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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비 독살사건 - 여왕을 꿈꾸었던 비범한 여성들의 비극적인 이야기
윤정란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정치적으로 독살당한 7명의 왕비들!
이덕일은 조선 왕 4명 가운데 1명이 독살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선 왕비가 독살당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나마 잘 알려진 장희빈도 독살이 아닌 사사된 것이다. 『조선 왕비 독살사건』은 그동안 조선 왕, 조선 선비의 독살 사건을 다뤘던 이덕일이 아닌 윤정란이라는 여성 저자가 쓴 것이다. 조선 왕이나 선비 같은 경우에는 독살 당한 배경과 방법에 관심이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건보다는 독살 당한 왕비가 누구인가가 더 궁금했다. 즉, 그만큼 왕비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는 것이 된다.왕이라고 하면 이름도 줄줄이 꿰고 있고, 대충이라도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도 안다. 반면에, 왕비는 누가 누구의 왕비였는지도 모를 뿐더러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훨씬 많다. 독살 당한 왕비들도 그러하지만, 늘 뒤에 가려져 있을 수 밖에 없는 조선 왕비 그 자체가 안타깝다.
폐비 윤씨와 희빈 장씨의 죄목은 '시기'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였다!
저자는 7명의 조선 왕비를 소개하며, 그녀들이 정치적으로 독살 당했다고 말한다. 그녀들은 왜 정치적으로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을까. 한번 살펴보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왕비는 소혜왕후 한씨다. 소혜왕후는 성종의 어머니이자 연산군의 할머니다. 그 유명한 폐비 윤씨 사건의 주역인 인수대비, 그녀가 바로 소혜왕후인 것이다. 그녀는 세조가 총애하는 며느리였지만, 남편인 덕종이 일찍 죽는 바람에 왕비의 자리에 앉을 수는 없었다. 남편이 일찍 죽은 왕후들은 으레 아들을 통해 절대 권력을 얻길 원한다. 소혜왕후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조의 뒤를 이어 시동생인 예종이 즉위했지만, 예종은 어린 아들만 남겨두고 13개월 만에 죽은 것이다. 예종의 아들이 너무 어린 탓에 정희대비는 소혜왕후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을 왕위에 앉힌다. 그가 바로 성종이다. 성종이 13세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희대비가 수렴청점을 해야했지만 정희대비는 며느리 소혜왕후가 글을 안다는 이유로 권력을 넘긴다. 그때부터 소혜왕후는 아들인 성종을 통해 절대 권력을 꿈꾼다. 그러나 그녀는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자신이 폐위시킨 뒤 사사까지 해버린 윤씨 때문에 발목을 잡힌다. 연산군은 비록 할머니이긴 하지만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소혜왕후를 용서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쿠데타를 일으켜 왕권을 잡은 할아버지 세조 때문에 왕권에 대한 정당성이 약했는데, 폐비 윤씨 사건으로 인해 자신은 죄인의 아들이 된 것이다. 연산군 또한 절대 왕권을 꿈꿨다. 그래서 자신의 왕권에 도전한 소혜왕후를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연산군이 횡포를 부리고 난 뒤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소혜왕후는 한달만에 죽었다.
두번째로 등장하는 왕비는 폐제헌왕후 윤씨다. 그녀는 성종의 첫번째 왕비인 공혜왕후가 병으로 죽자 왕비로 책봉돼 4개월만에 훗날 연산군이 된 융을 낳았다. 힘없고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던 윤씨가 후궁이 되고 왕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신숙주의 사촌 조카였기 때문이다. 예종이 죽자 후계자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정희왕후와 신숙주가 정치적인 주도권을 잡기 위해 결탁하게 되고, 그 신숙주를 배경으로 윤씨가 왕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왕비가 된 윤씨는 같은 이유로 폐비가 됐다. 성종은 융을 낳은 윤씨가 조정 신하들과 결탁해 자신의 권력을 넘보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윤씨의 죄목은 '투기'였지만 실제 죄목은 왕의 권력을 넘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p.102)
인목왕후는 19세에 50세가 된 선조의 왕비로 책봉됐으며,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낳았다. 이미 광해군이 세자 물망에 올라 있었지만, 선조는 후궁 출신의 광해군보다는 적자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싶어했다. 그 와중에 선조가 죽은 것이다. 광해군은 역모 사건을 조작해 영창대군을 죽였고, 대비가 된 인목왕후 또한 쫓아내려 했다. 아들을 잃은 인목대비는 복수의 칼만 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났고, 그녀는 반란군에게 광해군의 목을 가져오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인조가 즉위해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그들은 정략적으로 필요할 때만 인목대비의 존재를 인정했다. 아무런 정치 기반이 없었던 그녀는 광해군 때뿐만 아니라 인조가 즉위한 후에도, 그녀가 죽은 후에도 역모와 관련된 구설수에 올랐다.
