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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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없는 세상과 시간을 '정리'하는 계산법!

단편소설 「강산무진」, 김훈, 『내일을여는작가』 2006년 봄호 

   개인적으로 김훈 작가의 문장과 이력을 좋아해서 필사(筆寫)를 하면서 김훈 작가의 단편소설들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눈으로 읽는 것과 손으로 읽는 것에는 확실히 차이가 있습니다. 7년 전에 「강산무진」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 느낌을 정리할 수 없었던 탓인지,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었는데 손으로 좀 더 천천히, 좀 더 깊게 읽은 지금은 기록으로 남길 것들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정리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강산무진」은 '오십칠 세의 대기업 이사가 어느 날 갑자기 간암 판정을 받고 주변을 정리한 다음 치료차 아들이 있는 미국으로 떠나는 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작품'(p.365, 해설) 입니다.  

   중저가 의류회사에서 상무로 일하고 있는 주인공 '김창수'는 몸속에서 희미한 구역질 같은 증세가 계속되자 종합검진을 받습니다. 마침 얼마 전에 보험을 가입하면서 받은 검진료 오십 퍼센트 할인권이 있어서 유효기간이 끝나는 날 혈액검사, 소변검사, 허파 MRI 촬영, 위 내시경 검사를 하루 꼬박 걸려서 받고 다음날 PET(양전자방출단층촬영) 검사까지 받습니다. PET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신체부위와 장기 안의 암세포뿐 아니라 암으로 발전할 수 있는 악성변종세포를 정밀히 촬영해내는 첨단장비라고 하는데, 이 검사를 통해 간암 판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의사는 PET는 오진이 없다며, 삼 개월이나 사 개월 후에는 입원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장기투병이 될 수 있으니, 그 안에 주변도 정리하라고 합니다. '우선 일에서 풀려나고, 가족들과 마음을 합치는 것이 가장 중요'(p.318)하다고 덧붙이기도 합니다.

 

   회사 인사부에 전화를 걸어서 퇴직에 관련된 정산사항들을 알아보았다. 겨울용 수출물량이 모두 선적되어 출항했기 때문에 업무상 인계사항은 없었다. 수출대금은 한 달 후에 회사 법인통장으로 온라인 입금될 것이었고, 미수금 독촉은 경리부장의 소관이었다. 회사를 여러 번 옮겨다녀서 내 근무연속은 칠년에 불과했다. 퇴직금은 오천만원 정도였다. 회사에서는 명예퇴직제도를 시행중이었다. 정년이 오 년 미만인 고액 봉급자들이 사표를 제출하면 근속연수에 따른 퇴직금 이외에 정년 때까지의 잔여금여의 반액을 위로금으로 지급하는 제도였다. 말이 좋아서 명예퇴직이지, 고액 봉급자들의 사직을 권고하는 제도였다. 나는 정년까지 이 년이 남았으므로 명예퇴직을 신청하면 위로금 액수는 팔천사백만원 정도였다.

   회사는 8월 말에 전 사원에 대해서 정기 신체검사를 실시했다 회사가 지정한 종합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아야 하는데, 거기서 업무를 추진하기 어려울 정도의 질환이 발견된 사원들은 육 개월간의 대기기간을 거쳐서 해직되었다. 명예퇴직 위로금을 받으려면 정기 신체검사 전인 8월 중순쯤에 사표를 제출해야 했다.

   회사는 연말에 한 번씩 보너스를 지급했는데, 10월 1일 이후에 퇴사하는 사원들은 연말까지 근무한 것으로 인정해서 일 년치 보너스 전액을 퇴직시에 지급했다. 내 일 년치 보너스는 천오백만원 정도였다. 8월 중순에 명예퇴직을 신청하면 일 년치 보너스는 천오백만원 정도였다. 8월 중순에 명예퇴직을 신청하면 일 년치 보너스 천오백만원을 포기하는 대신 명예퇴직 위로금 팔천사백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8월 말 회사 신체검사에서 암이 적발되면 대기발령 상태에서 연말 보너스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명예퇴직 대상자에서는 제외될 것이었다. 8월 중순까지는 두 주일이 남아 있었다. (P.321~323)

