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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하는 중입니까?
김지운 지음 / 조은세상(북두)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긴머리칼을 가진 남자를 그려본다.
찰랑거리는 길다란 머리칼, 뒷모습을 보면 여잔지 남잔지 구별할 수 없을만큼 머리결도 고운 남자를. 나는 책속에서나 만화속에서 만나보았다. 오래전에 신문에 연재될때 일부러 연재되는 날을 기다려 만나보았던 김동화 작가의 『빨간 자전거』 속에서 젊은 우체부 아저씨가 긴 머리칼을 하나로 묶고 나왔었다. 남자가 머리를 길러도 이렇게 멋질수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또한 TV 속에서 만나는 어떤 락가수는 여자보다 더 찰랑이는 머리결을 자랑한다. 뭐,,외모는 순정만화 속 주인공과는 전혀 다르지만.
또한 예술하는 남자를 그려본다.
책 속에서도 나왔지만, 예전에 '사랑과 영혼'이란 영화에서 주인공 남녀가 같이 물레에 겹쳐 앉아 흑으로 무언가를 빚으며 사랑을 나누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우리의 이런 마음을 들여다 본듯 작가는 주인공 그린에게 영화 '사랑과 영혼' 속 그 장면을 그대로 상상하게 만든다. 또 남자 문정효는 그린의 곰곰, 하고 있는 장면을 딱 알아맞춰주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이 예술하는 사람들이 나오면 특히 더 좋던데, 이 작품 속에서 남자주인공은 도예가다. 하나의 항아리를 빚어 팔면 1천만원을 호가하는 그런 유명한 도예가인 것이다. 그리고 길다란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늘어뜨리고 흙으로 무언가를 빚는 남자가 주인공인 그런 책이다.
알고 싶다.
알고 싶다.
알고 싶다....... 저 남자를.
알고 싶다.
알고 싶다.
알고 싶다....... 그 여자를.
이름도 싱그러운 그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여자가 도예가를 좋아하는 이야기다.
3인칭 시점으로 그려진 내용은 본문에서는 그린의 시점으로 읽혀진다. 하지만 하나의 장이 끝날때마다 들어있는, '곰곰, 하는 중입니다.' 는 그린을 처음 만나면서부터 자신의 마음을 담은 정효의 시가 들어 있다. 그린을 바라보는 정효의 마음이 보이는 시詩 속에서 우리는 두근거림을 느끼게 된다. 무릇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대로 들어 있는 탓이다.
마음이 온다.
몸보다 먼저 오는 마음이 오로지 붉다.
연한 분홍인 줄 알았는데.
봄꽃의 망울처럼 마냥 여리고 싱그러운 줄만 알았는데.
내게 오는 그 마음이 때로 진한 노을빛이다. (181페이지, 곰곰, 하는중입니다.)
일단 사랑을 시작하게 되면, 우리는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눈빛에서 드러내게 된다.
상대방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눈빛. 눈빛에서 다른 이들은 마음을 알아챌 수 있다. 아무리 눈을 돌리려 해도 어느새 좋아하는 이에게 고정되고 마는 그 눈빛때문에. 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은 내게 어떤 마음일까?', '나를 좋아하기는 하는 걸까?'하는 것들이 궁금해 곰곰 생각하게 된다. 둘이서 마주앉아 있어도 서로의 마음이 궁금해 곰곰, 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시작이 아닐까.
김지운 작가의 책을 꽤 여러 권 읽었는데, 내가 아는 작가의 작품들은 그 흔하디 흔한 삼각관계가 없다. 여자 남자가 사랑을 할때 꼭 끼어드는 악녀 캐릭터도 없다. 난 이런 점이 특히 마음에 든다. 솔직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짝사랑이 아니고서야, 둘이서 눈빛을 들키고 마음을 들키고 둘의 사랑이 절정을 향해 다가가기도 힘든데, 옆에 끼어드는 악녀 캐릭터는 반갑지 않다. 이 작품처럼 서로에게 다가서는 시련, 즉 딸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반대를, 함께 헤쳐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아버지에게 할말 하고 자신이 원하는 사랑에 용기를 낸 그린도 좋았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그린을 마치 채가듯이, 둘이서 갔던 곳 선운사의 동백과 청보리밭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간 정효의 용기있는 행동도 좋았다.
또한 김지운 작가의 책은, 책을 읽으면서 미소짓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통통 튀는 말투를 따라 읽다보면, 어느새 입으로 그네들의 말투를 따라 해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린.
너를 생각하며 앉아 있는 시간들이 길어져만 간다.
깨어 있는 시간들이 깊어져만 간다.
믿을 수 없다.
동백은커녕 그녀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순간, 순간, 순간들을.
정녕 미치지 않고서야.
아마도 나는, 중독.
남그린에게. (210페이지, 곰곰, 하는중입니다)
작가는 책속에서의 주인공과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고 했다.
작가가, 만들어 낸 주인공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야, 어떻게 독자들이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 작가가 있기 때문에, 스물아홉 살의 문정효에게, 이 글이 연재하는 동안,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도 그린과 함께 문정효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드라마 '구가의 서'를 보면서 구월령과 사랑에 빠져 있었던 것처럼. 구월령이 나오는 때면 나는 잠자기 전 설레는 마음을 부여안고 구월령의 모든 것을 곰곰, 하고 있었다. 행복해진 문정효와 남그린, 나는 이제 정효를 곰곰, 하지 않을 것이다. 정효는 그냥 그린에게 줘버릴 것이다. 마지막에 아이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는 그네들이 얄미워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