광해군부인 유씨는 남편인 광해군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할 수 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명으로부터 인정받은 세자도 아니었고, 선조의 적자도 아니었다. 유교적으로 볼 때 광해군은 절대 정당성을 가질 수 없는 왕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속을 믿기 시작했고, 사대부의 이념을 거부한 왕과 왕비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광해군의 왕비였기 때문에 비록 그와 노선을 달리한다고 해서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알았다는 듯이, 후생에는 왕실의 여인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빌기도 했다.
소현세자빈 강씨 또한 왕위를 넘본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녀의 남편 소현세자는 인조의 첫째 아들로, 청나라와의 전쟁에 패해 북경으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소현세자는 눈을 뜨게 되고 선진문물을 익히고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또, 인조가 지원을 해주지 않아 형편이 어려웠던 강씨는 장사를 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들이 오랜 인질 생활을 끝내고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환영했지만 유독 인조만은 그들을 보는 눈빛이 사나웠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왕권을 넘볼가봐 겁이 났고, 마침 귀국하고 얼마있지 않아 소현세자가 죽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였다고 주장한다. 강씨 또한 마찬가지다. 인조가 전복구이를 먹다가 독을 발견했는데 그 범인으로 강씨가 지목된 것이다. 인조는 강씨가 권력을 넘보기 위해 세력을 기른다고 생각했고, 여러 차례의 사건을 조작한다. 누명을 쓴 강씨는 결국 사사됐다. 강씨는 단지 인조의 '추측'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를 시기한 죄로 사사됐다. 그러나 그녀가 사사된 이유는 천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양반과 양인에게는 과거를 볼 기회가 주어졌지만, 천인은 응시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천인 출신인 희빈 장씨가 왕비가 된 것이다. 백성들은 천인이 왕비가 되는 세상이니 자신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질 거라며 환영했지만, 사대부들은 달랐다. 자신들의 기반인 신분제가 흔들린다고 생각한 그들은 희빈 장씨를 사사하기에 이른다.
명성왕후 민씨는 아무런 지지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대원군에게 간택됐다. 대원군은 철종이 외척인 안동 김씨에게 휘둘리는 것을 보고 아버지와 남자 형제가 없는 민씨를 고종의 왕비로 맞아들였다. 정치적인 기반이 없어 늘 불안했던 민씨는 스스로 그 기반을 만든다. 남편 고종에게 왕비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고종의 든든한 배경이 되기도 했다. 대원군이 자신을 위협하면 외세의 힘을 빌려서라도 탄탄히 지키려 했다. 그러나 유교 사회에서 남성보다 여성이 우월하면 안된다. 소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 나라의 국모가 일본 낭인들의 칼에 죽임을 당하는데도 지켜주지 않았다.
7명의 왕비들은 남편과 아들을 통해 절대 권력을 꿈꾸거나 혹은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죄목으로 정치적인 독살을 당했다. 왕은 실정을 하거나 민심을 잃으면 쿠데타로만 끌어내릴 수 있었지만 왕비는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을 잃으면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었다. 만약 그녀들이 든든한 정치적인 후원이나 당시 권력을 쥐고 있는 왕과 신하들과 함께 했다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인조 때는 세자빈으로 간택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실성한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했으며, 광해군 유씨는 후생에는 왕후로 태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 그만큼 조선 사회에서 왕의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시대적 이념 혹은 정치적 이유 때문에 평가 절하된 역사가 있다면 반드시 재조명 돼야 할 것이다.
09-95. 『조선 왕비 독살사건』 2009/07/19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