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안개 속에 감춰진 진실과 마주할 용기를 위해!
   책을 덮은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도 내 가슴은 먹먹하기만 하다. 제목 그대로 먹먹함의 도가니에 빠져 있다. 책을 읽기 전 결말이 좀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쓴 연애소설을 읽은 이후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그녀의 작품을 읽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 불편의 정도를 가늠조차 하지 못한채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몇 장 읽지 않았는데도 어슴푸레한 것들이 전해오기 시작했다.

   『도가니』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등장하는 무진시(霧津市)가 배경이다. 사업에 실패한 강인호는 아내의 친구 소개로 사립학교 기간제 교사 자리를 얻는다. 청각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애 학원은 안개로 둘러싸인 무진시에 있다. 게다가 마을에서도 떨어져 있어 자애학원은 마치 고립된 하나의 거대한 성채 같았다. 안개가 내리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한들 외부에서는 전혀 알 길이 없을 터였다.(p42) 바로 그곳에서 학교 교장과 행정실장, 생활지도교사 등이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상대로 성폭력과 폭행을 일삼았다.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아이들은 외부와 단절된 학교 안에서 무참하게 유린당했지만, 제대로 듣고 말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눈과 귀를 모두 닫아버린다.
   소설에는 두 편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한 편은 아이들의 편에 써서 진실을 밟히고 아이들을 짓밟았던 사람들을 처벌하려는 사람들이고, 또 한 편은 아이들을 짓밟았던 사람들 편에 서서 진실은 외면한채 현 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언론은 물론이고 법정에서까지 그들의 죄상이 밟혀졌지만, 그들은 죄의 대가를 받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알았지만, 힘없는 자들의 편에 서서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잃고 싶어하지 않았다. 또, 오랫동안 자신들이 살아왔던 무진시가 불명예를 안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상처받은 아이들의 치유를 위해 그 모든 것들을 바꿀 수는 없었던 것이다.
   소설 속 아이들이 유린당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먹먹했고, 또 그 엄청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결국 면죄부를 받았다는 것에 먹먹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먹먹했던 것은, 그 모든 것이 현실감이 떨어지는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자행되고 있는 현실 말이다.

   왜 하필 그녀는 무진시를 배경으로 설정했을까? 궁금한 마음에 첫장만 읽고 책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오래 전에 읽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다시 펼쳐 들었다. 『도가니』를 읽으면서 무진시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뿌옇게 도시를 감싸고 있는 안개 때문에 그들은 진실을 바로 마주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은폐하기도 쉽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 또한 무진시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불편하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쯤이면 우리는 이 안개를 걷어버리고 진실과 마주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때쯤이면 가슴 속 먹먹함도 가실테지.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다.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가리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외면당하는 데도 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p165)

09-90. 『도가니』 2009/07/07 by 뒷북소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