 

   간암 판정을 받은 후 주인공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회사로부터 받을 수 있는 퇴직금을 계산하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이 눈 앞에 성큼 다가왔는데, 혹자들 같으면 우울이나 좌절에 빠져 무기력하게 하루를 흘러보낼 수도 있었을텐데 주인공은 그럴 겨를도 없이 '돈' 계산부터 합니다. 그 다음에는, 적금을 해약한 다음 사년 전에 아내와 이혼하면서 미처 다 지급하지 못한 위자료 오천만원을 송금해 줍니다. 증권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주식도 처분합니다. 가능하면 손해를 덜 보는 방향으로 말이죠. 주인공이 죽으면 더이상 돌볼 사람이 없는 어머니의 산소도 없앱니다.

 

   점심 식후 삼십 분에 물약을 먹고 나서 은행에 가서 적금을 해약했다. 내년 3월이면 만기가 되어서 일억원을 받게 되어있는 적금이었다 금년 겨울 전에 입원을 하게 되면 병실에서 적립금을 내기가 번거로울 것이었다. 12월치까지 사 개월분 적립금 이백오십만원을 일시불로 미리 지급하고 12월 31일자로 해약했다. 사 개월치 이백오십만원을 일단 서류상으로 적립했다가 12월 31일자로 해약하면 이자를 제하더라도 지급총액이 오십만원쯤 더 많아진다고 창구 여직원이 계산기를 눌러가며 설명해주었는데, 복잡해서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내년 1, 2, 3월치 적립금과 이자를 제하면 지급총액은 구천육백오십만원이었다. (p.328)

 

   사 년 전에 이혼한 아내의 은행 계좌번호를 적어둔 메모를 잃어버렸다. 지난 봄에 제 어머니의 계좌번호가 바뀌었다고 결혼한 딸아이가 전화를 걸어왔는데, 그때 써놓은 쪽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내와 헤어질 때 아파트는 내 소유로 하는 대신 위자료를 삼억에 합의했었다. 그때, 잔금 사천만원을 지급하지 못했다. 나는 사 년 만기 적금을 들었고, 사 년 후에 만기가 되면 이자를 합쳐서 오천만원을 주겠다고 아내에게 제안했었다. 아내는 내가 차용증서를 써주는 조건으로 동의했다. 메모 쪽지를 찾지 못하면, 딸을 불러서 오천만원짜리 수표를 보내주어야 할 것이었다. (p.329)

 

   저녁때 주식을 처분했다. 전자주와 자동차주였는데, 성장 가능성이 있는 우량주들이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시세차트를 검색했다. 지난 두 달 동안 다소간의 등락이 있기는 했지만 시세는 꾸준히 올랐고 거래물량도 늘고 있었다. 전망이 좋은 주식들이어서 당장 처분하기는 아까웠지만 연말이 되면 어떨지 불안했다. 연말까지는 십팔 주가 남아 있었다. 증권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상담을 요청했다. 주식 총액을 열여덟 덩어리로 나누어서 매주 한 덩어리씩 처분하면 시세의 등락에 따른 위험을 탄력 있게 피해가면서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담원은 말했다. 나는 상담원이 제시한 방법으로 매각을 의뢰했다. 상담원은 매주 주식을 매각하는 요일과 시간을 증권회사의 판단에 맡겨줄 것을 요청했고 나는 수락했다. 매주 매각시점으로부터 사십팔 시간 이내에 대금을 온라인으로 송금하겠다고 상담원은 말했다. 연말 안에 주식은 매주의 시세에 따라서 저절로 처분될 것이었다. (p.329~330)

 

   추석 전에 어머니의 산소를 없앴다. (……) 어머니의 묘소는 공원묘지 맨 위쪽의 여덟 평이었다. 공원묘지에는 소유권 등기가 없었다. 매장할 때 묘지 관리사무소와 임대계약을 맺었다. 임대보증금 천만원에 한 달치 사용료가 삼만원이었다. 사용료는 일 년치를 한꺼번에 온라인으로 보냈다.

