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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ㅣ 밀란 쿤데라 전집 1
밀란 쿤테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모든 것은, 내가 바보 같은 농담이나 즐기는 치명적 성향을 지녔고, 마르케타는 농담을 절대 이해 못 하는 치명적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52쪽
모든 것은, 진지하지 못했던 그의 '농담'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그 농담 때문에 '인생 최초의 파멸'을 맛보게 된다.
대학에서 공산당 학생 연맹에 소속되어 있던 '루드비크'는 늘 진지하고 공산당원 연수에 열성적이었던 '마르케타'에게 한 통의 엽서를 보낸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 59쪽
사실 그의 사상도 그녀와 별반 다르지는 않았지만, 방학 동안 그녀를 그리워하는 자신과 달리 마르케타가 당 활동에 너무 열성적이어서, 게다가 늘 모든 일에 진지했기 때문에 그런 '농담'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보낸 그 엽서가 학생 연맹 지도부의 손에 들어가 공개 비판에 처해진다. 평소 그와 함께 했던 동지들이, 심지어 마르케타의 진지함을 알고 있어 그의 '농담'을 이해할 법도 했던 친구들이 그를 학교와 당으로부터 축출하는데 일제히 손을 들어 찬성한다. 이후 그는 '검은 표지'를 달고 군대에 보내져 그곳에서 노동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낸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에 영광"(62쪽)이라고 인사를 할 정도였으니, 신성한 노동으로 그를 교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루드비크의 생각은 달랐다. 그 또한 한때는 당과 관련된 활동과 사상이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없다면 죽은 것과 다름 없다고 여겼지만 노동을 하면서, 루치에를 만나면서 그런 것들이 환상이라는 것, 소소한 일상을 추구하는 삶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런 일들(너무도 전적으로 그 시대 것이어서 곧 그 용어조차 뜻모를 소리가 되어 버릴 일들)을 하다가 나는 파멸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 그 일들에 계속 집착했다. 여러 위원회에 소환되었을 때 나는 나를 공산주의로 이끌었던 동기를 수십 가지는 늘어놓았지만, 이 운동에서 무엇보다 나를 매혹시키고 심지어 홀리기까지 했던 것은 내 시대의 (또는 그렇다고 믿었던) 역사의 수레바퀴였다. (……) 우리가 맛보았던 그 도취는 보통 권력의 도취라고 불리는데, 나는 그러나 (약간의 선의로) 그보다 좀 덜 가혹한 말을 고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는 역사에 매혹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말 위에 올라탔다는 데 취했고, 우리 엉덩이 밑에 말의 몸을 느꼈다는 데 취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결국 추악한 권력에의 탐욕으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의 모든 일에 여러 가지 면이 있듯) 거기에는 동시에 아름다운 환상이 있었다.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이제 역사의 밭깥에 머물러 있거나 역사의 발굽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를 이끌어 나가고 만들어 나가는 그런 시대를 우리, 바로 우리가 여는 것이라는 그런 환상이 있었다.
나는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떠나서는 삶은 삶이 아니라 반 죽음이며, 권태이고, 유배이고, 시베리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 시베리아에서 여섯 달이 지난 후) 지금 나는 갑자기,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완전히 새롭고 예상치도 못했던 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내 앞에는 이제 전속력으로 비상하는 역사의 날개 아래 가렸던 초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잊혔던 일상이라는 초원, 소박하고 가난한, 그러나 충분히 사랑할 만한 한 여인 루치에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 124~125쪽
세월이 흘러 다시 사회로 돌아온 루드비크는 한 라디오 방송사 기자를 만나게 된다. 놀랍게도 그녀는 학창시절 자신을 축출하는데 앞장 선 제마네크의 부인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루드비크는 제마네크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부인을 이용하기로 한다. 이미 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헬레나(제마네크의 부인)가 '왕들의 기마 행렬'을 취재하기 위해 루드비크의 고향인 모라비아를 방문한다고 하자 그도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겠다고 한다.
1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루드비크. 그가 잡은 호텔은 그녀와 밀회를 나누기에는 너무 낡고 더러워서 다른 숙소를 찾아야만 했다. 마침 오래전에 자신이 일자리를 구해 준 적이 있었던 코스트카가 이곳에 살고 있어서 그에게 잠시 집을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다른 일 때문에 집에 머물 시간이 없다며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리고 면도가 필요한 루드비크에게 이발소를 소개해 주는데, 그곳에서 이발사로 일하고 있는 루치에를 만난다. 루드비크가 군대 시절 만났던 루치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 또한 그녀에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한편, 루드비크는 '왕들의 기마 행렬'에서 헬레나와 제마네크를 만난다. 루드비크는 제마네크가 사랑하는 부인을 취함으로써 그에게 복수하려 했지만, 오히려 제마네크는 젊은 여자를 동반하고 있었으며 헬레네와 제마네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서로에게 마음이 떠난 상태였다고 한다.
