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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사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지음, 승주연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3월
평점 :
언젠가 들었던 것이 떠오른다. 냉동되었던 사람을 해동시켰을 때의 결과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마 어떤 뉴스를 들었던 것인지, 읽은 소설이었는지 정확한 건 기억나지 않는다. 상상해 보자. 실험을 위해 어떤 사람을 액체 질소에 담가 냉동시켰다. 시간이 흐른 후 해동했을 때 이 사람은 다시 살 수 있을까. 냉동되기 전의 온전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까. 살아있는 사람이 잠든 상태 혹은 죽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 삶은 멈추고 사랑하는 사람과도 이별해야 한다. 이 실험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수많은 의문이 생기게 한다. 더불어 안타까움도 들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브게니 보돌라스킨의 『비행사』는 아주 놀랍다. 과거 스탈린의 동물 냉동 실험 대상에 참여하였던 한 사람이 깨어나는 것으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병원에서 깨어난 남자에게 그의 주치의라고 한 가이거는 그의 이름이 인노겐티 페트로비치 플라토노프라고 말한다. 이름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는 다만 통곡을 할 뿐이었다. 가이거는 인노겐티에게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기록하라며 공책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기억이 제대로 돌아오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자기가 사고를 당했던 것인지 가이거에게 묻지만 그는 아무런 해답도 주지 않는다. 인위적인 기억이 그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아나스타샤라는 이름을 떠올리고 그녀의 머리카락 색깔과 냄새가 기억났다. 간호사가 놓고 간 약봉지에서 지금이 1999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태어난 해는 1900년이었다. 그럼 그 시간 동안 자기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거울 속 그의 모습은 젊은 남자였다. 가이거는 냉동 보존술에 대한 기사를 건네주었다. 그 기사에 의하면 나중에 해동시켜서 다시 살아나게 하려고 냉동시켜 보존한다는 내용이었다. 많은 사람이 냉동 보존되고 있지만 이제까지 해동되어서 살아난 사람은 없었다.
과거의 기억을 찾기 시작하면서 인노겐티는 언론에 노출된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실험은 성공적이었으며 그의 기억도 점차 명확해진다.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집의 한 공간을 사용했던 세입자들. 아나스타샤와 콜바사 소시지를 만드는 회사에 다녔던 자레즈키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근에 요양원에 입원중인 아나스타샤를 만나러 가지만 그녀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소설의 주된 인물은 많지 않다. 인노겐티 플라토노프와 독일계 러시아인 의사인 가이거, 그리고 아나스타샤의 손녀딸인 나스챠다. 처음엔 인노겐티의 입장에서 20세기 러시아의 역사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온다. 하지만 이후엔 세 사람의 관점에서 인노겐티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존재와 그 이유에 대하여 말한다.

인노겐티가 궁금했던 건 그가 살아보지 못한 삶이었다. 그가 냉동되었을 때 세상은 변했고, 그 변한 세상이 궁금했다. 동 시대 사람의 생을 파악했고 아직까지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면 잃어버린 자신의 삶이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였던 듯하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수록 점점 잃어버린 생이 간절해졌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이 삶을 통째로 잃어버린다면 우리 또한 먼 훗날에 가슴아파할지 모른다. 비록 스스로 선택한 삶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인노겐티는 비행사가 되어 하늘을 날고 싶은 꿈이 있었다. 하늘 아래 비행장에 있는 우리는 너무나도 작은 존재이지 않나. 사촌 세바는 그를 가리켜 비행사 플라토노프라 불렀다. 그가 깨어났을 때 즉 해동되었을 때 그는 어렸을 때 읽었던 『로빈슨 크루소』를 읽었다. 몇 십 년이 지나 깨어난 그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현재에 갑자기 나타난 존재였으며 과거의 흔적들이 사라진 곳에서 과거의 기억들 때문에 혼란스러워하였다.
러시아의 역사 연대기이자 용서와 화해, 인간 존재의 이유를 말하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제목이 의미하는바 또한 그의 비상하는 삶.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또한 어디에도 머무를 수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 같다. 소설을 읽는 내내 감탄하였다. 이토록 감동적인 소설이라니. 생의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라.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소중한 것인지. 우리가 삶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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