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 맺힘 문지 에크리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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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읽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던 문학평론가 김현의 글을 드디어 읽었다.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좀처럼 기회가 없었다. 물론 핑계에 가깝지만 이처럼 읽게 되어서 얼마나 좋은가. 이미 작고한 작가이기에 그의 글을 만나지 못하는 수도 있기 때문에 이처럼 그의 산문에서 가려 뽑은 『사라짐, 맺힘』은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큰 의미가 있겠다.

 

첫 문장에서부터 마음을 울리는 감정을 가졌다. 책을 읽는다는 것. 그것에 대한 비평을 한다는 것, 여행하며 보고 느꼈던 것들, 문화적인 다양한 생각들, 미술관을 방문하며 화가의 그림과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들로 엮여졌다.

 

작가들의 에세이가 사랑받는 이유는 작가의 생각을 고스란히 들려주는 것 때문이다. 아파트에 생활하며 땅집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어도 아파트를 고집하는 아내때문에 땅집에 대한 아름다움을 누리지 못하는 감정들. 그리고 한때 많은 아이들에게 '니네 집 몇 평이냐?'로 계급을 갈랐던 평형에 대한 일화는 그때 그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물론 지금도 빈부의 격차를 가르는 것일 수도 있다.

 

또 내가 생에 못 견디도록 싫증이 날 때 나는 또 어디로든지 가는 방황의 여행을 시도하리라. 거기에는 그러면 또 나에게 그의 내밀한 설화를 보내주는 불빛이 있으리라. 하여 나는 이 진저리 나는 생에서 순간적으로나마 '진정한 생'을 느끼고 있는 셈이다. (16페이지)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다. 많은 여행을 하고 비평적인 시각으로 쓴 글임에도 따스하면서도 명쾌한 사유가 들어있었다. 우린 누군가의 글을 읽고 내 삶의 한 순간을 그려본다. 직시하지 못했던 나의 속마음을 알아채기도 한다. 내가 진정 꿈꾸는 삶이 무엇인가. 생에 대한 좀더 근원적인 질문을 건네게 된다.  

 

 

 

사람의 사람됨은 그 문화적인 두께에서 나온다. 그 두께는 사람이 오랜 시간 동안에 같은 처소에서 살면서 쥐는 체험의 두께이다. 나무를 자르면 나이테가 보이고 돼지의 살을 자르면 그 겹이 보이듯이 사람의 두께도 또한 조심스럽게 자르면 그 결이 보인다. (52페이지)

 

위 발췌 문장은 "'라면' 문화 생각"이라는 부분에서 라면에서 느끼는 문화적인 면과 사람의 두께에 관하여 말한다. 라면 하나에서 이처럼 문화적인 면과 사람의 두께와 결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란 매우 힘든 연상 작용인 것 같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처럼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사유를 펼친다.

 

책은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책읽기가 괴로워질 때에는 그것을 고쳐야 한다. 때때로 책읽기가 일종의 정신적 도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슴이 뜨거워질 정도로 괴로운 일이 생길 때 대개의 경우 책을 읽으면 그 괴로움이 많이 삭는다. (69페이지) 

 

책을 읽는다는 걸 즐거운 고통이라고 말하는 문장들이다. 맞는 말이다. 때로 나에게 책읽기는 정신적 도피다. 괴롭고 힘든 일이 있을 수록 책읽기에 빠져든다. 책의 내용에 집중해 있노라면 내가 가졌던 고민, 고통들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나면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일들은 한낱 과거의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한 경험을 자주 해봤기에 이처럼 좋은 문장이 없다며 이 문장 만큼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건 많은 독서가들이 느끼는 공통적인 감정일 수도 있다. 다만 다시한번 알리고 싶을 뿐이었다.

 

문학평론가라고 하면 만화 같은 건 아주 우습게 생각할 줄 알았다. 하지만 영화관에서 뉴스와 문화 영화를 상영하는 대신에(예전에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 뉴스와 문화 영화를 상영했다) 짤막한 만화 영화를 상영하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했다. 1984년에 개봉되었던 최인호 원작의 동명 영화 <깊고 푸른 밤>을 보고 나서 드는 여러 생각들을 담은 글에서 나타낸 말이다. 그는 문학 뿐만 아니라 영화와 미술 그리고 음악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음악의 산조에 대해 말하는 부분은 과히 감탄할 만 했다. 해금에 대한 생각을 말하는 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해금 연주곡에 빠져 정신없이 음원을 구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감정들이 되살아나는 글이었다.

 

여행이란 자고로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낯선 사람들 틈에서 비로소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다. 이는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느끼는 것들. 문학평론가 김현에게서도 느껴지는 감정들처럼. 삶의 무게, 시간의 두께, 문학과 글쓰기의 두께가 총 망라된 주옥같은 문장들의 집합체였다. 그의 글을 이제라도 읽어, 다행이다. 

모르는 사람들 틈에 있고 싶다. 매일 나무 우거진 공원길을 산보하고 싶다. 오후 7시면 카페에 나가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어 맥주를 마신다. 그래 네가 그토록 원하던 모든 것을 이제는 할 수 있다. 그러니 행복한가?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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