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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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릿하고 쫄깃한 우럭의 맛. 어쩌면, 우주의 맛!

2019년 젊은 작가상 수상작인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을 포함해 「재희」, 「대도시의 사랑법」, 「늦은 우기의 바캉스」 등 총 네 편의 연작소설이 실려 있는 박상영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네 편의 연작소설에는 닮은 듯 다른 듯한 화자, '영'이 등장한다. 현재 '영'은 30대 초반의 작가로 대도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으며, 네 편의 연작소설 모두 그의 연애사를 다루고 있다.

스무살의 여름, '영'은 '재희'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영'이 남자와 키스하고 있는 것을 「재희」에게 들켜버렸기 때문인데, 재희는 처음 본 순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영'과 재희는 동성 친구처럼 지냈고, 심지어 동거까지 하게 됐다. 나중에 재희의 예비 남편이 알게 됐지만, 결혼이 깨지지는 않았다. 아무튼 재희는 헤테로였으니까.

'영'은 군대에 가기 전에 연상의 공무원을 만났는데, 그 공무원의 성생활이 문란해 병을 얻게 된다. 그 때문에 6개월만에 의병 제대를 하게 됐지만 '영'은 자신의 병에게 '카일리'라는 애칭을 붙여준다. 약을 매일 챙겨 먹으면 괜찮다고는 하지만, 이 '카일리' 때문에 자유 연애를 하던 그의 행동에도 약간의 제약이 생겼다.

한때 그는 띠동갑의 편집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영'은 그를 진짜 사랑했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투병 중일 때 만난 사람이었는데, 그는 독특한 철학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은 그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ㅡ 당신이 지금 먹고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ㅡ 광어죠. 아니, 우럭인가? 제가 사실 생선을 잘 구별 못해요. 그냥 비싼 건 다 맛있더라구요.

ㅡ 맞고 틀려요. 당신이 맛보고 있는 건 우럭, 그러나 그것은 비단 우럭의 맛이 아닙니다. 혀끝에 감도는 건 우주의 맛이기도 해요.

ㅡ 네? 그게 무슨 (개떡 같은) 말씀이신지……

ㅡ 우리가 먹는 우럭도, 우리 자신도 모두 우주의 일부잖아요. 그러니까 우주가 우주를 맛보는 과정인 거죠. 「우럭 한점 우주의 맛」, 105쪽

그 다음에 만난 '규호'에게는 '카일리'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 놓는다. 하지만 규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당시 규호는 의대생인 형의 생활을 돌봐주며 '유설희 간호학원'에서 간호조무사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영'을 만나기 위해 인천에서 서울까지 그 먼 길을 오고갔다. 제주도가 고향인 규호는 육지, 그것도 '대도시'에서 살아보고 싶었다고, 그곳에서 사랑도 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실 나, 네가 엄청 필요해 규호야…… 나는 자꾸만 흐려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울로,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대도시로 향했다. 「대도시의 사랑법」 251쪽

이 책을 덮자마자 가장 먼저 '유설희 간호학원'을 검색해 봤다. "인천 하면 유설희지."라고 했던 규호의 목소리가 맴돌았기 때문인데, 인천 사람들은 다 안다는 그 곳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었다니. 대구에서 태어난 작가가 어떻게 알았을까? 인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던 것일까? 이런 쓸데없는 궁금증도 생겼다. 인천 하면 인천 앞바다에 뜬 사이다 아닌가.

규호를 떠나보낸 서른두살의 '영'은 10월 말, 「늦은 우기의 바캉스」를 가게 된다. 그곳은 1년 전 규호와 함께 왔던 곳으로, 규호와 함께 머물렀던 방에 채팅방에서 우연히 매칭된 한 외국 남자와 함께 묶는다. 그곳에서 규호를 떠올린다. 한때 자신에게 소원이었던 그 이름, '규호'를.

낯설다. 그들의 사랑이 낯설었던 건 아니다. 가장 최근에도 『항구의 사랑』을 통해 접했었으니까. 내가 낯설었던 것은 박상영 작가의 문장들이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부쩍 읽는 나보다 작가들의 문장들이 더 젊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2019년 젊은 작가상' 수상작이니 오죽할까.

더 낯설었던 건 강지희가 쓴 「해설:멜랑콜리 퀴어 지리학」이었다. 해설에 사용된 용어들을 보며, 이 이해할 수 없는 용어들만큼 동떨어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느꼈다.

