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슬픔과 고독을 견디며

오늘도 자신만의 길을 걷는 당신을 위한 이야기

사는 모습은 달라도, 우리는 누구나 스토너다.

『스토너』 뒷표지

늦은 밤, 잠을 청하려고 책을 폈쳤다. 어느새 잠은 달아나버렸고, 5시간동안 꼼짝도 하지 않은채 읽어버렸다. 한 권의 책을 단숨에 읽어버린 건, 참 오랜만이다. 잠도 물리칠만큼, 『스토너』가 매력적인 인물인가? (줄리언 반스는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모로코산 금과 콜럼비아산 금의 장점에 관한 열띠고 장황한 설명이 있는 책이려니 생각했단다. 나는 표지 덕분에 그런 오해를 하지 않아도 됐는데, 최근 이 책의 표지가 바뀌었다. 1965년 미국에서 처음 발행됐을 때의 표지라고 하는데, 내용이 초판본도 아니고 표지가 초판본이라니. 책을 읽는데 크게 의미있는 것 같지는 않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들이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중세 문헌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문헌은 지금도 희귀서적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영문과 교수 윌리엄 스토너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의 동료들이 미주리 대학 도서관에 기증."

가끔 어떤 학생이 이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 윌리엄 스토너가 누구인지 무심히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노장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젋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주기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8~9쪽

작가는 이 책의 주인공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첫문장부터 개괄해서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평범한 삶인 것도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실패한 것도 같은 스토너의 삶. 분명 숨겨진 비밀이 있을거라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다.

요즘말로 하면, 스토너는 흙수저다. 그의 부모는 젊었지만 척박한 땅을 일구며 살다보니 가난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나이보다 더 들어보였다. 교육을 좀 더 받으면 농사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가난한 살림에도 스토너를 컬럼비아에 있는 미주리 대학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스토너는 친척 집에서 일을 도와주며 학교를 다녔다. 동급생들보다 많은 나이에 학교에 입학한 스토너는 수업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특히, 필수과목인 영문학 개론은 그에게 생전 처음 느끼는 고민과 고뇌를 안겨주었다. 처음에는 점수가 어떻든, 다음 학기에도 수업을 들을 수 있을 정도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점점 영문학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아처 슬론 교수가 제안한다. 졸업 후 다른 계획이 있는게 아니라면 좀 더 학교에 남아서 공부를 해보라고,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이다. 스토너는 고향에서 자신만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이 마음에 걸렸지만, 부모님은 스토너가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고 했다. 결국 스토너는 8년 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아처 슬론 교수 대신 영문학개론 수업을 맡게 됐다.

이때는 전쟁 때문에 대학을 떠났던 동료들이 대학으로 돌아올 때였다. 대학에서 아처 슬론과 가깝게 지냈던 친구가 둘 있었는데, 데이비드 매스터스는 전사했고, 고든 핀치는 돌아왔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동료들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리셉션에서 스토너는 학장의 사촌 아가씨 뻘인 이디스 엘레인 보스트윅을 만나게 된다. 스토너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이디스에게 적극적이었다. 잠시 컬럼비아에 머물기 위해 온 이디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녀에게 청혼까지 한 스토너. 다행히 스토너는 그녀의 부모를 설득해 몇 개월 뒤 결혼에 성공한다.

한 달도 안 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 그는 침묵을 배웠으며, 자신의 사랑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가 애정을 담아 그녀에게 말을 걸거나 몸을 만지면, 그녀는 그를 외면하고 내면으로 숨어 들어가 아무 말 없이 견디기만 했다. 그러고 나서 며칠동안 전보다 한층 더 힘들게 새로운 한계까지 자신을 혹사했다. 107쪽

이제 삶이 순탄하게 풀릴 것 같았던 스토너. 그러나 스토너는 한 번도 이디스에게서 사랑을 느낄 수 없었고, 이디스가 그레이스를 낳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육아에도 열성적이지 않았던 이디스는 스토너가 조교수로 승진하고 종신교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당이 있는 넓은 집으로 이사 가기를 원했다. 스토너는 은행장인 장인에게 대출까지 얻어 무리하게 집을 샀다. 스토너는 무리하게 대출한 빚을 갚으려고 더 오래 일을 했고, 퇴근 후에는 이디스 대신 육아와 집안인까지 병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너는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

