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향기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누구에게나 하나쯤 비밀스러운 유년의 기억이 있다!

연일 불볕 더위가 이어지는 한여름, 밤 조차 더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어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는게 요즘이다. 점심을 먹은 후 시원한 선풍기 바람 아래에 누워 있으면 노곤노곤 잠이 밀려온다. 보통 때라면 그렇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몸도 마음도 개운해 지기 마련인데, 요즘은 그렇게 자고 일어나도 또다시 늘어져서 잠들고만 싶다.

에쿠니 가오리, 그녀의 단편소설들이 딱 그런 느낌이다. 한여름에 나른하게 밀려오는 낮잠 같은 느낌 말이다. 그녀의 단편들들을 살펴보면 뭔가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일상 속에서 흘러가는 정도의 사건만 있을 뿐이다. 요즘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파격적인 소재, 기발한 상상력, 섬뜩한 반전 따윈 도통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 그래서 오히려 말랑말랑하게만 느껴지는 이 이야기가 오히려 중독성은 강한가 보다. 너무 말랑말랑해서 밋밋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큰 부담감 없이 또다시 찾아 읽게 된다. 더위 때문에 깊이 잠들지 못해서 확 개운해지는 맛은 없지만 그래도 쉽게 깨지지 않는 달콤한 낮잠처럼 그녀의 단편도 딱 그렇다.

한여름의 나른한 낮잠과 더욱 잘 어울릴 것 같은 제목의 소설집 『수박 향기』. 이 소설집에는 각기 여름과 관련된 비밀스런 기억을 간직한 11명의 소녀가 등장한다. 어느 날 문득 소녀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부모님은 물론이고 친한 친구에게 조차 말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한다. 에쿠니 가오리는 이런 일련의 비밀스런 기억들은 유년 시절에 누구나 하나쯤 간직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에쿠니 가오리의 글은 높낮이가 없다. 옆에서 나지막히 이야기를 읊조리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녀의 글을 읽고 있는 사람도 덩달아 읊조리게 만든다. 스스로 유년의 기억을 더듬게 만들고, 나 자신도 그런 기억 하나쯤 가지고 있다고 살짝 고백하게 만든다.

나는 신칸센을 싫어한다.

질서 정연한 차량 안의 모습도, 어쩐지 현실감이 없는 안내방송도, 수레를 밀며 군것질거리를 파는 여자의 유니폼도. 깨끗하고 커다란 창문, 반질거리게 닦인 은색 창틀, 멋대가리 없는 옷걸이, 그 허술한 커튼 따위도. (p.81)

또 그녀는 아주 사소한 일상 혹은 사물도 특별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예를 들면, 목욕 같은 것이 있다. 그녀의 소설을 읽다보면 곳곳에서 그녀가 목욕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녀는 몇 시간 동안 욕조에 몸을 담그고 그 시간을 즐기는 행위를 참 예쁘게 그려낸다. 자신이 좋아하는 목욕을 곳곳에서 언급했듯이,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도 일상 속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만들어 준다. 주인공들이 좋아하는 것은 아주 다양하다. 완전 동그란 구슬이 아닌 납작한 구슬도 있고, 종이비누도 있다.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반대로 싫어하는 것도 있기 마련. 매미 소리만 들으면 눈앞이 어질어질해 지기도 하고, 질서 정연한 차량 안의 모습이 싫어서 신칸센을 싫어하기도 한다. 주인공들이 어떤 대상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이 에쿠니 가오리가 그려내기 시작하면 뭔가 의미있는 것이 되어버린다.

『수박 향기』는 요즘처럼 더위를 잊을 수 없는 한여름에 부담없이 읽기에 딱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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