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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두 남녀의 디지털식 연애편지를 엿보다!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벌써 3년째 여행 중이다. 그는 매일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답장이 온 적은 한번도 없다. 답장이 오는게 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클릭 한번만 하면 편지고 사진이고 보낼 수 있는 때에, 게다가 얼굴 보며 통화까지 할 수 있는 때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편지라니. 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이도 아니고 그저 길 가다가 우연히 만난 여행자에게서 받은 편지에 누가 답장을 할까. 그나마 주소라도 제대로 알려주면 다행일 것이다. 그는 매일 아침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에게 답장이 도착했는지를 묻는다. 그러나 친구의 대답은 3년째 똑같다. "포기해라 그만. 그 동안 한 번도 안 온 편지가 어느 날 갑자기 올 것 같냐?" 그래도 사람이 자존심이 있지, 답장 받으면 여행도 끝이라고 공언했으면 한 장이라도 받고 끝내야하지 않을까?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한 장은진 작가의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이번에는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정기구독을 취소하기 위해 '라이크'라는 잡지사에 이메일을 보낸다. 하지만 구독 취소가 되지 않아 며칠 뒤 또 한번의 이메일을 보내고, 한달 후 또다시 이메일을 보낸다. 다행히 친절한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답 메일을 보낸다. 그녀는 철자를 혼동해 '라이크(like)'사에 보내야 했던 구독취소 메일을 '라이케(leike)'라는 남자에게 보냈던 것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로맨틱한 편지는 아니지만 이 남자 얼마나 친절한가. 그로부터 9달 후 그녀는 또다시 '라이케'라는 남자에게 신년인사를 담은 단체 메일을 잘못 발송한다. 친절한 이 남자는 이번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녀에게 알려준다.
그들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잘못 보낸 메일에 답 메일을 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메일만을 주고 받는 서로에게 흥미를 느끼며 어떤 사람일까를 궁금해 한다. 하지만 그녀, 그러니까 에이미는 이미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여자로 서로의 실제 모습을 궁금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보통의 연인들이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를 이메일을 통해 정말 짜증나도록 한다. 그 밀고 당김이 얼마나 짜증날 정도냐 하면, 차라리 그냥 책을 덮고 싶을 정도다. 그 정도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소모적이다.
또 이것이 바로 디지털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며칠을 기다려야 답장을 받을 수 있는 편지는 쓸 때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들여 쓰고, 읽을 때도 가슴 졸이며 읽어야 한다. 그러나 이메일은 그 옛날 주고받았던 편지와는 달리 모든 것이 싫다. 쉽게 지웠다 다시 쓸 수 있으며, 주고 받는 것도 간단하고 빠르다. 그러니 이메일을 통해 주고받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소모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3년째 여행을 하며 편지를 쓰고 있는 그 남자는 단 한 사람뿐일지라도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줄 사람이 있다면 생은 견딜 수 있다고 한다. 에이미와 레오도 마찬가지다. 비록 직접 만나고 서로를 만져볼 수는 없지만 그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대답해 줄 상대가 있기 때문에 생이 견딜만할 뿐만아니라 즐겁기까지 하다.
하지만 에이미와 레오의 즐거움은 레오가 이메일 주소를 바꾸면서 중단된다. 물론 두 사람이 주고 받았던 이메일로만 이뤄진 소설 또한 끝난다. 그 후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그걸로 끝이었을까? 그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살짝 귀틈해 주자면, 에이미와 레오의 뒷이야기가 담긴 책이 『일곱번째 파도』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전편보다 나은 후속편을 만나기는 어려울테지만, 그래도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찾아보길. 나는 그들의 소모적인 이야기가 짜증나서 이쯤에서 그 궁금증을 접는다.
2011/03/29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