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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여기 두 가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첫 번째 이야기 입니다. 1970년대 후반 인도 정세가 나빠지자 인도 폰디체리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파이의 아버지는 가족들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기로 합니다. 그들은 미국 동물원에 팔 동물들을 화물선에 함께 싣고 태평양을 건넙니다. 그런데 배가 침몰하고 파이 혼자 구명보트에 남게 됩니다.
배가 가라앉았다. 괴물이 내는 금속성 트림 같은 소리가 났다. 물건이 수면 위로 쏟아져 나오더니 사라졌다. 모든 게 비명을 질러댔다. 바다며 바람, 내 마음까지. 구명보트에서 보니 물속에 뭔가가 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리처드 파커,너니? 잘 보이지 않아. 아, 빗줄기가 멈추었으면! 리처드 파커? 리처드 파커니? 그래, 너구나!"
그의 머리가 보였다. 리처드 파커는 수면에 떠 있으려고 버둥거렸다.
"예수님, 성모님, 마호메트님, 비슈누님! 널 만나서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 리처드 파커! 포기하지 마, 제발. 구명보트로 와. 호루라기 소리 들리니? 휘이이! 휘이이! 휘이이! 제대로 들었구나. 헤엄쳐. 헤엄치라구! 넌 헤엄 잘 치잖아. 삼십 미터도 안돼." (p.128)
바다 위에 떠있는 리처드 파커를 발견한 파이는 반가운 마음에 리처드 파커를 구명보트에 태웁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내 좌절합니다. 비록 어릴 때부터 동물원에서 키우긴 했지만 '리처드 파커'는 벵골 호랑이이기 때문입니다. 배가 고프면 언제 맹수의 본성을 드러낼지 모릅니다. 게다가 이 구명보트에는 이들보다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생명체가 있었습니다. 비록 벵골 호랑이보다 덩치는 작지만 좀 더 야비한 하이에나 입니다. 이 구명보트에 아무도 타지 않았던 이유는 이 하이에나가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 한 마리와 오랑우탄도 있습니다. 아무리 30명 이상 탈 수 있는 구명보트라고 하지만, 이렇게 다른 생명체들이 함께 공존하기에는 위험한 곳이긴 합니다.
호랑이와 하이에나, 두 마리의 맹수 덕분에 파이는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게 됩니다. 비록 지금은 호랑이가 배멀미 때문에 꼼짝도 않고 누워있기는 해도, 당연히 하이에나가 호랑이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배가 너무나도 고팠던 하이에나는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을 먼저 공격하고, 그 다음에는 오랑우탄을 해치웁니다. 하지만 결국 호랑이에게 일격을 당해 그 또한 뼈도 못 추리게 됩니다.
호랑이와 파이 외에는 더이상 먹잇감이 남지 않게 되자 파이는 물고기를 잡아서 호랑이에게 주고, 바닷물을 증류하고 빗물을 받아 호랑이의 갈증을 해결해 줍니다. 호랑이가 힘들어 하는 배멀미까지 적절히 이용해 호랑이를 길들이기 시작합니다. 덕분에 호랑이는 아무리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도 자신에게 먹이를 제공해주는 파이를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파이는 구명보트 안에서 호랑이와 동거하며 227일을 버팁니다. 온갖 죽을고비를 넘기며 겨우 멕시코에 도착하자마자 호랑이는 밀림으로 사라집니다.
