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그대에게
류근 지음 / 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태풍의 영향권 때문인지 아침부터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나풀거리는 원피스의 치맛자락이 다 부풀도록 세찬 바람이다. 비가 오려는지 습이 배어있는 바람이었다. 바람을 맞으면 시원하면서도 더워졌다. 비를 기다리며, 김광석의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노래를 검색해 들었다. 하모니카와 함께 나직하게 노래를 부르는 김광석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며, 가사를 음미했다. 오늘 같은 날, 곧이어 내리는 비와 아주 잘 어울리는 곡이다. 낮이라면 한 잔의 커피를, 밤이라면 한 잔의 술을 부르는 노래다. 낮술을 하고 싶은 날이라고 해야 할까. 기타소리가 애절하게 들린다. 지금은 가고 없는 김광석의 얼굴, 목소리가 어느 시인의 얼굴로 스친다. 류근 시인이 썼다는 노랫말이 이상하게 가슴으로 파고든다. 류근 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니 왠지 김광석과 외모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기타와 하모니카의 어우러짐이 좋은 음악과 목소리를 연이어 몇번 듣는다.

음악은 우리를 아련한 기억속으로 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겨 본다. 시인의 산문을 읽으면,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시詩 같다. 하루의 일상이 거의 술인듯 보여지는 류근 시인의 일상속에서도 우리는 시詩를 느낀다. 시인의 시를 만나보지 않은 상태에서 산문을 읽으니, 그가 내뱉은 모든 말들이 시처럼 다가왔다. 몇 줄의 글에서도 나는 그의 감성을 느꼈다. 이 사람, 시인으로 살 수 밖에 없구나.

 

나는 짐짓 너그러운 사람인 척 아껴두었던 고추장 한 종지를 꺼내놓고 오전 11시의 우울에 대해서, 오전 11시의 그리움에 대해서, 오전 11시의 막다른 슬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41페이지)

 

 

시인의 일상은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나는 하루였다.

책 속에서 보기에. 이토록 술을 마시면 탈이 날법도 한데. 왠지 걱정스러움도 생겨났다. 사람을 만나는 시간들이 다 술마시는 시간이라는 것. 그가 머물고 있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연탄을 빼어쓰는일, 월세를 미루는 일, 하숙집 아주머니가 시래깃국만 내리 끓여 지겨웠던 일. 허물어져 가는 집에서 살때 동화 작가를 꿈꾸는 주인집 아저씨와 나누는 대화도 어쩌면 그렇게 재미있는지. 피폐한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의 글은 충만하였고, 독자로 하여금 시적 즐거움을 주었다.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서일까, 그의 말 한 마디에서 풍겨져 나오는 모든 것들에 시적 내음이 있다. 대화 속의 주인집 아저씨와 나누는 대화의 괄호 속의 속마음 때문에 우리는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다.

 

다른 책들은 라면과 바꾸기 위해 동네 거북서점에 가끔 몸을 허물기도 하지만 시집만큼은 어쩐지 좀 곤란하다. 일종의 동업자 정신일 수도 있겠다. 시집이란 게 괴상한 생명력을 가져서 어제 안 온 시가 오늘 오기도 하고, 그제 안 온 시가 내일 올 수도 있고, 하필이면 오늘 울고 있을 때 손수건이 되어주기도 한다.  (75~76페이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명랑한 햇빛 속에서도 눈물이 나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깊은 바람결 안에서도 앞섶이 마르지 않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무수한 슬픔 안에서 당신 이름 씻으며 사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가득 찬 목숨 안에서 당신하나 여의며 사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삶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 건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어디로든 아낌없이 소멸해버리고 싶은 건가.  (199페이지)

 

류근 시인은 자신을 가리켜 '삼류 트로트 통속 시인'이라고 말했다.

배가 고프면 밥보다 술이 더 생각났던 시인은 가슴속에 옛날 애인 100명쯤을 놔두고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사람이 그리워 술을 마시고, 사람이 그리워 편지를 쓰는 그의 진솔한 글들이 참 좋았다. 책을 읽으며 그의 시집을 검색했다. 인터넷 서점에 보이는 시집이라곤 딱 한 권 뿐이었다. 책을 읽기 전, 책 날개에 있는 저자의 이력을 보았음에도, 다른 시집이 있지 않을까, 다른 산문집이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던가 보다. 신춘 문예에 당선되고, 18년만에야 전작 시집『상처적 체질』을 첫 시집으로 출간했다 했다. 난 류근 시인의 시집을 구입하려고 리스트에 넣었다.

 

태풍 영향으로 빗소리가 심해졌다.

그의 시집의 다 읽고, 마음속에 그리워할 누군가를 떠올리며 술 한 잔 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술을 부르는 산문집이랄까. 그의 글 속에서 술 냄새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 비 비린내와 어울리는 술, 술을 부르는 시, 시를 읽고 싶은 그의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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