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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만 익숙한
심윤서 지음 / 가하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하늘에서 보면 조그만 행성에 불과한 푸른색의 지구. 오로지 지구에서만 사람이 살수 있는 곳.
아직까지는. 그 지구가 몸살을 앓고 멸망이 도래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태어나고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늘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기도 하며
다시 만나기도 한다. 그곳에서 사는 우리. 여전히 사랑이야기에 목말라하는 우리. 태양에서 세번째 행성에서 사는 우리. 우리들의 이야기다.
어쩌면. 내가 상상해 왔던 이야기이기도 하는.
심윤서 작가의 책을 좋아한다. 작가의 글보다 더 좋아하는 건 글 속에서 말하는 따스함 일 것이다.
글을 읽다보면 어느새 가슴이 찡하면서도 따스해져 오는 감정. 그런 감정을 나타내는 작가의 글이 참 좋다. 연재글을 다 챙겨보지 못하고 겨우 몇
편 보았을 뿐이지만 좋은걸 어떡해.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 『러브 고 라운드』속 윤은홍의 친구인 가비, 연갑이다. 연갑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연갑의 오빠 연준의 이야기도 함께 말하고 있었다. 소설 속 인물들 중에서 유달리 애정이 가는 사람이 있다. 가비의 오빠 준이었다. 뭔가 애틋하면서도
특별한 사람이어서 준이라는 인물이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너무 아프면 그 사랑했던 시간을 온통 잊을수 있을까. 단 한번의
교통사고로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깨끗히 잊어버릴수 있을까. 그 사랑이 너무 아파서, 그 헤어짐이 믿을 수 없어서 였을까. 갑이라는 이름은
광고 카피라이터로 일했던 아빠가 늘 을의 입장이기 때문에 딸만큼은 어디가서든 갑의 인생을 살라며 이름을 갑이라 지었다. 그런데 갑은 아빠의
바람과는 달리 홍보대행사에서 역시 을의 입장에서 일하고 있다.
갑은 계속 꿈을 꾼다. 어떤 남자와 함께 사랑을 나누는 꿈이다.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건만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늘 꿈속에서 나타나는 사람이지만 얼굴만은 안개에 가려져 있다. 꿈을 꾼 어느 날, 기흉때문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을녕이라는 남자, 외국에 있다가 어머니가 불러 병원에 찾아오게 되었다. 7년만에. 엘리베이터에서 어떤 여자가 탔다. 깜짝 놀라서
바라보았지만 정작 그 여자는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전혀 모르는 얼굴처럼 대하고 있었다. 갑이었다. 윤갑. 가비. 갑자기 서울에 남고
싶었다. 어머니의 말처럼 의붓형이 인수하는 회사를 운영해보고 싶어졌다.
분명 낯선 사람이었는데 그에게서는 익숙한 향기가 났다. 언젠가 맡았었고 꿈 속에서 늘 만났던
향기. 사랑의 기억은 때로 향기가 먼저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연갑에서 서을녕의 향기가 그랬던 것처럼. 갑의 회사를 인수한 새 대표가 왔다.
그에게선 익숙했던 향기가 났고, 갑의 귓가에 '가비야'라고 부르는데 그 말은 늘 들었던 것처럼 익숙했고 아파왔다. 그리고 그 남자 서을녕을
기억하게 되었다. 교통사고가 난 모든 순간과 함께.
준아, 세상에서 제일 먼 거리가 뭔지
아니?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야. 바로 곁에 있어도
안드로메다보다 더 멀게 느껴질 때도 있어. 반대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282페이지)
사랑은 때로는 기억이고 추억이다. 좋았던 순간이나 아팠던 기억마저 훗날에 느껴보면 너무 소중한
추억들이 된다. 오히려 무심했던 걸 아파하게 된다. 좀더 잘해줄걸 하는 생각. 좀더 많이 사랑할걸 하는 생각들. 연갑과 서을녕의 사랑은
좋았으면서도 아팠다. 다른 한편으로 가비의 오빠 연준과 은하의 사랑은 서로 부족한 면을 채워주는 사랑이었다. 사람에게 낯설어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 서툰 준에게 은하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요소를 갖춘 초반부에 비해 후반부에서는 흔히 있는 가족간의 갈등, 서을녕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시험 같은 일들, 출생의 비밀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 부분이 없어도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귀기울였다.
온 우주를 통틀어 우리는 별의 반짝임보다 더 못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아마 우주에서 내려다본다면
먼지의 작은 입자 정도 될까. 별을 사랑하고 행성을 사랑하는 준을 보면서, 준이 운영하는 '태양에서 세번째 돌 위에서'라는 이름의 블로그처럼
우리는 때로는 행복한 삶을, 때로는 아픈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어느 순간 한 줌의 재가 되어 우리의 존재가 사라질지라도 태양에서 세
번째 행성은 늘 여전히 바삐 움직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것이므로.
P.S. 연준이 우주에 심취했던 소설 속 내용을 보면서 소장하고 있는 칼 세이건의 책 『코스모스』를
살펴보고 싶어졌다. 우주의 탄생, 은하계의 진화, 태양의 삶과 죽음, 우주를 떠돌던 먼지가 의식 있는 생명이 되는 과정, 외계 생명의 존재 문제
등이 수록된 책을 보면 연준이 생각날 것 같다. 그 책을 읽어보면 연준을 좀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