위험에 처하면 상대방을 부리로 쪼았고, 새똥을 주변에 뿌려 지키려고 했으며, 긴긴밤 외로울 때 노든의 틈에서 밤을 지냈다. 목숨이 다했다고 여겼을 때 노든에게 알을 지켜달라고 약속을 받아냈다. 자기의 알이 아니었음에도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키는 치쿠를 보며 배울 점이 많았다. 동물도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지구상에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의 이야기를 한 편의 동화로 풀어냈다. 이로써 우리는 흰바위코뿔소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동화지만,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와 삶의 연대를 통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결국 마음을 여는 건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서로 의지하고 뜻을 함께할 수 있는 관계여야만 우리라고 불릴 수 있지 않겠나.

 


이제 아기 펭귄은 노든과 헤어져 펭귄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것이다. 바다에서 혼자 헤엄칠 수 있었듯 누군가에게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가 되리라. 살아가면서 노든의 말을 잊지 않을 것이다. ‘너는 너고 어른이 되어 만나도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도 알아보지 않겠나. 이제 나나 올리브에게를 읽을 차례다. 가슴속에 따뜻한 온기를 가득 채운 느낌이다. 어른이 동화를 왜 읽는지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긴긴밤 #나나올리브에게 #루리 #문학동네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동화 #창작동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