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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5월
평점 :
키냐르가 글을 썼던 이유는 글만이 침묵을 지키며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솔직히 이야기하면, 이 책은 다소 어렵다. 에세이와 동화가 한데 섞여있고, 그 위에 철학적인 이야기도 보태어 졌다. 어떤 이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읽는 것 같으면서도, 또 철학적인 사유가 필요한 신화를 읽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소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도록 어설프게나마 소개해 보자면 이렇다.
이 소설은 「아이슬란드의 혹한」,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메두사에 관한 소론」이라는 각기 다른 성격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첫 번째 장인 「아이슬란드의 혹한」에서는 어떤 동화를 쓰게 된 계기를 밝히고 있다. 두 번째 장인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이 그런 계기로 쓰게 된 동화이다. 마지막인 「메두사에 관한 소론」에서는 어린 시절 말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신화를 통해 사유의 깊이까지 함께 보여준다.
메인 테마가 된 동화의 내용을 잠시 언급하자면 이렇다. '디브'라는 마을에 '죈느'라는 젊은 재봉사 청년이 있었다. 그는 바느질 솜씨가 아주 좋았는데, 맞은편 집에 살고 있던 '콜브륀'이라는 처녀가 그를 사랑하게 됐다. 죈느를 너무나도 사랑한 콜브륀은 용기를 내 죈느에게 고백을 한다. 죈느는 콜브륀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전 그녀에게 미션 하나를 던져준다. 콜브륀은 평소 자수 솜씨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그 미션이란 죈느가 가지고 있는 벨트에 수놓인 모티프를 똑같이 재현해 달라는 것이었다. 콜브륀은 죈느와 결혼하기 위해 잠도 자지 않고 모티프를 재현해 내려 했지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울고 있는 콜브륀 집에 길을 잃은 영주가 찾아온다. 영주에게는 죈느의 벨트와 똑같은 것이 있었는데, 콜브륀에게 그 벨트를 주는 대신 '아이드비크 드 엘'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잊지 말아 달라고 했다. 이름 하나쯤 기억하는 것은 아무일도 아니라고 생각한 콜브륀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결혼 후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던 콜브륀은 문득 영주와의 약속이 떠올랐고 그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으나 혀끝에서만 맴돌 뿐 떠오르지가 않았다. 남편을 속였다는 자책감과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불안감 때문에 슬퍼하는 콜브륀을 위해 남편이 된 죈느는 영주의 이름을 알아내러 떠난다. 하지만 영주의 이름을 알아낸 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그 이름을 말하려고 하면 순간 그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몇 번을 되풀이하다가 겨우 아내에게 영주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과 동시에 영주가 집으로 찾아와서 아내에게 자신의 이름을 묻는다. 다행히 아내는 영주의 이름을 이야기 할 수 있었고, 영주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린다.
콜브륀과 죈느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때가 있다. 기억날듯 말듯 혀끝에서만 맴도는 이야기들. 그럴 땐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그렇다. 글쓰기다. 글로 기록해 두면 죈느처럼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몇 번을 왔다갔다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어린시절 두 번이나 자폐증을 앓았던 경험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욕망 때문에, 습관적으로, 의도적으로, 혹은 직업 삼아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나는 생존을 위해 글을 썼다. 내가 글을 썼던 이유는 글만이 침묵을 지키며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p.71) 이 소설 속 동화는 어린시절 경험을 통해 처절하게 느꼈던 글쓰기의 필요성을 고스란히 담아낸 이야기다.
프랑스 아카데미 공쿠르 회장은 "키냐르의 책 한 권을 읽는 것은 다른 책 1000권을 읽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단다. 그 정도로 이 한 권의 책에는 새기고 싶은 구절들이 참 많지만, 그가 전하고자 한 이야기를 이 아둔한 독자는 가슴으로는 받아들였지만 혀끝에서 맴돌기만 할뿐 다시 표현해 내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이다.
2011/03/30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