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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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읽는 일이야말로 문학과 생각의 세계를 넓히는 일이다. 작품에서 만나는 인물은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이었다가, 살아갈 내일이 되기도 한다. 잊고 지냈던 기억을 떠올리고 감추고 싶었던 상처를 드러내며 나아갈 삶의 방향을 세운다. 삶은 아픔이며 슬픔, 기쁨과 즐거움, 행복, 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일이다. 아픈 과거의 기억을 안고 있는 자는 그것을 드러내기 주저한다. 애써 드러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서 비로소 나와 마주할 수 있다.


 

이주혜 작가의 소설을 읽기로 한 게 제목 때문이었는지 내용 때문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끌리듯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마치 소중한 내 기억과 마주한 것 같았다. 어쩌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과거의 나, 현재의 고통, 살아가야 하는 나와 닮아 있었다. 몹시 추운 겨울날, 한 페이지씩 꺼내 읽는 서랍 속 일기장과 마주한 것 같았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행위입니다. 객관화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이랄까요. (15페이지)


 

남편이 떠나고 딸과도 멀어진 관계에서 공황장애를 앓았던 여자는 정신과 치료를 받던 중 의사의 권유로 일기를 쓰게 되며 과거의 기억과 마주한다. 시옷이라는 이름으로 일기를 쓰며 공주처럼 드레스를 입고 다녔던 애니, 아픈 시간을 함께 걸었던 윤수와 윤심 남매, 그리고 수호의 이야기를 한다. 일기라고 하지만 시옷이라는 화자를 내세워서인지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1980년대의 시옷은 행복한 아이였다. 짧은 머리칼을 가진 시옷을 소년으로 보고 천상의 목소리를 가졌다며 칭찬하는 합창단 지휘자, 사업 실패로 큰 빚을 지고 집을 떠난 아버지와 집으로 들어온 제비 다방 남자는 시옷을 위로해주고 웃음을 준다. 과거와 현재의 고통을 떠올리며 자기보다 어렸을 엄마와 할머니를 이해하게 되고, 아빠와 더 가까웠던 딸 해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일기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별도의 화자를 내세워 글을 쓰는 작업은 나를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함이다. 소설 속 글쓰기 강사 림자는 말한다. ‘헤어지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기록하세요. 어떤 수치심도 글로 옮기면 견딜 만해집니다.’ (23페이지) 라고 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애써 숨겨두었던 기억 파편이 시옷을 괴롭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의 각 장의 제목은 으로 되어 있다. 긴 겨울의 끝을 지나 봄을 기다리는 마음, 비로소 봄이 찾아왔다는 안도감을 담은 글 같았다. 봄은 곧 희망이며 새로운 관계를 이끌어갈 수 있다. 해준이 시옷을 이해할 수 있었듯 관계도 조금씩 변해가는 게 아닐까.


 

어쩌면 나이 들어간다는 건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는 것 같다. 그때는 알지 못했던 것들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우리 모두 같은 시간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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