세상에, 복수는 커녕 제마네크가 버린 여자를 자신이 갖다니. 자신에게 최초의 파멸을 선물한 제마네크에게 아름다운 파괴를 돌려주려 했는데 실패한 것이다. 도대체 이 복수가 그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어린시절, 루드비크 또한 모라비아의 민속축제인 '왕들이 기마 행렬'에 참여했었다. 그땐 같은 악단 소속의 야로슬라프가 왕이었다. 야로슬라프는 루드비크나 제마네크와는 달리 고향 모라비아에서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는 음악가다. 그는 지금껏 그 민속 축제를 이어오고 있으며 올해는 야로슬라프의 아들(인 줄 알았다)이 왕이 되었다고 한다. 행렬 속에서 우연히 야로슬라프를 다시 만나게 된 루드비크. (이미 복수도 물 건너 갔기 때문에) 그는 야로슬라프에게 예전처럼 자신도 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야로슬라프는 악단과 자신을 떠난 루드비크가 싫었지만, 그래도 옛 정 때문인지 그의 청을 들어준다. 오랫동안 악기를 연주하지 않아서 걱정했지만, 연주가 시작되자 찬사가 쏟아졌다. 루드비크는 야로슬라프에게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나는 이 노래들 속에서 (이 노래의 유리 집 속에서) 행복했다. 거기에서는 슬픔이 가볍지 않고, 웃음이 비웃음이 아니고, 사랑이 우습지 않으며, 증오심이 맥없지 않고, 사람들은 온몸과 마음으로(그래, 루치에, 온몸과 마음으로) 사랑하며, 행복은 사람들을 춤추게 만들고, 절망은 다뉴브 강으로 뛰어들게 만들며, 그곳에서는 그러니까 사랑이 사랑으로, 고통이 고통으로 머물고, 아직 가치들이 유린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노래들 속에 나의 출구가 있고, 나의 본원의 표지가, 내가 배반한 나의 집,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나의 집인 집(배신당한 집에서야말로 가장 비통한 탄식이 솟아나오는 법이므로)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깨달았다. 이 나의 집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이 세상 것이 아니라면 그 집은 대체 어떤 것인가?) 우리가 노래하는 것들은 모두가 단지 추억이고 기념물이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으로 보존하는 일일 뿐이라는 것을. 529쪽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야로슬라프가 연주를 하다가 쓰러진 것이다. 행복한 순간에 쓰러진 친구를 품에 안게 된 루드비크는 생각한다. 농담으로부터 비롯된 자신 인생의 파괴사를. 만약 그가 농담만 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나는, 증오의 대상 제마네크를 쓰러뜨리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이 귀향이 결국은 이렇게 땅에 쓰러진 내 친구를 두 팔에 안고 있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전율하였다. 532쪽
내 인생의 일들 전부가 엽서의 농담과 더불어 생겨났던 것인데? 나는 실수로 생겨난 일들이 이유와 필연성에 의해 생겨난 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내 인생의 모든 일들을 전부 취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일들을 초래한 실수들이 내가 한 실수들이 아니라면 무슨 권리로 내가 그것을 취소할 수 있겠는가? 사실 내 엽서의 농담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을 때 잘못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알렉세이의 아버지가(지금은 복권되긴 했지만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이 다시 살아나진 않는다.)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잘못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이런 실수들은 너무도 흔하고 일반적이어서 세상 이치 속에서 예외나 '잘못'도 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순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잘못한 것이란 말인가? 역사 자체가? 그 신성한, 합리적인 역사가? 그런데 왜 그런 실수들이 역사 탓이라고 해야만 할 것인가? 인간으로서의 나의 이성에만 그렇게 보일 뿐, 만일 역사에 자기 고유의 이성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 이성이 인간들의 이해를 신경쓸 것이며 여선생처럼 꼭 진지해야 하겠는가? 그리고 만일 역사가 장난을 한다면?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능한 농담(나를 넘어서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482~483쪽
『농담』은 네 명의 화자(루드비크-헬레나-루드비크-야로슬라프-루드비크-코스트카-루드비크,헬레나,야로슬라프)가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조다. 같은 사건, 같은 이야기를 두고도 화자에 따라 들려주는 이야기가 다르다. 각자의 목소리가 다르고, 각자의 기억이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얽혀 있어서 마지막에는 결국 한 곳(모라비아)에서 마주하게 된다.
밀란 쿤데라가 살았던 시대는 '농담'이 허락되지 않았던 시대. '농담'을 이해하지도, '농담'에 웃을 수도 없었던 경직된 시대였다. 실제로 밀란 쿤데라(1929~)는 1950년에 체코 소설가 얀 트레풀카(1929~2012)와 함께 '반공산당 활동'이라는 죄목으로 공산당에서 추방당했다. 이후 공산당에 재가입하기는 하지만 (또 추방당했다.) 『농담』은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며, 그의 작품 곳곳에서 『농담』 조의 '농담'을 확인할 수 있으며 여전히 그런 '농담'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전쟁 중에 깨달았다. 그들은 우리가 존재할 권리가 없으며, 단지 체코어를 말하는 독일인일 뿐이라고 믿게 만들어 놓으려 했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했으며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해 두어야 했다. 그 시기에 우리는 모두 우리의 근원지로 순례를 떠났다. 2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