소설에서 규호의 공간이 '제주(섬)'에서 '인천'을 거쳐 '서울'로 그리고 '상해'로 점차 넓어지는 반면, 화자의 공간은 상대적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퀴어의 성적 자유는 '대도시' 속에서 더 자유롭게 탐색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왔지만, 유독 병리화되는 특정 질병과 연결된 퀴어에게 도시의 경계선은 더 강력한 제약과 통제로 작동한다. 그래서 결국 화자의 공간으로 남는 곳은 대도시 속의 공항이다. 상해로 넘어가지 못한 채 홀로 공항철도를 타고 돌아오는 그의 쓸쓸한 모습은 소설 서두에서 만료된 여권 때문에 일본 여행을 가지 못하고 홀로 돌아오던 모습과 겹쳐진다. 카일리를 가진 그에게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될 수 없다는 사실은 그의 여권(시민권)이 언제나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을 것임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 절반의 시민권이 지금 한국에서 퀴어 정치가 지닌 한계를 반영한다는 사실 역시 자명해 보인다. 「해설:멜랑콜리 퀴어 지리학」, 329~3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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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밀란 쿤데라 전집 1
밀란 쿤테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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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모든 것은, 내가 바보 같은 농담이나 즐기는 치명적 성향을 지녔고, 마르케타는 농담을 절대 이해 못 하는 치명적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52쪽

모든 것은, 진지하지 못했던 그의 '농담'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그 농담 때문에 '인생 최초의 파멸'을 맛보게 된다.

대학에서 공산당 학생 연맹에 소속되어 있던 '루드비크'는 늘 진지하고 공산당원 연수에 열성적이었던 '마르케타'에게 한 통의 엽서를 보낸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 59쪽

사실 그의 사상도 그녀와 별반 다르지는 않았지만, 방학 동안 그녀를 그리워하는 자신과 달리 마르케타가 당 활동에 너무 열성적이어서, 게다가 늘 모든 일에 진지했기 때문에 그런 '농담'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보낸 그 엽서가 학생 연맹 지도부의 손에 들어가 공개 비판에 처해진다. 평소 그와 함께 했던 동지들이, 심지어 마르케타의 진지함을 알고 있어 그의 '농담'을 이해할 법도 했던 친구들이 그를 학교와 당으로부터 축출하는데 일제히 손을 들어 찬성한다. 이후 그는 '검은 표지'를 달고 군대에 보내져 그곳에서 노동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낸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에 영광"(62쪽)이라고 인사를 할 정도였으니, 신성한 노동으로 그를 교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루드비크의 생각은 달랐다. 그 또한 한때는 당과 관련된 활동과 사상이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없다면 죽은 것과 다름 없다고 여겼지만 노동을 하면서, 루치에를 만나면서 그런 것들이 환상이라는 것, 소소한 일상을 추구하는 삶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런 일들(너무도 전적으로 그 시대 것이어서 곧 그 용어조차 뜻모를 소리가 되어 버릴 일들)을 하다가 나는 파멸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 그 일들에 계속 집착했다. 여러 위원회에 소환되었을 때 나는 나를 공산주의로 이끌었던 동기를 수십 가지는 늘어놓았지만, 이 운동에서 무엇보다 나를 매혹시키고 심지어 홀리기까지 했던 것은 내 시대의 (또는 그렇다고 믿었던) 역사의 수레바퀴였다. (……) 우리가 맛보았던 그 도취는 보통 권력의 도취라고 불리는데, 나는 그러나 (약간의 선의로) 그보다 좀 덜 가혹한 말을 고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는 역사에 매혹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말 위에 올라탔다는 데 취했고, 우리 엉덩이 밑에 말의 몸을 느꼈다는 데 취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결국 추악한 권력에의 탐욕으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의 모든 일에 여러 가지 면이 있듯) 거기에는 동시에 아름다운 환상이 있었다.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이제 역사의 밭깥에 머물러 있거나 역사의 발굽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를 이끌어 나가고 만들어 나가는 그런 시대를 우리, 바로 우리가 여는 것이라는 그런 환상이 있었다.

나는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떠나서는 삶은 삶이 아니라 반 죽음이며, 권태이고, 유배이고, 시베리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 시베리아에서 여섯 달이 지난 후) 지금 나는 갑자기,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완전히 새롭고 예상치도 못했던 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내 앞에는 이제 전속력으로 비상하는 역사의 날개 아래 가렸던 초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잊혔던 일상이라는 초원, 소박하고 가난한, 그러나 충분히 사랑할 만한 한 여인 루치에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 124~125쪽

세월이 흘러 다시 사회로 돌아온 루드비크는 한 라디오 방송사 기자를 만나게 된다. 놀랍게도 그녀는 학창시절 자신을 축출하는데 앞장 선 제마네크의 부인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루드비크는 제마네크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부인을 이용하기로 한다. 이미 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헬레나(제마네크의 부인)가 '왕들의 기마 행렬'을 취재하기 위해 루드비크의 고향인 모라비아를 방문한다고 하자 그도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겠다고 한다.