   내년 봄 한식까지는 육 개월이 남아 있었는데, 한식 때는 성묘 올 수가 없을 것이었고 결혼한 딸에게 묘지 관리를 맡길 수도 없었다. 유골을 파서 화장하고 묘지는 반납하겠다고 전화했더니 관리사무소에서 화장에 따른 절차를 알선해주었다.

   (……) 돌아올 때 관리사무소에 들러서 묘지값을 정산했다. 임대보증금 천만원 중에서 화장비용과 인부들 노임 이백만원을 제하고 팔백만원을 돌려받았다. 팔백만원에 대한 영수증을 써주었다. 사무소 직원이 매장 때 작성한 임대계약서에 '파기'라는 고무도장을 찍고 영수증을 첨부했다. (p.343~345)

 

   「강산무진」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주인공을 따라서 '돈' 계산을 하게 됩니다. 작가가 디테일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주인공이 받을 수 있는 퇴직금으로 역계산해서 한 달 급여가 얼마인지, 한 달에 적립금을 얼마나 넣어야 4년 동안 1억을 모을 수 있는지. 굳이 읽는 이가 계산하지 않아도 알 수 있도록 모두 적혀있는데도 말입니다.

   주인공의 소식을 딸로부터 전해 들은 미국에 있는 아들이 주인공에게 편지를 보내 오는데, 그 편지 속에도 그만의 계산법이 담겨져 있습니다.

 

   산소에서 돌아온 날 저녁에 아들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편지의 요점은 퇴직금으로 받은 돈과 주식과 아파트를 처분한 돈을 모두 가지고 LA로 와서 미국의 요양시설에 입원하라는 것이었다. 아들은 미국 시민권자이므로 직계가족을 초청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미국의 요양시설은 정부의 지원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환경도 좋을 뿐 아니라 한국에서보다 비용도 싸다고 아들은 설명했다. 또 하루 오십 달러 정도면 한국인 간병부를 고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류를 갖추어 초청 수속을 하는 데 시간이 걸리므로 내가 빨리 결정해줄 것을 아들은 요구하고 있었다. 출국 전에 아파트가 팔린다면 내가 미국으로 가져갈 수 있는 돌은 칠억오천만원쯤이었고 LA에서 주정부가 운영하는 공공요양시설에 입원하게 된다면 그 돈은 결국 아들의 몫이 될 것이었다. 서울에서 입원하면 간병부를 고용한다 하더라도 결혼한 딸은 나의 남은 시간들을 힘들어할 것이므로, 내가 미국으로 가고 돈이 아들의 몫으로 돌아가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p.346)

 

   이렇게 「강산무진」에는 금전적인 '정리'는 나오지만 감정적인 '정리'는 나오지 않습니다. 일곱 개비가 남은 담배를 보며 주인공이 잠깐 지나간 모든 담배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정리'에 해당하지는 않을 것(p.321)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관계에 대한 '정리'도 나오지 않습니다. 의사는 가족들과 마음을 합치는 것이 중요(p.318)하다고 했지만, 가족들은 주인공이 금전적인 '정리'를 하는데만 머리를 합칠 뿐입니다. 아버지의 간암 소식을 들은 아들은 전화 한 통 없이 편지 한 통만 달랑 보내올 뿐이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 아내는 딸을 통해 공항으로 나가겠다고 전해올 뿐입니다. 공항으로 나온 아내는 여러 교인들과 함께 멀찌감치 떨어져서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합니다. 그들이 이혼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아내의 종교 때문이었을 수도 있는데, 그런 주인공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이 "주여, 불쌍한 김창수의 죄를 사하여주시고 그의 앞길을 인도"(p.351)하라며 기도를 합니다. 마치 자기 마음만 편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나마 딸은 마지막 순간에 "아빠"(p.352)를 부르며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닦습니다. 이렇게 「강산무진」은 담담하게 끝이 납니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이렇게 담담하게 주변을 '정리' 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온통 돈 계산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절박한 '정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죽음을 앞둔 자신을 위해서도, 남게 될 가족을 위해서도 말이죠.

