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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증명 ㅣ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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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다가 읽지 않은 책 중 『구의 증명』을 떠올렸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 중 이렇게 처절해도 되는가.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답 하나를 알게 된 느낌이었다.
남자 담과 여자 구의 사랑 이야기다. 빚쟁이들을 피하다 연인이 죽었다. 죽은 연인의 몸을 먹으며 삶을 기억한다. 매끈한 팔과 다리, 눈썹을 훑고 몸을 먹으며 슬픔을 이긴다. 지나온 삶, 처음 만났던 여덟 살 시절, 서로 모른척했던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를 기억하려 한다. 담이 구의 시체를 먹는 건 그를 기억하는 시간과 같다. 아낌없이 사랑하고 기억하는 시간이다. 기억한다는 건 사랑한다는 것. 그와의 과거를, 현재를, 미래를 아우르는 과정이었다.
어렸을 적 구는 담을 괴롭혔다. 그럼에도 담은 아무렇지 않았다. 아이들이 담과 구를 놀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죽은 구를 업고 택시를 타 집에 데려왔다. 대야에 물을 담아 구의 몸을 씻겼다. 구를 방에 누이고 구의 몸 전체를 닦았다. 손톱과 발톱을 깎아주고는 꿀꺽 삼켰다. 구를 먹는 작업은 구의 모든 걸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구의 몸이 자양분이 되어 자기 몸에 흡수되어 영원히 나의 몸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의 기억조차 나의 것이 될 터였다.

나는 너를 먹을 거야.
너를 먹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야.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하던 괴물 같은 놈들이 모조리 늙어죽고 병들어 죽고 버림받아 죽고 그 주검이 산산이 흩어져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나는 살아 있을 거야. 죽은 너와 끝까지 살아남아 내가 죽어야 너도 죽게 만들 거야. 너를 따라 죽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네가 사라지도록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살아 남을 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 거야. (20페이지)
최근에 <조명가게>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를 나타낸 드라마였다. 죽은 자가 헤매는 골목은 과거와 이별하는 공간이었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마음을 추스르고 결정하는 공간이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지난한 과정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었다. 경계선을 나오는 자는 살 것이며, 그 안에 갇힌 자는 죽음 너머로 가는 과정이었다. 드라마를 보며 회차가 늘어갈수록 슬펐다. 죽은 엄마가 저 길을 헤매었을 거라는 생각. 살길 바라는 엄마가 구해오라는 것.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딸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렸다.
그러니까, 담이 구의 몸을 먹는 과정은 하나의 장례 의식이었다. 누구도 알게 해서는 안 되는 담만의 장례였다. 구의 기억과 내 기억이 맞물려 사랑했던 추억을 함께하는 의식. 영원히 내 마음속에 두게 하는 과정이었다.
너와 다른 우주에서 온전히 기억하고 있어.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억뿐이니까.
기억이 나의 미래.
기억은 너.
너는 나의 미래. (68페이지)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는 과정. 기억은 곧 사랑의 기억. 영원히 마음속에 가두어 현재를 이겨내고, 미래를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과정이었다. 온전히 기억해야 온전히 보낼 수 있는 것처럼.
구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모든 말은 곧 우리의 기억. 죽는 게 죽는 게 아닌 상태의 기다림.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마음이 닿는 곳.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만날 거라는 희망의 속삭임이라는 걸 우리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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