1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루드비크. 그가 잡은 호텔은 그녀와 밀회를 나누기에는 너무 낡고 더러워서 다른 숙소를 찾아야만 했다. 마침 오래전에 자신이 일자리를 구해 준 적이 있었던 코스트카가 이곳에 살고 있어서 그에게 잠시 집을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다른 일 때문에 집에 머물 시간이 없다며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리고 면도가 필요한 루드비크에게 이발소를 소개해 주는데, 그곳에서 이발사로 일하고 있는 루치에를 만난다. 루드비크가 군대 시절 만났던 루치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 또한 그녀에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한편, 루드비크는 '왕들의 기마 행렬'에서 헬레나와 제마네크를 만난다. 루드비크는 제마네크가 사랑하는 부인을 취함으로써 그에게 복수하려 했지만, 오히려 제마네크는 젊은 여자를 동반하고 있었으며 헬레네와 제마네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서로에게 마음이 떠난 상태였다고 한다.

세상에, 복수는 커녕 제마네크가 버린 여자를 자신이 갖다니. 자신에게 최초의 파멸을 선물한 제마네크에게 아름다운 파괴를 돌려주려 했는데 실패한 것이다. 도대체 이 복수가 그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어린시절, 루드비크 또한 모라비아의 민속축제인 '왕들이 기마 행렬'에 참여했었다. 그땐 같은 악단 소속의 야로슬라프가 왕이었다. 야로슬라프는 루드비크나 제마네크와는 달리 고향 모라비아에서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는 음악가다. 그는 지금껏 그 민속 축제를 이어오고 있으며 올해는 야로슬라프의 아들(인 줄 알았다)이 왕이 되었다고 한다. 행렬 속에서 우연히 야로슬라프를 다시 만나게 된 루드비크. (이미 복수도 물 건너 갔기 때문에) 그는 야로슬라프에게 예전처럼 자신도 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야로슬라프는 악단과 자신을 떠난 루드비크가 싫었지만, 그래도 옛 정 때문인지 그의 청을 들어준다. 오랫동안 악기를 연주하지 않아서 걱정했지만, 연주가 시작되자 찬사가 쏟아졌다. 루드비크는 야로슬라프에게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나는 이 노래들 속에서 (이 노래의 유리 집 속에서) 행복했다. 거기에서는 슬픔이 가볍지 않고, 웃음이 비웃음이 아니고, 사랑이 우습지 않으며, 증오심이 맥없지 않고, 사람들은 온몸과 마음으로(그래, 루치에, 온몸과 마음으로) 사랑하며, 행복은 사람들을 춤추게 만들고, 절망은 다뉴브 강으로 뛰어들게 만들며, 그곳에서는 그러니까 사랑이 사랑으로, 고통이 고통으로 머물고, 아직 가치들이 유린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노래들 속에 나의 출구가 있고, 나의 본원의 표지가, 내가 배반한 나의 집,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나의 집인 집(배신당한 집에서야말로 가장 비통한 탄식이 솟아나오는 법이므로)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깨달았다. 이 나의 집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이 세상 것이 아니라면 그 집은 대체 어떤 것인가?) 우리가 노래하는 것들은 모두가 단지 추억이고 기념물이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으로 보존하는 일일 뿐이라는 것을. 529쪽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야로슬라프가 연주를 하다가 쓰러진 것이다. 행복한 순간에 쓰러진 친구를 품에 안게 된 루드비크는 생각한다. 농담으로부터 비롯된 자신 인생의 파괴사를. 만약 그가 농담만 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나는, 증오의 대상 제마네크를 쓰러뜨리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이 귀향이 결국은 이렇게 땅에 쓰러진 내 친구를 두 팔에 안고 있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전율하였다. 532쪽

내 인생의 일들 전부가 엽서의 농담과 더불어 생겨났던 것인데? 나는 실수로 생겨난 일들이 이유와 필연성에 의해 생겨난 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내 인생의 모든 일들을 전부 취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일들을 초래한 실수들이 내가 한 실수들이 아니라면 무슨 권리로 내가 그것을 취소할 수 있겠는가? 사실 내 엽서의 농담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을 때 잘못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알렉세이의 아버지가(지금은 복권되긴 했지만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이 다시 살아나진 않는다.)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잘못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이런 실수들은 너무도 흔하고 일반적이어서 세상 이치 속에서 예외나 '잘못'도 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순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잘못한 것이란 말인가? 역사 자체가? 그 신성한, 합리적인 역사가? 그런데 왜 그런 실수들이 역사 탓이라고 해야만 할 것인가? 인간으로서의 나의 이성에만 그렇게 보일 뿐, 만일 역사에 자기 고유의 이성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 이성이 인간들의 이해를 신경쓸 것이며 여선생처럼 꼭 진지해야 하겠는가? 그리고 만일 역사가 장난을 한다면?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능한 농담(나를 넘어서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482~483쪽

