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각본 살인 사건 - 상 - 백탑파白塔派 그 첫 번째 이야기 백탑파 시리즈 1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1.

'백탑'은 현재 서울 탑골 공원 자리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부르던 것으로, 그 백탑 근처에 살면서 함께 지식을 교류했던 이들을 '백탑파'라 불렀다. 이 백탑파에는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을 비롯해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 서얼이라는 신분 때문에 출사하지 못한 박제가, 유득공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총 출동한 그룹이라 할 수 있다.

김탁환 작가는 이 백탑파들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 추리 소설 시리즈를 기획했으며, 『방각본 살인 사건』은 이 백탑파 시리즈의 첫번째 이야기이다.

 

2.

"따뜻한 필사의 시대를 아십니까?"

김탁환 작가의 또다른 작품인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에 등장하는 메인 카피이다. 책을 읽기 위해 일일이 필사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일찍이 활자 기술이 있었지만, 활자 인쇄는 궁이나 관에서 필요한 책을 찍기에도 바빴다. 당시 유행하던 소설을 읽으려면 필사를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중종 때가 되면 사가에서도 활자 인쇄가 이루어진다. 이것을 '방각본'이라 하며, '방각본' 덕분에 소설이 더욱 활개를 치게 된다.

 

3.

9명을 살해한 혐의로 매설가 청운몽은 능지처참형을 받는다. 그러나 그가 죽은 다음날 똑같은 수법의 살인이 또다시 일어난다. 20살의 금부도사 이명방은 자신이 조사해서 처형한 청운몽의 사건을 다시 쫓기 시작한다. 청운몽은 백탑파 서생들이 아끼던 매설가였다. 사건을 쫓던 이명방은 백탑파 서생들과 인연을 맺게 되고, 꽃에 미친 화광(花狂) 김진의 도움을 받으면서 친구가 된다.

금부도사 이명방은 종친으로 대대로 대가 곧은 집안의 자제였다. 그런 그에게 능지처참형을 당한 매설가 청운몽을 감싸는 백탑파 서생들이 예쁘게 보일리가 없다. 처음에는 오해와 충돌도 있었지만, 차츰 백탑 서생들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고 빠지게 된다.

조선의 이노베이터였던 정조는 백탑 서생들의 재주를 아꼈다. 그러나 그들이 스승이라 여기며 따르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비롯한 소설들을 경계하며 문체반정을 단행한다. 이명방은 자신의 주군인 정조와 영원한 지기임을 믿었던 백탑 서생들 사이에서 갈등한다. 갈등하는 이명방에게 무조건 따르는 것이 충심은 아니라고 조언하는 이도 있다.

과연 충심이란 무엇이며, 고문(古文)과 금문(今文) 중 어느 것을 따라야 할 것인가. 이 고민은 백탑파 시리즈를 통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하잘 것 없는 것, 무색무취한 것, 아름답고 앙증맞은 것. 그게 바로 위험하니라. 딱 부러지게 무엇인가 분명한 입장에 선다면 옳고 그름에 따라 가까이하기도 하고 멀리하기도 하겠으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에서 저도 모르게 빠져들며 끝내는 어긋나 버리는 것, 그게 바로 소품이나 소설에 깃든 병폐인 게다."

(『방각본 살인 사건 (下)』, p. 74

 

4.

김탁환은 매설가이다. 그는 끊임없이 소설과 매설가에 대해 쓰고 있다. 나는 그동안 그의 작품들 속에서 매설가인 서포 김만중이나 연암 박지원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소설을 경계했던 정조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소설을 쓰는 김탁환 작가의 마음을 발견했다.

 

"원래 이 소설이란 놈은 변화무쌍한 이야기로 사람들을 어루만지는 예술이니까요. 이 작은 이야기를 통해 삶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진다면 매설가인 저로서도 큰 행복입니다."

(『방각본 살인 사건 (下)』, p. 148

 

2007/11/12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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