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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 ㅣ 실버 스푼
은태경(계란토스트) 지음 / 신영미디어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짝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한다.
한때 나도 무진장 짝사랑을 해왔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고백도 제대로 못하고 끙끙거렸는지 모르겠다. 그 사람만 보면 저절로 눈웃음이 지어지고 괜시리 설렜던 그 감정을.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수 없다든가. 상대방을 향한 미소와 눈짓, 그걸 알아채기는 너무도 쉬울 것이다. 하지만 개중에 무딘 사람이 있어 전혀 알아채지 못하기도 하더라만.
오매불망 한 사람만 바라본다는 것 이것처럼 힘든 일이 없다.
자신을 여자로 생각하지 않고 가족으로만 생각한다는 남자를 십년 넘게 바라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더군다나 한집에서 남매처럼 자라왔다면 더더욱 그러겠지. 어렸을때 부모를 여의고 고모 집에 얹혀 살면서 오히려 남 보다 더한 취급을 받으며 살아오던 은주에게 지현 아줌마는 그녀를 데려와 친딸처럼 사랑으로 키웠다. 지현 아줌마가 딸 하자는 말에도 고개를 흔들던 은주는 그렇게 세진 오빠를 마음에 담았다. 십 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세진을 좋아하는 은주와 은주의 사랑을 한사코 거부하려는 세진의 이야기이다.
처음엔 세진이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대할때와 은주를 대할때의 모습을 보면 은주한테 감정이 없는 게 아닌데 말이다. 자기 물건이나 자기 몸에 닿는걸 누구보다도 싫어하고 깔끔떠는 그인데 은주와 있을때는 서재의 책을 만져도, 한 찌개 그릇에 숟가락을 담가 함께 밥을 먹는 것도, 은주가 마시던 물잔으로 물을 마시는 건 예사요 은주 숟가락으로 찌개 간을 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왔던 터다. 그런데도 은주를 거부하는 모습이 그냥 동생으로 보는 건가 싶었다. 남자라면 무릇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한테 자신의 마음을 과감하게 표현하는게 좋던데 자꾸만 거부하는 세진의 모습이 답답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횡단보도의 트라우마를 알게 되고 어쩌면 그럴수도 있었겠다 하고 이해를 했다. 세진의 두려움을 알게 되었던 까닭이다. 어느 누구나 그런 상황이었다면 세진처럼 행동하지 않았을까 싶다.
책에서는 다양한 인물들이 나온다.
모든 사물들과 대화를 하는 은주와, 은주의 친구인, 마음이 저 지구 너머 화성에 가 있는 듯한 나슬과 나슬의 남자친구 하강, 그리고 하강의 친구 민우와 수영, 세진의 아는 형 성훈이 또한 은주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작가의 전작인 『남자고등학교』에 나온 인물들이라 한다. 이렇게 되면 그 인물들이 궁금해 전작을 읽어볼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내가 좋아하는 '남장 여자'가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전작이 읽고 싶어졌다.
은태경이라는 작가의 책 이번이 처음인데 잔잔하면서도 악역이 없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세진의 어머니가 은주를 따스하게 품어 주었던 것도 마음에 들었고 세진의 누나인 세영 또한 은주를 예쁘고 보아 주어서 좋았던것 같다. 친한 형 성훈에게서 로리콤 이냐는 말을 들었던 세진. 은주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도저히 숨길수 없었던 은주의 깜찍한 행동과 함께 역시 사랑을 확인하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은 질투 작전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질투 작전에 넘어가지 않을 남자는 아마도 없으리라. 목석이 아닌 다음에야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가 좋아한다고 했을때의 그 강렬하고도 치명적인 질투 말이다.
최민우와 김수영의 이야기인 『남자고등학교』가 무척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