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Jimmy Fantasy 2
지미 지음, 백은영 옮김 / 샘터사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어떤 이들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지하철이 복잡하고 답답해서 싫다지만 나는 좋아한다. 어른이 된 지금도 고쳐지지 않는 멀미가 신기하게도 기차나 지하철에서는 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차를 타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낯선 풍경들을 감상할 수 있어서 좋다. 반면에 지하철은 어두컴컴한 배경 뿐이지만 또다른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좌석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서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통화를 하고, 어떤 이는 시험 공부를, 또 어떤 이는 책을 읽는다. 또 어떤 이는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음악을 들으며 흥얼거리기도 한다. TV나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옆 사람과 신나게 수다를 떠는 사람도 있고, 어디에서 내려야 하는지를 몰라서 안내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저마다 다른 모습의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상상에 빠지기도 하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나만의 세계에 빠져 들기도 한다. 혼자라도 전혀 낯설거나 외롭지 않은 곳, 내가 하고픈 일들을 하며 나만의 세계에 빠질 수 있는 곳, 지하철은 바로 그런 공간이다.

   
  천사가 지하철 입구에서 나에게 작별을 고하던 그 해. 나는 조금씩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열다섯 살 생일날 가을 아침, 창밖에는 보슬비가 내렸고, 나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었다.
6시 5분이 되자, 나는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책 속에서)
 
   

하얀 원피스에 빨간 가방과 안경, 노란 우산을 쓰고 있는 한 소녀가 지팡이로 계단을 더듬으며 지하철역으로 내려간다. 소녀는 이름 모를 낯선 정거장을 출발하여 또 다른 이름 없는 낯선 정거장으로 향한다.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는 방향을 잃고 방황하기도 하고, 텅빈 지하철 안에서는 발자국 소리가 적막한 허공을 맴돌아 쓸쓸하기도 하지만 목적지가 없는 어떤 곳을 향해 계속 걷는다. 소녀는 습관처럼 혼자 중얼거리며 보이지는 않지만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것이 내는 소리인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상상하곤 한다. 도시 곳곳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사실은 어디도 가고 싶지 않지만 소녀가 끊임없이 도시를 헤매는 이유는 누군가가 출구에서 소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대만의 '장 자끄 상뻬'라 불리는 지미. 그는 회색빛 도시에 갇혀있는 현대인들의 외로움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지만, 그림 속 주인공들은 전혀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외롭고 쓸쓸한 도시에서 따스함을 찾으려 한다. 차가운 도시에서 따스함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Fantasy"가 아닐까.
지미의 따스하고 몽환적인 그림들은 영상으로 담아지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인 『왼쪽으로 가는 여자 오른쪽으로 가는 남자』(1999)는 금성무 주연의 《Turn Left, Turn Right》(2003)로, 『지하철』(2001)은 양조위 주연의 동명의 영화(2003)로 만들어졌다.  

2008/06/08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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