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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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신체에 물리적으로 가하는 폭력과 언어폭력,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하게 되는 성폭력까지. 상대방이 싫다고 말하는데도 그게 부끄러움의 한 종류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여태까지 그런 경우가 많아 피해를 본 여성들이 많다. 한동안 문단 내 성추행 때문에 시끄러웠고, 그다음엔 연예계가 들썩거렸다. 지금은 성폭력보다는 일반적인 폭력 때문에 여러 사람이 뉴스에 오르내린다. 근절되어야 마땅하지만 쉽지 않은 일 임에 틀림없다.

 


이선영의 장편소설 지문에서는 다양한 폭력에 대하여 말한다. 가족이라도 함께 살지 않는다면 진정한 가족이 되지 않는지 이해 불가한 일들이 많다. 이 소설은 가평의 청우산에서 변사체가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서울지방청 광역수사대 형사로 있다가 전임 혹은 좌천되어 가평경찰서로 오게 된 규민은 자살처럼 보이려 했으나 그렇게 보이지 않은 변사체를 마주했다. 흔히 시체가 많은 것을 말해 준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산에서 죽은 여자라면 자살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여자의 휴대폰도 가방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탐문 해가던 규민은 그녀가 꽃새미화원의 애지중지 딸 오기현 임을 알게 되었다.


 


 

 

소설의 다른 화자는 대학에서 서사창작 강의를 하는 윤의현이다. 친자매가 맞으나 그 존재조차 몰랐던 여동생의 소식을 최근에야 알게 되면서 며칠째 연락을 받지 않은 오기현의 실종신고를 했다. 윤의현은 다른 한편으로 대학의 서사창작을 가르치는 교수 이민흠의 성추행 사건으로 수업 거부를 한 대학생 예나를 설득해 시사프로그램에 제보할 것을 권했다.

 


예나는 대학 1학년생이다. 지도교수는 작품을 쓸 때 봐주기도 하고 학교 홈페이지의 모델로도 추천해주었다. 학과 특성상 문학 기행이나 작가 특강 후 술자리가 잦았다. 교수의 손버릇이 좋지 않은 걸 알았으나 술자리에서 빠져나오기란 힘들었다. 문득 이 부분을 읽는데 연예인의 성추행 추문과 너무도 닮아 있어 놀랐다. 예나와 그 동급생들처럼 교수가 갖는 지위와 권력 때문에 참아야 했던 그들의 고통이 느껴졌다.

 


 

 

이민흠을 단죄하는 윤의현이 정의를 실현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딘가 의심쩍은 면이 없잖았다. 오기현의 아버지 오창기와 꽃새미 화원의 눈먼 사내 신명호 또한 의심스러웠다. 오창기가 아무렇지 않게 신명호의 눈을 찔러 장애인으로 만든 점도 그러했고, 동물 마취제를 사용하는 점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피해 오지의 마을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는 것은 알겠으나 파출소의 경찰들에게도 함부로 하는 점은 이해 불가였다.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오창기의 딸 오기현의 시체가 발견되었어도 마을로 찾아간 규민에게 누구 하나 제대로 말한 사람이 없다는 거다. 나 살기에 바빠 다른 사람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 혹은 누군가의 눈치를 보느라 말을 삼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 내 성추행 사건이 있었어도 학교의 이미지를 생각하느라 안절부절 덮기에 바쁜 사람들.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느라 바쁜 사람들 때문에 아직도 우리 사회는 변화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으나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소설에 그대로 인용하는 사람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또한 다른 폭력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또한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있다.

 


그나저나 눈먼 사내 신명호가 불렀던 <눈먼 사내의 화원>이라는 노래를 찾아 듣고는 그 노래가 계속 귓가에 이명처럼 찾아드는 통에 노래앓이를 했다. 현악기의 선율과 함께 읊조리듯 노래하는 가수의 목소리 때문에 몇 번이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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