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글을 쓸 때 가벼움으로 쓴다! 내 마음은 티타티티타티다.

프랑스 대표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크리스티앙 보뱅의 소설이 나왔다. 경험상 시인들이 쓴 문장들은 어려웠던 적이 많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칠 수가 없었다.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는데, 첫 문장을 읽고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첫사랑은 누런 이빨을 가지고 있다. 두 살, 두 살 반인 나의 눈 안으로 그가 들어온다. 눈동자를 지나 어린 소녀의 마음속에 슬그머니 스며들어 구멍을 파고, 소굴을 짓고, 은신처로 삼는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시간에도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그 무엇도 그 자리를 대신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 무엇도 그렇게 멀리 내려갈 방법을 알지 못한다. 나는 두 살 때 가장 자랑스러운 연인과 함께 내 사랑의 여정에 발을 내디뎠다. 이후의 연인들은 그 누구도 그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며, 결코 그를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첫사랑은 늑대다. 털과 냄새와 상앗빛 누런 이빨과 미모사 같은 노란 눈, 산처럼 풍성한 검은 털에 노란 별빛의 반점이 있는 진짜 늑대. 9쪽

소녀는 부모님과 함께 떠돌이 서커스단을 따라 트레일러 집에서 살고 있다. 소녀의 첫사랑은 진짜 늑대다. 서커스단의 철창 안에 갇힌 진짜 늑대 말이다. 깊은 밤, 소녀는 스스로 철창 안으로 들어가 늑대 품에 안겨 잠이 든다. 늑대 우리 안에서 소녀를 발견한 사람들은 경악하지만 늑대까지 깨울까 봐 소녀가 잠에서 깰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 늑대는 소녀가 여덟 살 때 아를 근처에서 죽었다.

늑대가 죽은 후 소녀의 가출이 시작됐다. 서커스단을 따라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자유를 향한 소녀의 욕구를 채우기에는 부족했나 보다. 소녀를 발견한 사람들이 부모님과 소녀의 집을 빨리 찾을 수 없게 엉터리로 이름을 지어내기도 했다. 

나는 내가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엑스트라다. 급여명세서에 그렇게 적혀 있다. 배우는 이야기 안에 있고, 엑스트라는 밖에 있다. 166쪽

어른이 된 소녀는 배우가 됐다. 조연이었지만, 소녀에게 반한 사람들은 그녀를 캐나다에서 촬영하는 영화에 캐스팅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두 번째 영화는 없을 것이다. 첫 영화로 돈을 번 그녀는, 그 돈으로 쥐라에서 3년 동안 지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을 찾았고, 그런 곳을 쥐라에서 발견했다. 지금 그녀는 호텔에서 글을 쓰고 있다. 아마도 그녀의 삶을 담은 이 책이 그녀가 쓴 글일 것이다. "이곳에 머물며 잉크와 고독과 고요함으로 나의 꿀을 만드는 중"(31쪽)이다.

그녀를 캐스팅한 사람들은 그녀를 "무책임하고 미성숙하고 변덕스러운 더러운 년"(32쪽)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뒤에 숨은, 그들 인생에서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자유"라는 단어는 절대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나에게는 또 다른 소리도 들린다. "부럽다." 아, 이것은 내 속마음이구나.

그녀는 쥐라 요양원에서 만난 할머니와 함께 훌쩍 떠나버린다. 더 '자유'로운 곳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이 땅의 살아 있는 모든 이가 지닌 기본 권리, 사라지겠다고 말하지 않고 사라질 권리를 실행하고 돌아온다. 글쓰기는 이 권리를 행하는 다른 방식이다. 물론 조금은 수다스럽지만 아주 실용적이다. 32~33쪽

가벼운 마음으로 춤추듯 호텔로 돌아왔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계획을 세운 참이다. 계획을 세우는 건 재미있고 간단하고 쉬웠다. 그 계획은 1~2주 안에 글을 마치고, 나의 그늘에 안녕을 고하는 것이었다. 160쪽

책 한 권이 통째로 시가 된 소설!

한 문장도 놓치고 싶지 않은 소설을 만났다. 보뱅의 전작,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채운 에세이 『그리움의 정원에서』를 읽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작가에 대해 궁금해하곤 했다. 이렇게 맑고 아름다운 표현을 쓴 작가는, 여성 화자의 마음을 섬세하게 표현해 낸 작가는, 혹시 여성이 아닐까. (내가 아는데, 분명 아니다!) 

『가벼운 마음』은 책 한 권이 통째로 시가 된 소설이다. 그의 다른 소설도 읽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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