『농담』은 네 명의 화자(루드비크-헬레나-루드비크-야로슬라프-루드비크-코스트카-루드비크,헬레나,야로슬라프)가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조다. 같은 사건, 같은 이야기를 두고도 화자에 따라 들려주는 이야기가 다르다. 각자의 목소리가 다르고, 각자의 기억이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얽혀 있어서 마지막에는 결국 한 곳(모라비아)에서 마주하게 된다.

밀란 쿤데라가 살았던 시대는 '농담'이 허락되지 않았던 시대. '농담'을 이해하지도, '농담'에 웃을 수도 없었던 경직된 시대였다. 실제로 밀란 쿤데라(1929~)는 1950년에 체코 소설가 얀 트레풀카(1929~2012)와 함께 '반공산당 활동'이라는 죄목으로 공산당에서 추방당했다. 이후 공산당에 재가입하기는 하지만 (또 추방당했다.) 『농담』은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며, 그의 작품 곳곳에서 『농담』 조의 '농담'을 확인할 수 있으며 여전히 그런 '농담'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전쟁 중에 깨달았다. 그들은 우리가 존재할 권리가 없으며, 단지 체코어를 말하는 독일인일 뿐이라고 믿게 만들어 놓으려 했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했으며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해 두어야 했다. 그 시기에 우리는 모두 우리의 근원지로 순례를 떠났다.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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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임금이 노동 생산물의 가치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필품만 뜻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체제가 유죄라는 것, 가장 정직한 주인들조차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혹한 경쟁 법칙을 따르고 노동자들을 착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정녕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될 우리 사회체제죠. 56쪽

우리는 과도기, 동요기에 있어요 아마도 혁명적 폭력이 발생할 텐데, 그 폭력은 흔히 불가피합니다. 하지만 과장과 격정은 덧없는 것이죠 …… 오! 지금 당장의 큰 어려움을 숨기지는 않겠습니다. 이 모든 꿈의 미래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 미래 사회, 그 풍속이 우리의 풍속과 너무나 다른 정의로운 노동의 사회에 대한 합리적인 개념을 제시할 수가 없어요. 그것은 또다른 행성에 있는 또다른 세계처럼 보이죠 …… 이 점을 고백해야 합니다. 재조직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모색 단계에 있어요. 57쪽

분명 현재의 사회체제는 개인주의적 원리 덕분에 오랜 번영이 가능했습니다. 개인주의적 원리란 당연히 경쟁심, 사적 이해관계가 풍요로운 생산을 끊임없이 갱신하는 것을 가리키죠. 집산주의가 언젠가 이런 풍요에 이를 수 있을까요? 또한 이윤이란 개념이 파괴될 때, 그 어떤 수단으로 노동자의 생산 기능을 자극할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 바로 거기에 회의와 고뇌, 튼튼하지 못한 지반, 다시 말해 언젠가 사회주의의 결정적 승리가 도래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투쟁으로 더욱더 다져나가야 할 허약한 지반이 있어요…… 여하튼 정의가 우리의 것인 이상, 우리는 승리할 겁니다.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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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도시 출신이 아닌 사람은 모두 시골 출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시골과 도시의 중간에는 그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구분할 수 없는 특징이 존재했다. 「기차」 283~2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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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틀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오인석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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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배우와 예술가를 존경하며 국화를 가꾸는 데 신비로운 기술을 가진 국민에 관한 책을 쓰면서, 동시에 이 국민이 칼을 숭배하며 무사에게 최고의 영예를 돌린다는 사실을 기술한 또 다른 책으로 그 국민의 성격을 보충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없다.
그렇지만 이런 모든 모순이 일본에 관한 책에서는 날줄과 씨줄이 된다. 이런 모순은 모두가 진실이다. 칼도 국화와 함께 그림의 일부분을 구성한다. 일본인은 최고로 싸움을 좋아하면서도 얌전하고, 군국주의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불손하면서도 예의 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력이 있고, 유순하면서도 시달림을 받으면 분개하고,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고, 용감하면서도 겁쟁이고,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받아들인다. 2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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