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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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이 겪는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강렬한 것이지만 흔해빠진 '죽음'! 

   아마도 이것이 『에브리맨』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의 운명일까요?​ 이미 읽은 책인데 이 소설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주인공도 떠오르지 않고,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Everyman, 즉 '보통 사람'이 겪는 흔해빠진 일이기 때문일까요?


   『에브리맨』은 한 남자의 장례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황폐한 공동묘지에 있는 무덤 주위에는 그의 옛 동료들과 가까운 가족들이 모여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딸 낸시가 모인 사람들을 향해 이 공동묘지가 가족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버지를 왜 이 곳에서 묻었는지 설명합니다. 형 하위가 어린 시절의 '그'가 어땠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마지막을 맞이하게 됐는지 추억합니다. 비록 생전에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의 두 아들들도 그의 무덤에 흙을 보탭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특별한 일이란 없습니다. 보통 장례식이란 이런 풍경으로 진행되는 것이니까요.


   그것으로 끝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들이 모두 하고 싶은 말을 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또 물론 그렇기도 했다. 그날 이 주의 북부와 남부에서 이런 장례식,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례식이 오백 건은 있었을 것이다. 두 아들 때문에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간 삼십 초, 그리고 죽음이 발명되기 이전에 순수하게 존재했던 세상, 아버지가 창조한 에덴, 구식의 보석상이라는 탈을 쓴 폭 5미터 깊이 12미터밖에 안 되는 크기의낙원에서 이루어지던 영원한 삶을 하위가 아주 공을 들여 정확하게 되살려낸 것 외에는 다른 여느 장례식보다 더 흥미로울 것도 덜 흥미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다. (p.22~23)


   "모두들 한 번쯤은 백 년이 지나면 지금 지구상에 살아 있는 사람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p.173) 겁니다. 누구나 태어나면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은 그렇게 흔해빠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눈 앞에 닥치기 전까지는 아무도 실감하지 못합니다.

   주인공인 "그"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몇 번의 수술 끝에 그는 심장 옆에 제세동기라는 이물질을 달고 살게 됐습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여자와 사랑에 빠질만큼 매력적이고 자신감 넘쳤던 그의 남성성도 발산하지 못한지 오래입니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병에 걸리고 세상을 떠나자 그 역시 '죽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진행되었다. 이제 한 해도 입원 없이 지나가지 않았다. 장수한 부모의 아들이고, 토머스 제퍼슨 고등학교에서 공을 들고 뛰던 때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건강해 보이는 여섯 살 위의 형을 둔 동생이었지만, 그는 아직 육십대에 불과한데도 건강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몸은 늘 위협을 당하는 것 같았다. 그는 세 번 결혼을 했고, 애인들과 자식들과 성공을 안겨준 흥미로운 일자리를 가졌지만, 이제 죽음을 피하는 것이 그의 삶에서 중심적인 일이 되었고 육체의 쇠퇴가 그의 이야기의 전부가 되었다. (p.76)


   그는 별난 사람도 아니었고, 일그러진 사람도 아니었고, 어떤 식으로든 극단적인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합리적이고 인정이 많았으며, 친화력이 있고, 온건하고, 근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은퇴 이후에 그가 맞이한 삶은 상당히 쓸쓸합니다. 갑자기 심장마비가 와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하지 않고 그저 아픈 몸을 기댈 수 있는 가족 하나 없습니다. 언제봐도 사랑스러운 딸 '낸시'와 믿음직스러운 형 '하위'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 곁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수술실로 혼자 들어갑니다.


   그는 이른 아침 혼자 차를 몰고 병원으로 가서 수술 층의 유리로 둘러싼 대기실에서 병원 가운을 입은 다른 남자 열인가 열두 명인가와 함께 기다렸다. 모두 그날 같은 시간에 여러 곳에서 진행될 첫 수술을 받을 사람들이었다. 대기실은 아마 오후 네시까지도 이렇게 꽉 찰 터였다. 환자들 대부분은 반대편 끝으로 나오겠지만, 몇 주에 걸쳐 몇 명은 나오지 못할지도 몰랐다. (p.73)


   그렇게 그는 수술을 받았고, 다시 깨어나지 못합니다. 『에브리맨』은 한 남자의 장례식으로부터 시작해 그의 장례식에서 끝납니다. 이야기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다소 서늘하지만 잔잔하게 흘러갑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해.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p.83) 그렇습니다. 죽음을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저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요.

   『에브리맨』의 주인공은 '그'로만 지칭될 뿐 이름이 없습니다. 그저 '보통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처럼요. 그래서 이름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그'처럼 잊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 우리도 『에브리맨』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됩니다. 참 서늘하고 섬뜩한 소설입니다.


   그가 알게 된 것은 삶의 종말이라는 피할 수 없는 맹공격이 가져온 결과 전체와 비교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긴 직장생활 동안 사귄 모든 사람의 괴로운 사투를 알았다면, 각각의 사람들의 후회와 상실과 인내가 담긴, 공포와 공황과 고립과 두려움이 담긴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알았다면, 이제 그들이 떠냐야 할 것, 한때 그들에게 생명과도 같았던 그 모든 것을 알았다면, 그들이 체계적으로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알았다면, 그는 하루 종일, 또 밤늦도록 계속 전화기를 붙들고, 전화를 적어도 수백 통은 해야 했을 것이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p.162)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강렬한 일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정말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단 삶을 맛보고 나면 죽음은 전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삶이 끝없이 계속된다고 생각해왔지요. 내심 그렇게 확식했습니다. (p.175)

그가 알게 된 것은 삶의 종말이라는 피할 수 없는 맹공격이 가져온 결과 전체와 비교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긴 직장생활 동안 사귄 모든 사람의 괴로운 사투를 알았다면, 각각의 사람들의 후회와 상실과 인내가 담긴, 공포와 공황과 고립과 두려움이 담긴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알았다면, 이제 그들이 떠냐야 할 것, 한때 그들에게 생명과도 같았던 그 모든 것을 알았다면, 그들이 체계적으로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알았다면, 그는 하루 종일, 또 밤늦도록 계속 전화기를 붙들고, 전화를 적어도 수백 통은 해야 했을 것이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p.162)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강렬한 일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정말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단 삶을 맛보고 나면 죽음은 전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삶이 끝없이 계속된다고 생각해왔지요. 내심 그렇게 확식했습니다.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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