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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평점 :
뜻밖의 사진 한 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캐니언의 프로포즈>라는 사진으로, 스냅사진 작가인 빌 모리의 휴대폰으로 찍었다. 그랜드캐니언의 가장 아름다운 절벽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남자의 프로포즈 장면이었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려 프로포즈하는 커플을 찾았다. 빌 모리의 사진은 큰 인기를 끌어 사람들은 그들이 사진을 찍은 장소를 찾아내 비슷한 구도의 사진을 찍었다. 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로 밝혀졌으며 실종 신고를 한 지 일주일이 되던 날 사진이 찍혔음을 알게 됐다. 그러나 사진을 찍은 것은 빌 모리가 아닌 로버트라는 사실을 밝혔다.
안이지는 로버트 재단의 전화를 받았다. 미술학원 교사로 일하면서 지원금을 받아 예술 활동을 했지만, 그러는 사이 집의 전세금은 점점 내려갔고 현재는 음식 배달 라이더로 일하는 중이었다. 로버트 재단의 창작 프로그램 지원을 받게 되었다. 16주간의 미국 체류 비용과 함께 4주간의 전시회와 함께 전시회 마지막 날에 작품 중 하나를 소각해야 했다. 소각할 작품은 로버트 재단에서 선택한다는 조건이었다.
로버트가 다름 아닌 ‘개’였다는 게 문제랄까. 언젠가 어느 억만장자가 자기가 키우던 반려동물에게 유산을 남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처럼 문구용품 회사의 회장 발트만이 자기의 딸 리나의 사진을 찍은 로버트의 영향으로 편안해했고, 로버트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로버트 재단의 창작 프로그램에 안이지가 참여하게 되었던 거다. 재단에서 로버트와 함께 만찬을 즐기고 산책을 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타인들에게 보여주는 행위가 필요했다.
소각 시스템은 인간의 삶과도 비슷하죠. 인간은 언젠가 죽습니다. 재활용도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저 일회용일 뿐이지요. 불타버릴 쓰레기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늘 소각에 대한 두려움만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인생을 지레 포기하지도 않고. (181~182페이지)
말이 통하지 않은 개와 함께 산책과 식사를 하고 대화한다고 생각해보라. 로버트의 말을 대니가 1차로 전달하고 영영 통역에서 영한 통역으로 안이지에게 전달되는 언어들은 우주 너머로 가는 것 같았다. 재단 이사장인 개를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인간들의 뒷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로버트의 말을 자기들 필요에 의해 전달하고 예술가의 마음을 사려 하지 않았나. 더군다나 예술가의 마음을 훔치려 했다.
작가는 16주 동안 작품을 만들고 로버트가 선택한 작품을 소각하게 되는데, 이것은 작가가 작품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구조다. 혼신을 다한 작품이 소각된다고 생각해보라. 애틋하지 않겠는가. 어떻게든 작품을 지키고 싶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작품은 곧 작가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말이었다. 여기에서 드는 생각, 똑같은 작품을 그리면 되지 않겠느냐는 거다.
예술을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작가가 자기의 작품을 똑같이 그린다고 해서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미세한 차이가 드러날 텐데 작품을 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만 느낄 수도 있다. 어쩌면 작가 자신이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 다급한 상황에서 자기의 작품을 구해왔다고 치자. 원래 소각하려던 작품인지, 다시 그린 작품인지. 어떤 게 진짜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작품은 희귀성이 있어야 유명해지는 법인가. 소각할 때 비로소 작품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인가 보다. 그러한 효과를 기대하고 작품을 소각하는 미술계의 행태를 고발하는 것 같았다. 재단 이사장이라고 개와 마주한 예술가를 상상하니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그들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유지하고 살아가려 애썼던 거다. 자기의 작품 중 하나를 소각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작품을 만들고 그 진가를 찾아 나설 수많은 예술가의 마음을 훔치려고 하지 않았나. 한편의 블랙 코미디 영화 같기도, 게임 같기도 했다. 작가의 마음을 불태우는 작업, 우리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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