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잉 - Knowing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취재 갔다가 얼떨결에 무임(!) 관람하게 된 영화다. 만약 이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얼떨결에 보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싫어하는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재난 영화라는 것, 또 하나는 종교적인 것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예정된 인류의 운명, 믿을 것은 오직 종교뿐?
1959년 미국의 한 초등학교. 아이들은 50년 후 지구의 모습을 상상해 그림을 그리고 타임캡슐에 묻는다. 그런데 한 소녀만이 그림이 아닌 숫자로 종이를 가득 채웠다. 50년 후 타임캡슐이 열리고, 아이들은 각자 하나씩 그림을 받는다. 청각 장애가 있는 캘럽이 받은 것은 그림이 아닌 바로 숫자로 가득한 종이였다. 물리학 교수인 캘럽의 아빠 테드(니콜라스 케이지)는 우연히 숫자가 적힌 종이를 보다가 어떤 사실을 알아낸다.
종이에 적힌 숫자는 사고가 일어난 날짜와 사망자수, 그리고 위도와 경도를 의미한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고가 3건! 여느 재난 영화처럼 테드 또한 그 사고를 막아보려 하지만, 이미 예정된 사고를 막을 수는 없다. 특히, 마지막에 일어나는 사고는 특정지역 사람들만 죽는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태양의 증폭으로 지구 전체가 불타는 것이다. 그것은 소행성에 구멍을 뚫어 충돌을 피한 《아마겟돈》처럼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행성으로 이주시킬만큼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인류의 운명인 것이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할까? 정답은 한가지! 그저 종교에 의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테드는 인류의 운명을 알기 때문에 영웅이 되려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캘럽을 지키고자 한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영웅 심리보다는 이런 부성애가 더 설득력있게 느껴진다. 아무튼 캘럽을 지키려고 발버둥치는 테드는 한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전 인류가 죽는다고 해도 자신의 아들만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캘럽은 선택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피하는 길은 현대판 '노아의 방주'에 탑승하는 것뿐. 그런데 이 '노아의 방주'는 단순히 믿음이 있다고해서 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또 메시아의 선택을 받았다고 해서 꼭 따라야하는 것은 아니다. 선택 받은 자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다.
테드는 캘럽을 보낸 후, 그동안 자신이 부정해왔던 아버지를 찾아간다. 목사인 아버지의 믿음을 과학자인 테드는 당연히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마지막엔 그 아버지 품으로 돌아갔다. 결국 의지할 것은 종교뿐이라는 것인가.
숫자의 비밀이 풀리기 전에는 서스펜스적인 요소가 강했지만, 비밀이 풀린 후에는 기존의 재난 영화를 답습하는 것 같았다. 메시아가 등장하면서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띄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에서 눈여겨 볼 것이 바로 결말이라고 했다.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요소를 담고 있는 결말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끝으로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영화라고나 할까.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지하철 사고 장면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고,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봤다.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른 것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의 지하철 참사를 가까이서 지켜본 탓인지, 영화 속 한 장면으로만 보아지지는 않는다.
2009/04/21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