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너 자매 을유세계문학전집 114
이디스 워튼 지음, 홍정아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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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삶이란 죽음 다음으로 가장 슬픈 것! 236쪽

최근 이디스 워튼의 대표작 『이선 프롬』, 『여름』, 『순수의 시대』를 읽으면서 작품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는데, 그녀가 쓴 작품 수에 비해 국내에 소개된 작품 수가 적어서 아쉬웠다. 그러던 차에 『버너 자매』 출간 소식을 들었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작품이라니, 당장 읽을 수밖에!

『버너 자매』는 표제작인 「버너 자매」와 단편 「징구」, 「로마열(熱)」이 수록되어 있는 중단편 모음이다.

뉴욕의 쇠락한 뒷골목 지하에 자리 잡고 있는 가게는 「버너 자매」라는 아주 단순한 간판을 내걸고 버너 자매가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버너 자매는 바느질을 해주거나 장식소품을 만들어 팔았는데, 소소한 돈벌이에 만족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버너 자매 앞에 나타난 시계 가게 주인 허먼 래미. 가게 안에서 '한정된 삶'을 살고 있던 두 자매 앞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가게에서 수녀처럼 조용히 지내기만 했던 언니 앤 엘리자 마음에 처음으로 래미가 들어온다. 그러나 래미와 가까워진 것은 언니보다 활발하고 좀 더 넓게 생활했던 동생 에블리나였다. 그런 동생에게 질투를 느끼기도 하는 앤 엘리자, 그런데 래미가 그녀에게 청혼을 한 것이다. 하지만 앤은 '두통' 때문에 다른 건 할 수 없다며 청혼을 거절한다. 그러자 래미는 이내 에블리나에게 청혼한다. (이럴 줄 알았지.)

앤은 에블리나가 떠난 뒤 혼자 남게 될 자신을 걱정하면서도 공동으로 모아둔 돈을 에블리나에게 주며 그들의 결혼을 응원한다. 래미가 다른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어 떠나게 된 에블리나는 앤에게 편지를 보내 소식을 전하지만 이내 소식이 끊겨버린다. 수소문 끝에 래미가 직장에서 해고됐으며, 이전 직장에서 해고당한 이유도 아편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래미가 원한 것은 앤이나 에블리나가 아니라 결혼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결혼 지참금이었던 것이다.

결국 래미는 다른 여자와 도망을 갔고, 에블리나는 병을 얻어 창백한 망령 같은 모습으로 '버너 가게'로 돌아온다. 에블리나가 급성 폐결핵으로 죽자 가게를 내놓고 일자리를 찾아 나선 앤, 그러나 보통 어리고 센스 있는 점원을 구하는 곳이 많아서 앤에게는 쉽지 않다.

「버너 자매」는 이렇게 끝이 난다. 자매는 욕심내지 않았다. 그저 '한정된 삶'에서 좀 더 행복해지길 원했을 뿐인데, 그런 소소한 행복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앤을 통해 이디스 워튼의 섬세한 감정 묘사가 드러나 더욱 쓸쓸하고 허무했다.

뒷날 돌이켜보니, 앤 엘리자에게 그날 오후의 고독은 무엇인가를 예언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앞으로 내세에서 맛볼 고독의 에센스를 증류하는 것 같았다. (…) 언니는 애정을 동생의 운명에 너무 강렬하게 투사했기 때문에 그런 순간이면 마치 자기의 삶과 동생의 삶, 두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버너 자매」, 75쪽

그들이 '위로'라 믿고 건네는 말들은 그녀에게 빈 껍데기와 같았다. 그녀는 익숙하고 따뜻한 그들의 존재 바로 저편에 '고독'이라는 손님이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 것을 봤다. 「버너 자매」, 88쪽

겉으로 드러난 삶과 실제 삶의 잔인한 괴리

단편소설 「징구」는 독서 모임 '런치 클럽'에서 일어난 해프닝을 그리고 있다. 모임 회원들은 그들의 독서 모임에 자부심이 있었고, 재미만을 위해 책을 읽거나 책을 읽지 않고 독서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들의 지적 영토에 얹혀살아 가고 있다'라며 비난했다. 로비 부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어느 날 이 모임에 작가가 한 명 방문하고, 너도나도 작품에 대해 아는 척을 한다. 특히, 그들이 심취했던 건 '징구'라고 로비 부인이 말하자, 한마디씩 보탠다. 한참 신나게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선약이 있어서 먼저 일어난다고 말하는 로비 부인을 따라 함께 일어서는 작가. 사실 '징구'는 로비 부인이 그냥 던진 말이었고, 작가의 작품에는 이 '징구'가 등장하지도 않는다.(심지어 나는 읽다가 '징구'를 놓쳤나 싶어서 책을 다시 읽기도 하고, 사전에서 찾아보기도 했다.) 로비 부인에게 지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이 아무말 대잔치를 벌인 것이다. 책을 제대로 읽은 적도 없으면서 지적 허영으로만 가득 찬 사람들에게 널리 널리 읽히고 싶은 이야기다.

책이란 읽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책을 읽었다면 그 이상 무엇을 더 기대한단 말인가? 「징구」, 154쪽

「로마열(熱)」은 아주 짧은 단편소설인데, 아침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린 시절 친한 친구로 지냈던 그레이스 앤슬리와 얼라이다 슬레이드는 각자 딸과의 여행 중 로마의 한 호텔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그들은 얼핏 친해 보이지만, 실제로 친구가 알게 되면 뒷목을 잡게 될 이야기를 감추고 있다. 짧지만 아주 강렬한 이야기다.

세 편 모두 이디스 워튼의 장점, 즉 섬세한 감정 묘사가 잘 드러나서 그 감정들을 따라 읽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에 푹 빠져들고 만다. 이런 글을 쓰는 작가라니, 더 많은 작품을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제발, 제발! 더 많이 출간해 주세요!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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