 

 

   조선후기 회화 특별전은 제1전시실에서 열리고 있었다. 거기에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라는 산수화가 걸려 있었다. 가로 길이가 팔 미터가 넘는, 긴 그림이었다. 특별전을 위해서 다른 미술관의 소장품을 빌려온 것인데, 그림이 길어서 전시실 칸막이를 걷어냈다고 설명문에 적혀 있었다.

   화가 이인문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림의 제목처럼 팔 미터가 넘는 긴 가로 화폭을 따라서 강산은 끝이 없이 펼쳐져 있었다. 눈으로 본 강산과 꿈에 본 강산, 꿈에도 보지 못한 강산들이 포개지고 잇닿으면서 출렁거렸다. 산들이 잦아지는 골짜기마다 마을이 들어섰고, 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들이 펼쳐졌고, 들판 가장자리에서 다시 산맥이 일어섰다. 윤곽선을 풀어헤친 산맥은 연기처럼 엉키고 또 흩어지면서 허공 속을 흘러갔고, 기진해서 소멸해가는 산맥들이 하늘 속으로 빨려드는 잔영 너머에서 바다는 시작되고 있었다. 바다가 뿜어내는 안개가 먼 잔산들의 밑동을 휘감았고, 그 안개 속에는 내가 모르는 시간의 입자들이 태어나서 자라고 번창했다.

   미열이 올라와서 따스해진 몸이 추웠다. 전시실 안 소파에 앉아서 맞은편 벽에 걸린 그림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훑어보았다. 강산은 피어나서 잦아들고, 또 일어서서 끝이 없었다. 산수화를 눈여겨보기는 처음이었다.

   화가가 이 세상의 강산을 그린 것인지, 제 어미의 태 속에서 잠들 때 그 태어나지 않은 꿈속의 강산을 그린 것인지, 먹을 찍어서 그림을 그린 것인지 종이 위에 숨결을 뿜어낸 것인지 알 수 없는 거기가, 내가 혼자서 가야 할 가없는 세상과 시간의 풍경인 것처럼 보였다. (p.337~339)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했다. 아득하고 가없는 산과 강들이 눈 아래로 흘러갔다. 비행기가 동해에 가까워지자 산과 강이 끝나는 저쪽에서 안개처럼 뿌연 바다가 보였다. 날이 흐려서 바다는 잿빛이었고, 구름을 뚫고 쏟아지는 빛의 다발이 눈 덮인 먼 산들 위에 얼룩무늬를 드리우고 있었다. <강산무진도>는 살아 있는 내 눈 아래 펼쳐져 있었고 그 화폭 위쪽, 산들이 잔영으로 스러지고 바다가 시작되는 언저리에서 새빨간 럭키스트라이크 담뱃갑이 바람에 날리는 환영이 보여싸. (p.352)

 

   금전적인 '정리'를 하면서 주인공은 의사의 권유에 따라 가벼운 산책을 나가곤 하는데, 그때 박물관에 걸려 있는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라는 산수화를 보게 됩니다. 가로 길이가 팔 미터가 넘는, 두루마리 그림으로는 가장 긴 그림인데 화가의 시선이 천지간을 정처없이 떠돌며 시간과 공간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면서 끝없는 산천의 전개와 운동, 시간의 운행 사이사이에 해운 어로 하역 농경 주거의 풍경을 묘사(p.338)한 것이라고 각주가 달려 있습니다. 그 <강산무진도>를 보면서 주인공은 깊은 감동을 받고, 앞으로 자신이 혼자 가야 할 가없는 세상과 시간의 풍경과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앞두고 있는 그가 '가없는' 세상과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강산무진」은 허탈하고 비정합니다. 세상과 시간은 '가없는'데 그의 세계에서는 그 끝이 보입니다. 그동안 열심히 벌고 모았는데, 결국 가족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어야 합니다. 익숙한 공간에서 낯선 공간으로 혼자 버려지게 될 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생각만해도 마치가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눈앞이 캄캄한데, 주인공은 오히려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어서 더 슬프고 허무하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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