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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안텀 블루
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오사키 요시오, 낯선 이름의 그는 전작 『파일럿 피쉬』를 통해 호수 저편에 가라앉아 있던 내 감성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해준 작가이다. 요즘 같은 가을 날에는 그의 책이 딱일거라는 설레임으로 이 책과 마주하게 되었다.
투명한 느낌의 표지에 부드럽게 프린트 된 아디안텀의 사진, 지나다니면서 마냥 이름모를 잡초로만 여기고 보았던 그 식물이 "아디안텀"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트 모양의 잎을 가진 아디안텀은, 한번 시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잎이 말라가는 특징이 있어 그 때를 "아디안텀 블루"라고 한단다.
기치죠지 도큐 백화점의 옥상.
<월간 발기>라는 잡지사에서 편집일을 하는 야마자키 류지는 3개월 전에 암으로 죽은 연인 요코를 생각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곳은 요코가 쇼핑을 할 때 류지가 항상 기다리고 있던 곳이고, 요코가 좋아하는 인디안텀 화분이 놓여 있는 곳이다.
그런 류지에게 한 여자가 다가왔다. 우연히도 며칠째 함께 류지와 같은 공간에 있었던 히로미, 그녀는 남편을 잃었다고 했다. 자신의 절친한 친구와 바람을 폈던 히로미의 남편은 동반자살을 선택했는데, 히로미의 집과 반대 방향의 전차로 뛰어 들었다. 히로미는 자신의 집과 반대 방향으로 뛰어든 것이 분하다고 했다.
그것이 병이든 자살이든, 사랑이든 배신감이든 간에 어쨌든 그들은 여전히 죽은 사람들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디안텀 블루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똑같은 상실을 경험하고 있는 그들, 그들은 왜 옥상을 선택했을까? 어쩌면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하늘에 더 가까이 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우울로 그들은 아디안텀 블루를 온전히 겪어내고 있었다.
(류지) "우울 속에서 태어나는 따뜻함."
(히로미) "우울 속에서요?"
(류지) "그래요. 그 속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 몸을 비틀듯, 몸의 일부분이 비틀리는 듯한 고통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따뜻함."
(히로미) "나도요?"
(류지) "그래요, 당신도. 그것을 얻기 위해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만약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이 괴로움도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렇죠?
아디안텀 블루를 극복하는 줄기만이 겨울을 나고, 왕성히 살아가죠. 그렇게 되면 비로소 내 것이 되고,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아디안텀 블루는 찾아오지 않아요."
<본문, p205>
<월간 발기>의 모델 사진을 찍으면서 만난 류지와 요코, 그들은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듣고, 조류도감과 식물도감을 함께 보면서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날 문득 찾아온 그녀의 사형선고,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1달 밖에 되지 않았다. 지난번 유럽 촬영에서 니스에서 죽고 싶다던 그녀의 말을 기억해 낸 류지는 그녀를 병원에서 데리고 나온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풍경을 바라보며, 또 그 풍경과 하나가 되어 편안하게 눈감을 수 있게 해준다. 함께 떠난 일본으로 쓸쓸히 혼자서 돌아온 류지는 요코를 잊지 못한채 옥상으로 향했던 것이다.
히로미마저 더이상 옥상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을 때, 류지는 고독을 확인하고 "우울 속에서 다시 일어선 아디안텀만이 살아남는다."고 했던 요코의 말을 되내이며 보통의 생활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류지) "잘, 말은 못하겠지만, 내가 살아 있는 한은 우리는 언제까지나 함께야. 내가 요코를 기억하고 있는 한, 너는 내 마음속에서 살아 있을 거야. 그거 믿지?"
(요코) "응."
(류지) "믿을 수 있지?"
(요코) "응."
(류지) "그럼 요코는 내 안으로 이사하는 거야. 그뿐이야."
<본문, p337>
어쩌면 <파일럿 피쉬>와 이 책은 연작이라고도 볼 수 있다. <월간 발기>의 편집장이라는 것과 방향치 등의 인물 설정이 같기 때문이다. 대신 <파일럿 피쉬>에서는 40대의 류지를, 그리고 이 책에서는 30대의 류지를 그리고 있다는게 다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두 작품 모두 상실과 기억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문득 떠오르는 작가가 한명 있다. 바로 『상실의 시대』의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그러나 하루키가 다루고 있는 그것은 무겁고 평범하지 않은 것이라면, 오사키 요시오가 말하는 상실과 기억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뜻 생각해보면 상실과 기억은 정반대의 말 같지만, 알고보면 이음동의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상실한 후에는 반드시 기억이 뒤따른다. 상실감은 금방 잊혀지지만 기억은 오래 남는다.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상실의 아픔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사랑에 대한 상실감은 잊은지 오래인 것 같은데, 그 기억들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다. 자신은 잊더라도 자신과 함께 바라본 바다의 색깔은 잊지 말아달라고 했던 요코의 말도 그런 뜻이 담겨 있었던 게 아닐까? 사실은 자신을 오래동안 기억해 달라는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이런 계절이면, 그런 기억들이 떠올라 괜히 우울해지기 마련이다. 정말 가을이랑 잘 어울리는 책이다. 덕분에 책을 핑계로 우울한 마음을 털어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