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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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혁명 이후 격변의 도시 모스크바. 성 안드레이 훈장 수훈자이자 경마 클럽 회원, 사냥의 명인인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은 러시아 내무 인민위원회 소속 긴급 위원회에 출두했다. 1913년에 쓴  '그것은 지금 어디 있는가?' 라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죽음을 면하고 평생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백작이 머물고 있던 메트로폴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하녀들의 숙소로 제공되었던 다락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백작이 쓰던 무거운 책상과 커피 탁자, 등받이가 높은 의자, 도자기 접시, 여동생 옐레나의 초상화가 다였다. 그가 여태 지내본 곳 중 가장 작은 방이었다.

 

그가 호텔밖으로 나옴과 동시에 총살형에 처해지므로 호텔 안에서 모든 생활을 해야 했다. 자살을 하려고 올라갔던 곳에서 고향의 사과나무 꽃향기를 맡았던 그는 점차 가택 연금의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노란 색을 좋아하는 어린 소녀인 니나와 함께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함께 놀고, 유명한 영화 배우의 연인이 되었다. 또한 당의 지도부에 있던 당원의 프랑스, 영어 개인교사가 되어 그와 친분을 나눴다. 그리고 주방장과 식당의 지배인과 함께 주방에서 비밀 회담을 가졌다.

 

모든 사람에게 시중을 듣던 그는 이제 다른 사람의 식사 시중을 드는 호텔의 웨이터가 되었다. 웨이터를 하는 중에도 그는 품격을 잃지 않는다. 근무 시간에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살피고 문제점을 파악해 자리 배치에도 능하다. 휴무일이 되면 평소대로 그는 좋은 와인을 선별해 즐기는 생활을 영위한다. 한 어린 소녀가 그에게로 오게 되는데, 이 소녀는 니나의 딸로 그의 삶을 통째로 바꿀 아이였다. 오로지 자신의 삶을 사는 것에만 맞춰져 있던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아이를 살피고 아이와 함께 놀아줘야했다.

 

로스토프 백작은 어느 날 자신이 썼던 스위트룸에 마스터키를 열고 갔다가 그가 누리지 못한 생활에 대한 안타까움을 비쳤다. 다락방에 올라간 후 옷장 문을 유심히 살피고 옷장의 경계에 있던 다른 방을 망치로 두드려 그곳에 자신의 다른 공간인 서재를 만들었다. 그가 가택 연금의 상태에서도 질 좋은 와인을 즐기는 이유는 다리가 세 개인 할머니의 책상 때문이었다는 것을 독자들은 쉽게 알 수 있다. 호텔 안에서만 생활하는 그에게 웨이터 역할은 지루한 삶의 하나의 활력소였을 것이다. 직업을 가지는 것은 신사의 일이 아니라고 여겼지만 말이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박수 갈채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가 환호를 받게 될 것인지의 여부가 불확실함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이란다. (609페이지)

 

 

돌이켜보면 역사의 모든 전기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하지만 그 말이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놓은 나폴레옹 같은 사람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야. 여기서 내가 말하는 사람은 예술이나 상업, 또는 사고의 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갈림길마다 매번 등장하는 남자와 여자들이야. 마치 '삶'이란 것이 그 자체의 목적을 수행하는 데 도움을받을 요량으로 때때로 그들을 불러낸 것처럼 말이지. (657페이지)

 

혹시 구 시대의 귀족이었던 로스토프 백작의 이야기가 꽤 무거운 정치적 흐름을 따라가리라는 생각을 했다면 오산이다. 소설은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처럼 블랙 유머가 가득하다. 신사의 품격을 잃지 않은 로스토프 백작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호텔의 근무자들은 여전히 그를 백작처럼 대우한다.

 

여기에서 보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보인다. 그가 종신 연금 상태에 좌절해 죽고 말았다면 그는 이런 삶을 살수 없었으리라. 소피야라는 한 소녀의 출연이 그를 좀더 사람답게 살게 했을 것이고, 소피야와 함께 제길 게임을 했던 것들도 살아가는 즐거움을 알았기 때문이다. 소피야를 가르치는 즐거움, 소피야가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뿌듯함이 그를 살게 했던 이유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마인드가 아니었을까 싶다.

 

 

역시 로스토프 백작을 따라 호텔에서만 생활했던 소피야가 파리로 연주 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때 로스토프 백작은 아버지로서 두 가지 충고를 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삶을 살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첫째는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못하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가장 현명한 지혜는 늘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라는 몽테뉴의 격언이었다. (654페이지)

 

스스로 몽테뉴의 격언을 생각하며 그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을 하게 되었다. 딸에게 건넨 충고처럼 적응을 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환경을 지배하는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호텔 안이라는 공간에서 친구와 연인을 만들었으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추진할 수 있도록 했다.

 

러시아의 구 시대 귀족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라 고전적일 것이라는 우리의 예상을 뒤엎는다. 꽤 두꺼운 페이지지만 로스토프 백작의 행보를 파악하다보면 금세 책장이 넘어가 있다. 유머스럽고 한편으로는 통쾌하다. 그리고 감동적이다. 재미도 있다. 암울한 시대, 진정한 삶에 대한 통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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