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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없는 생활
둥시 지음, 강경이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8월
평점 :
작가 이름을 보자마자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東西(Dongㆍxi). 우리식 한자 그대로 풀이한다면 "동쪽 서쪽"이겠지만, 중국어로 풀이하면 "물건"이라는 뜻이다. 그것도 이곳 저곳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소함의 뜻이 강하다. 분명 요시모토 바나나처럼 필명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자주 쓰는 단어라 기억하기 쉽고, 여러 의미를 내포할 수 있기 때문에 필명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예전에 바나나도 그랬다. 누구라도 쉽게 부를 수 있고, 성별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필명을 바나나로 정했다고 말이다. 東西, 처음 보는 작가지만 욕심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
웃음을 자아내는 필명과는 달리 책의 표지를 보면 '차갑다'와 '단절'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입과 귀, 눈을 가리고 있는 세 사람.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높은 벽 너머로 보이는 도시. 읽기도 전에 "언어 없는 생활"이라는 제목만큼 차가운 내용의 책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 없는 생활』은 다섯 편의 중편 「언어 없는 생활」, 「느리게 성장하기」, 「살인자의 동굴」, 「음란한 마을」, 「시선을 멀리 던지다」으로 이뤄져 있다.
표제작인 『언어 없는 생활』은 보지 못하는 아버지와 살고 있는 듣지 못하는 아들이 말하지 못하는 여자와 결혼해 사는 이야기로, 정상인들이 보기에는 절대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정상인들의 차별과 편견 속에서 서로를 보살피며 아들도 낳아 기르지만, 결국 그 벽을 넘지 못해 더 갇혀 살게 된다.
「느리게 성장하기」는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가 불편한 마슝이 어쩌다가 사람들을 구해 주목 받는다는 이야기다. 사람들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기 시작한 그는 자신감을 갖고 한 계단씩 위로 올라가려 하지만 기고만장해진 그에게 돌아온 것은 추락 뿐이다.
「살인자의 동굴」은 이웃집 남자를 살해하고 동굴에 숨은 아들과 그 아들을 보살피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어머니는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아들을 보살피지만, 결국 살해당한 남자의 어머니에게 발각돼 아들은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음란한 마을」은 창년촌에서 나고 자란 치우위가 어머니와 여동생, 정혼녀까지 버리고 고향을 떠나지만 결국 그가 돌아갈 곳은 그토록 더럽다고 생각했던 고향뿐이었다는 이야기다.
마지막 이야기인 「시선을 멀리 던지다」는 게으른 남편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아내가 아들을 잘 키워주겠다는 시누이에게 아들을 맡기지만, 시누이는 아들을 팔아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아들을 찾지만, 여전히 가난한 집을 아들 스스로가 나가버린다.
5편의 중편 모두 행복한 결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떻게든 현실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지만, 제자리 걸음이거나 더 나쁜 결과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작가의 문체는 쑤퉁이나 위화처럼 중국 작가 특유의 해학성으로 철철 넘치지만, 그에 반해 이야기는 지나치게 냉소적이다. 표지에서 느껴졌던 그 차가움이 소설 전반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소통이 사라진 사회에서 고립된 현대인들의 안타까운 자화상'이라는 소개말에 가슴이 철컥내려 앉았다. 아니었으면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진짜 우리들 아니 나 자신의 모습과 같았기 때문이다.
2008/09/21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