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19
박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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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기다리며 약 두 시간동안 시집 한 권을 읽었다. 시인계의 아이돌이라는 박준 시인의 신작 시집이다. 휘리릭 한 권을 넘겼다, 천천히 첫장부터 다시 읽었다. 시는 아주 천천히 읽어야 제 맛이 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시인이 하고자 하는 의미들을 제대로 찾지 못한다. 한 번을 읽고 다시 읽는 시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처음에 그냥 좋았던 시 였다가, 다시 읽게 되면 온 마음을 차지하는 시가 된다.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장이었습니다  (9페이지, 「선잠」 전문) 

 

사실 시집을 처음 읽게 되면 그렇게 많이 좋은 줄 모르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휘리릭 넘긴다. 다시 읽는 시에서 마음 깊이 들어오는 감동을 느끼게 되는데, 박준 시집이 그런 경우였다. 「선잠」이란 시의 전문인데 시집의 맨 첫 페이지에 수록되어 있다. 편집하는 과정에서 어떤 시를 맨 첫 페이지에 수록할까 고민을 거듭하게 될 것이다. 시인에게 굉장히 의미 있는 시를 첫 장에 수록하게 될터인데, 그래서 그런지 「선잠」이란 시가 가지는 느낌이 시집 전체를 가로지를 화두일 것이다.  

 

 

늦은 해가 나자

약을 먹고 오래 잠들었던

당신이 창을 열었습니다

 

어제 입고 개어좋았던

옷을 힘껏 털었고

그 소리를 들은 저는

하고 있던 일을 덮었습니다

 

(중략)

 

온몸으로 온몸으로

혼자의 시간을 다 견디고 나서야

 

겨우 함께 맞을 수 있는 날들이

 

새로 오고 있었습니다  (13페이지, 「84p」 중에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시집을 읽게 된다. 그 시를 처음 보았을때의 마음, 다시 읽는 시의 마음이 다른다. 내가 읽었던 시를 이웃의 글에서 만날 때면 그 감동이 배가 되는 경우도 있다. 아마 이것은 다시 읽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싶다. 내가 느꼈던 감동과 타인이 느끼는 감동이 서로 맞닿을때의 희열때문일 수도 있겠다.

 

 

늘어난 옷섶을 만지는 것으로 생각의 끝을 가두어도 좋았다 눈이 바람 위로 내리고 다시 그 눈위로 옥양목 같은 빛이 기우는 연안의 광경을 보다 보면 인연보다는 우연으로 소란했던 당신과의 하늘을 그려보는 일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94페이지, 「세상 끝 등대 3」 전문)

 

 

어떻게 보면 단순한 문장 같다. 시인의 마음을 표현한 몇 줄의 문장이 이처럼 마음을 옭아매다니. 그래서 시인의 감성은 남다른 것 같다. 소설가가 쓰는 산문보다 시인이 쓰는 산문을 더 좋아하는 이유도 이와같지 않을까. 문장의 나열이 아닌 감성의 다른 표현일 것이므로.

 

 

첫 시집보다는 훨씬 성숙된 마음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내 개인적 느낌일 뿐이다. 그저 시가 좋아 읽게 되는 경우. 그럼에도 마음 한가닥 위안을 느끼는 시간이 좋다. 누군가와 감정을 교류하는 것. 홀로 있는 시간, 마음까지 홀로인 건 아니었음을 느끼는 귀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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