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펼치는데는 무려 1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은희경, 유명한 작가지만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단지 그녀의 신간이 나왔고 신간을 사면 그녀의 다른 작품을 함께 준다기에 혹해서 샀을 뿐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문학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고, 이제 슬슬 읽어볼까 하던 참이었다. 게다가 장편은 좋아하지만 단편은 정말 싫어한다. 내가 아는 그녀의 작품들이 모두 장편들이었고 그래서 당연히 장편일거라 생각해서인지 표지에 커다랗게 적혀있는 소설집이라는 텍스트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미안하게도 이 책은 그녀의 또다른 작품과 함께 그대로 책장行이 되고 말았다.
그 1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녀의 작품을 읽을 준비를 했냐고? 그건 아니다. 사실 그녀의 작품을 한번 읽어 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정혜윤의 『그들은 한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를 읽고나서였다. 은희경 작가의 독서기를 읽으면서 어린 시절부터 조숙한 독서를 한 사람의 결과물은 어떨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솔직히 작가에겐 미안할 따름이다. 그녀의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다른 책 때문이라니.


「의심을 찬양함」
배달사고에서부터 시작된 남자와의 만남. 이름도 같고 취향도 비슷한 한 남자와의 계속되는 우연을 그의 쌍둥이 동생은 형의 각본대로 움직인 필연이라며 의심해 보라고 한다.
문득 어릴적 누군가를 우연히라도 만나기 위해 그 주위를 맴돌았던 기억이 떠올라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의심이 꼬리를 물면 더이상 믿을 사람이 없다. 그렇게되면 나만 외로워질 수 밖에.

세상은 그야말로 제멋대로 굴러가요. 더러움과 증오와 한심함으로 가득차 있어요. 솔직히,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 세상이 모두 정밀하게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세요? 그렇다면 나는 아마 각본대로 뛰지 않는 토끼일 거예요. (p. 36)

「고독의 발견」
어린시절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길어지는 아이의 이야기를 읽은 이후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된 K. 고시 준비를 하며 서른여덟번째 생일을 맞이한 K는 한 카페에서 만난 남자로부터 대학생 시절 하숙집 주인이 운영하던 여관을 대신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W시로 향한다. 그곳에서 만난 키작은 젤소미나와 과거의 자신. 젤소미나가 들려준 노래의 가사처럼 그는 과거나 현재나 사람들에게는 낯선 존재, 그러니까 자신에게는 외로운 존재일 뿐이다.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 과연 그 남자를 만난 이후로는 모든 것이 꿈이었을까?

네가 이방인일 때 사람들은 낯선 존재가 된다.
네가 혼자일 때 타인의 얼굴은 모두 추악해 보인다.
아무도 너를 원하지 않을 때 여자들은 모두 사악하다.
네가 힘들 때는 걷는 거리조차 울퉁불퉁하다.
아무도 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네가 낯선 존재일 때, 네가 낯선 존재일 때는. (p.65)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에 문이 있다 ─ 윌리엄 블레이크. (p.71)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카펫이 깔린 이태리 식당에 갔다가 아버지 등뒤의 벽에 걸려있던 보띠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 매혹당한 소년. 자신을 원한 적이 없는 부모로부터 태어났다고 생각한 소년은 자신의 뚱뚱한 외모가 아버지와의 거리를 더 멀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서른다섯번째 생일을 맞이한 그는 비로소 다이어트를 결심한다. 사람들은 그의 실패를 상상했고 그가 다이어트를 하는 이유는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결혼을 하고 싶어서라고 생각했다. 정작 그가 다이어트를 결심한 이유는 죽어가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아들이 되고 싶었던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다이어트를 그만둔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갈망하지만, 결국 아름다움은 우리들과 멀어지려 하고 멸시한다.

「날씨와 생활」
공상하기를 좋아하는 소녀 B. B는 자신이 읽은 책 속 주인공처럼 자신에게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주기를 기대한다. 서울로 전학을 간 B의 학교로 한 남자가 찾아온다. B는 키다리 아저씨를 상상했지만 자신이 읽은 문학 전집의 미수금을 받으러 온 외판원이었다.
아마 책 읽기를 좋아했다면, 아니 소녀라면 빨간 머리 앤처럼 이런 공상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고 작가도 그랬을 것이다.

인생은 얼마나 많은 암호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것일까. (p.119)

「지도 중독」
친구 B는 튀는 것을 싫어하고 그때 그때 대충 적응해서 살며 귀차니스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M을 9번 유형이라고 분류한다. 그런 M이 B의 예상을 깨고 친구 Y가 있는 캐나다로 산행을 떠난다. 사실 M이 산행을 결심한 것은 너라면 꼭 와줄거라는 Y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이다. 이 산행에는 그들의 선배인 P가 함께 했다. 한때 멘사 회원이었던 P 선배는 마치 좌표를 모두 머리 속에 넣기라도 할 것처럼 지도 중독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도 중독인 P 선배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로 가려는 부적응자, 즉 진화론자였고, M은 대충 적응해서 살려는 적응자였다.
그들의 이야기는 나를 뜨끔하게 만들었다. 사실 내가 9번 유형에 어느 누구보다 딱 들어맞는 적응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적응을 너무 잘해서 재미가 없어. 적응만 하면 진화를 할 수가 없지. (p.180)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더이상 아무런 사건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출판사 사장, 더이상 나아지거나 나빠질 것이 없다면 지금처럼 살고 싶어한다.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P를 공항에서 배웅하고 돌아오던 날, 그의 책상에는 「1991년의 코스모나츠」라는 원고 뭉치가 있었고 '우리 약속 잊지 않았죠?'라는 한 통의 메일을 은숙이라는 미지의 여자에게 받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처음 읽는 원고인데 어디서 본 것 같고, 약속을 한 기억이 전혀 없는데 은숙이라는 여자를 아는 것 같았다. 그랬다. 그에게는 더이상 일어날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모두 잊고 살았던 것이다. 유리 가가린이 지구로 귀환하던 때의 기억들을 말이다.
내게도 그런 기억이 분명 존재한다. 기억의 바다 저편에 깔려 있다가 어느 순간 떠오르는 기억들, 우리는 단지 기억하지 못할 뿐인데 그 존재마저 부정하곤 한다.

세상이 그다지 놀랍지 않게 생각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든 언젠가 겪어본 일처럼 여겨진다. 뉴스도 그렇고 주변의 살아가는 이야기도 다 그런 식이다. …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해도 살아오면서 만난 적이 있는 비슷한 누군가와 얼굴이 겹쳐지게 마련이고, 그러면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쉬워졌다. 세상 사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이 어쩌면 틀을 갖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p.187)

하나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어김없이 휑한 바람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해피엔딩도, 반전도 없는 흐릿한 흑백 영화를 본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작가는 항상 이야기의 끝을 분명하게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이야기의 마무리는 읽는 이의 몫이다. 자신은 이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다는듯이 멀찌감치 떨어져있는 그녀가 너무나도 차갑고, 서늘하게 느껴진다.
사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제목은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에서 골라낸 문장이라고 한다. 차가움이 느껴지는 그녀의 이야기와 꼭 어울리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멸시'라는 단어가 풍기는 차가움과 고독함이.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 릴케 (p.226)

2008/08/16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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