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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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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작품은 짧으면서도 강렬하다. 아일랜드의 역사와 문화를 알게 한다. 소설이란 작가의 경험과 문화, 역사가 드러나야 의미가 깊은 법이다. 상상력만으로는 다 표현하지 못한다. 자라면서 느껴왔던 사회적 부조리, 가난, 차별은 경험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작품 속에서 우리와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작품을 읽는 건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일곱 편의 단편은 아일랜드의 한 시대를 엿보게 한다. 「작별 선물」에서 여자 주인공은 아버지의 암망아지를 팔아 비행기표를 마련해 미국으로 떠나는 딸이 주인공이다. 어머니는 딸을 아버지의 방으로 밀어 넣는 일이 반복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가보라고 말하고, 아버지는 침대에서 나오지도 않으며 돈을 줄 듯 말 듯 딸과 작별을 고한다. 아들의 노동력을 무보수로 착취하기까지 하는 아버지였다. 딸은 가족들과 작별하는 시간을 그저 떠나야 하는 일과로 볼 뿐이다. 딸이 맞이할 도시는 모든 게 낯설지만, 희망에 차 있다. 그녀가 도착한 도시는 새로운 삶을 열어줄 새로운 문이다.
소설에서는 사제가 두 번 등장하는데 일반적인 사제와는 다르다. 「푸른 들판을 걷다」의 결혼식을 주재하는 사제는 한때 신부와 사사로이 만나는 관계였다. 사제와 결혼을 바랐던 신부는 그가 사제직을 내려놓지 않자 다른 남자와 결혼식을 올리는 터였다. 그걸 바라보는 사제의 하루를 담은 내용은 어쩐지 쓸쓸하다. 들판을 홀로 걷는 사제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녀는 자기 인식이란 말의 너머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대화의 목적은 스스로 이미 아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모든 대화에 보이지 않는 그릇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야기란 그 그릇에 괜찮은 말을 넣고 다른 말을 꺼내 가는 기술이었다. 사랑이 넘치는 대화를 나누면 더없이 따스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고, 결국 그릇은 다시 텅 빈다. 그녀는 인간 혼자서는 스스로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61페이지, 「푸른 들판을 걷다」 중에서)
마음을 표현할 줄 모르는 남자 디건이 나오는 「산림 관리인의 딸」을 보자. 결혼에 확신이 없었지만, 청혼을 거절하지 못한 마사는 결혼의 공허함을 느낀다. 은행에 집을 저당 잡힌 디건은 열심히 일해도 늘 돈이 모자라다. 외판원에게 장미 묘목을 사서 울타리 가득 심는 아내 마사를 질책할 뿐이다. 공허함을 달랠 방법은 떠나야 해결될 일이다. 디건과 마사, 이들을 가까워질 틈은 없는가. 모든 것이 불타는 장면은 공허함을 달래줄 그 무엇이다.
「물가 가까이」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엮은 작품집에 실린 소설이다. 백만장자와 재혼한 어머니, 새아버지와 함께 생일을 지내려고 케임브리지를 떠나 텍사스 해변에 와있다. 리조트의 주인이기도 한 새아버지는 시니컬하다. 하버드 대학에 다니는 그를 자랑스러워하는 어머니. 비꼬는 말을 하는 새아버지.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케임브리지를 왜 벗어났을까 후회하던 남자는 수영을 하다가 하마터면 익사할 뻔했다. 절대 수영을 하지 않았던 할머니를 떠올리는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삶은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반드시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걸 말하려 했을까.
굶주린 아이의 빵을 빼앗다시피 사서 자기의 배를 채우는 중사의 이야기 「굴복」은 인간의 비겁함을,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는 안하무인을 보는 것 같았다. 약혼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겠다는 편지를 받은 중사의 마음은 참사를 맞았던 걸 보상이라도 하려 했던 것일까.
발 씻은 물을 바깥에 버리지 않고 집안에 두면 나쁜 일이 생긴다고 했던 설화가 첫 장에 나오는 「퀴큰 나무 숲의 밤」은 스스로 삶을 개척해나가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했다. 사제의 아이를 임신했다가 아이가 죽자 더 이상 아이 낳을 능력이 사라진 마거릿의 이야기다. 사제가 죽자 그의 집으로 와서 머문다. 옆집의 문을 두드리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아이를 다시 밸 수 있는 몸이 되었다.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부조리함을 인지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작별 선물」에서 ‘당신’은 비행기표를 사기 위해 아버지의 망아지를 몰래 팔았다. 자기가 떠난 뒤에 망아지를 찾아갈 수 있게 조치를 확실히 했다. 그녀의 결정이 통쾌하다. 또한 「퀴큰 나무 숲의 밤」에서 마거릿은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자 아이를 데리고 멀리 떠난다. 아일랜드에서 전해 내려오는 미신은 당연히 무시했다. 그렇기에 현재의 우리가 있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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