내가 쳐다본 그 순간, 리처드 파커는 내 몸 위로 뛰어올랐다. 말할 수 없이 활기찬 그의 몸이 내 머리 위로 쭉 뻡은 모습은, 털 달린 무지개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는 물 속에 떨어졌다. 뒷다리를 벌리고 꼬리를 꼿꼿이 세운 채, 물속에서 몇 걸음 뛰어 해안에 닿았다. 그는 왼쪽으로 가서 젖은 모래를 앞발로 파다가 곧 마음을 바꾸어 몸을 휙 돌렸다. 그는 오른쪽에 있는 내 앞으로 똑바로 지나갔다.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몇 미터쯤 해안을 뛰더니 방향을 돌렸다. 균형을 잡지 못해 뒤뚱뒤뚱 걸었다. 리처드 파커는 몇 차례 넘어졌다. 밀림이 시작되는 곳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그가 내 쪽으로 방향을 틀 거라고 확신했다. 날 쳐다보겠지. 귀를 납작하게 젖히겠지. 으르렁대겠지. 그렇게 우리의 관계를 매듭지을 거야. 그는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밀림만 똑바로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더니 고통스럽고, 끔찍하고, 무서운 일을 함께 겪으면서 날 살게 했던 리처드 파커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내 삶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p.352~353)
화물선의 침몰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파이를 찾았던 일본 운수성 사람들은 파이의 이야기를 믿지 않습니다. 좀 더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서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여기서부터 다음 *까지는 스포일러 주의구간입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들은 다음 *까지 건너뛰어 주세요.
배가 침몰하자 파이는 어머니와 함께 구명보트에 탑니다. 이 구명보트에는 다리를 다친 어린 선원 한 명과 요리사도 있었습니다. 요리사는 그냥 두면 상처가 더 깊어질테니 부상 당한 선원의 다리를 잘라내자고 합니다. 파이와 어머니도 다리를 절단하는 요리사를 도와주게 됩니다. 그런데 선원은 죽고, 요리사는 선원의 상처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선원의 다리를 낚시 미끼로 사용하기 위해 잘라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미끼로 사용하기 위해 발라낸 살점을 먹기까지 합니다. 그 다음에는 당연히 파이와 어머니가 요리사의 타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머니는 파이를 살리기 위해 요리사에게 달려들어 죽음을 당하고 파이는 요리사를 죽입니다.
"그럼 말해보세요. 어느 이야기가 사실이든 여러분으로선 상관없고, 또 어느 이야기가 사실인지 증명할 수도 없지요. 그래서 묻는데요,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어느 쪽이 더 나은가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요.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요?"
오카모토 : "그거 흥미로운 질문인군요……."
치바 :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요."
오카모토 : "그래, 동물이 나오는 쪽이 더 나은 이야기 같아요."
파이 파텔 : "고맙습니다. 신에게도 그러길." (p.39)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주자 너무나도 끔찍한 이야기에 일본 운수성 사람들은 차라리 첫 번째 이야기를 믿겠다고 합니다. 만약 당신이라면 어떤 이야기를 선택하겠습니까? 믿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간이 야성이 들끊는 맹수를 길들이며 227일을 견딘 이야기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살기 위해 인간다움까지 저버리며 야만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일본 운수성 사람들은 그래도 인간이 인간답기를 원했을지 모르겠지만, 요즘처럼 하루가 멀다하고 '악'한 사람들이 뉴스에 등장하는 때라면 오히려 두 번째 이야기를 더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파이 이야기』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실은 어떤 이야기를 믿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을 향한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도 여행길에서 작가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 노신사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 젊은이는 신을 믿게 될 거요."(p.10)라고 말입니다. 부커상 심사위원장도 "믿음이라는 문제를 창의적으로 탐구한 작품으로, 독자로 하여금 신을 믿게 한다"고 평했습니다.
당신이 어떤 이야기를 믿든, 아니면 신을 믿든 『파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 들일 것인지는 오로지 당신의 몫입니다!
"리처드 파커, 다 끝났다. 우린 살아남았어. 믿을 수 있니? 네게 도저히 말로 표현 못 할 신세를 졌구나. 네가 없었으면 난 버터내지 못했을 거야. 정식으로 인사하고 싶다. 리처드 파커, 고맙다. 내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 이제 네가 가야 될 곳으로 가렴. 너는 평생을 동물원의 제한된 자유 속에서 살았지. 이제 밀림의 제한된 자유를 알게될 거야. 잘 지내기를 빌게. 인간을 조심해야 한다. 인간은 친구가 아니란다. 하지만 나를 친구로 기억해주면 좋겠구나. 난 널 잊지 않을거야, 그건 분명해. 너는 내 안에, 내 마음속에 언제나 있을 거야. 이 쉿쉿 소리는 뭐니? 아, 우리 배가 모래에 걸렸나 보다. 자, 잘 가, 리처드 파커. 안녕.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p.35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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