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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3월
평점 :
아주 '하찮은 것들'이라도 취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유명 소설가가 쓴 에세이집을 읽고 그 작가의 작품은 다시 읽고 싶지 않을 정도로 크게 실망한 적이 있었는데, 우연히 소설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역시 소설가는 소설을 읽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늘 예외는 있는 법. 에쿠니 가오리는 여러 편의 소설을 펴낸 소설가이지만, 나는 그녀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더 좋아한다. 그녀의 에세이집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에서는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을 고스란히 닮은 에쿠니 가오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이후 5년만에 나온 에세이집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너무 멋진 제목이 아닌가. 그녀의 섬세한 감성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하다. 그런데 원제는 『하찮은 것들』이란다. 번역판 제목과 원제가 퍼뜩 연결되지 않아 갸우뚱했다. 원래 사람은 이름값을 한다고 아무래도 센스가 부족한가보다. 오로지 '술'에 취하는 것만 생각했던 것이다. 누군가를 취하게 만드는 대상이 달빛과 같은 '사물'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비록 그것이 아주 '하찮은 것들'이라도 말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편애 리스트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에는 에쿠니 가오리가 좋아하는 '하찮은 것들' 60개가 등장한다. 샤프펜슬, 트라이앵글, 목욕, 완두콩밥, 고무줄……. 그녀의 편애 리스트는 너무 평범하고 소박해서 그것들을 왜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꼭 들어야 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이유를 듣고 있다보면 나도 그것이 좋아진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 비싼 술이나 명품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만약 그녀가 그런 것들을 좋아했다면, 나 역시 따라서 좋아지지는 않았을테지만.
에쿠니 가오리는 내가 편애하는 작가 리스트에 있다. 그녀의 신작 소식이 들려오면 일단 사서 읽었는데, 최근에는 내 편애 리스트에 그녀를 계속 둬야할지 고민스러웠던 적이 몇 번 있었다. 나는 그녀가 간결한 문체로 써내려간 이야기를 좋아하지, 결코 짧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짧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내가 그녀에게 반할 수 밖에 없었던 섬세한 감성을 느낄 수 있지만, 좀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곧 있을 <2009 서울국제도서전> 때 그녀가 방한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그녀에게 사인을 받으면서 '좋아하는 말을 써주세요!'라고 말해봐야겠다. 그녀가 과연 어떤 말을 써줄까? 그러기 위해선 일본어 표현부터 익혀야겠군.
어느 날 문득, 지님보다 지니지 않음이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다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필요한 것을 비교적 고루 들고 다닌다고 생각하기보다 아무것도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가뿐하지 않은가. (p22, 「조그만 백」)
"살다 보면 물건이든 사람이든 상처가 나잖아. 피할 수 없는 거잖아. 그보다는 지저분한 것에 신경을 쓰는 편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상처는 없앨 수 없지만, 지저분한 것은 치울 수 있으니까."
"무슨 말씀! 지저분한 거야말로 피할 수 없지. 그리고 치울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 치울 수 있으니까 그냥 놔두는 거야. 하지만 상처는 피할 수 있으니까 조심하라는 거지." (p78, 「상처」)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여행 가방이 있다. 여행 가방은 만사를 알기 쉽게 인식시켜준다. 내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잔인할 정도로 명확하게 알게 된다.
입을 옷 몇 가지와 소소한 화장품, 신발, 매일 두 시간씩 읽어도 끝나지 않을 만한 책, 수첩과 연필, 담배, 약 두 종류, 안약, 치약, 칫솔.
겨우 요거? 할 만큼 적다. 당연한 일이지만 여행할 때의 짐은 제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분량이어야 하고, 또 사실 그 정도만 있어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다. 어디서든. (p83, 「여행 가방」)
책이란 시공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읽는 동안에는 그 세계에 푹 빠져 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꽃이나 잎은 마치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것처럼 기묘하게 보인다. (p97, 「말린 잎 말린 꽃」)
09-49.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2009/04/14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