사실 스토너는 가정에서 뿐만아니라 대학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동료 교수(홀리스 로맥스)가 지도하고 있는 대학원생(찰스 워커)에게 정당한 사유로 F학점을 줬는데, 찰스 워커가 문제 제기를 했고 지도 교수인 로맥스는 처음부터 스토너가 편견을 가지도 찰스 워커를 대했다고 주장했다. 얼마 후 로맥스가 영문과 학과장이 되었고, 종신교수라서 해임할 수 없는 스토너에게 불합리하게 강의 시간을 배정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열었고, 꽤 인기있는 강의를 해왔던 그에게 초보 강사에게나 어울릴 법한 강의를 배정하다니. 심지어 일주일에 6일 동안 아주 묘한 시간에 강의가 잡혀 있어서 연구를 하거나 퇴근해서 육아를 하기에도 어정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너는 역시 묵묵히 강의를 해냈다.

한편 오랫동안 육아에 관심 없던 이디스가 그레이스의 교육에 집착하게 되면서 스토너는 딸과도 시간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가 그레이스와 대화라도 하려고 하면 이디스가 날카롭게 그레이스를 다그쳤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에, 마흔셋이라는 늦은 나이에 스토너는 처음으로 완전한 사랑을 느꼈다. 상대는 그가 강의했던 대학원 세미나를 청강했던 같은 학교의 젊은 강사 캐서린 드리스콜이었는데, 그녀의 논문을 봐주면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스토너는 그녀의 좁은 방에서 사랑을 나누고, 책을 읽고, 학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이내 소문이 나버렸고 그를 탐탐치 않게 여겼던 학과장 때문에 그녀는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학과장으로부터 불합리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조교수에서 더이상 승진할 수 없었음에도, 그는 강의를 계속하며 대학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대학에서 '캠퍼스의 괴짜'로 '전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대학에서 전설이 되어 가고 있을 때, 그레이스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주리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스토너는 그레이스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길 원했지만, 그레이스는 뭘하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자신의 삶을 체념하게 된다. 그레이스가 선택한 것은 '임신'이었다. 그녀는 이디스가 그랬던 것처럼 결혼을 통해 감옥같은 집(특히, 엄마 이디스)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다. 결혼 후 이내 남편이 죽고 혼자 아이를 키우게 됐지만 그레이스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시부모 집 근처에 머물며 살았다.

"제 생각에 저는 일부러 임신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그걸 몰랐지만요. 제가 여기서 도망치는 걸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그것이 얼마나 저한테 필요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던 것 같아요." 349~350쪽

이디스 역시 그랬다. 그녀는 스토너를 사랑했던 게 아니라 다만 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디스의 부모는 '그래야만 하는 것들'을 가르쳤고 강요했다. 그녀는 스토너가 자신을 만지는 것도 싫어했지만, 결혼 후 아이가 있어야 할 때가 되자 적극적으로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했고, 평소에는 아무런 의욕이 없다가도 사람들이 집을 방문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아내 역할을 해냈다. 진짜 쇼윈도 부부가 따로 없다. 이디스의 아버지가 자살한 이후, 그녀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시도한 것 역시 그런 연장선 상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제서야 아버지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녀 역시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자신의 부모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디스 역시 그레이스에게 그런 것들을 강요했다. 스토너가 그레이스에게 만들어 준 회색빛 책상을 핑크색으로 색칠한 것, 스토너 옆에서 책을 읽고 대화를 하는 대신 리본이 치렁치렁하게 달린 옷을 입고 피아노를 배우고 아이들과 사교적으로 놀게 만든 것까지.

만약 스토너가 이디스와의 관계에서 좀 더 능숙하고, 유연성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디스와 그레이스도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들은 서로에게 입힌 상처를 용서하고, 자신들의 삶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지 생각하는 일에 빠져 있었다. 383~384쪽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스토너』 388쪽

나는 스토너가 한번쯤 통쾌하게 승리하기를 바랐다. 이만하면 스토너의 삶이 좀 더 편안해지고, 교수로서 성공해야 하지 않을까. 스토너를 부당하게 괴롭히는 학과장은 왜 추락하지 않고 계속 학과장 자리에 있는가. 한 명쯤은 기사처럼 나타나 스토너를 도와줘야 하는게 아닐까. 그러나 스토너의 삶이 끝날 때까지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대했던 반전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자신에게 반문했던 스토너처럼, 난 무엇을 기대했을까? 그의 삶에서. (아니면 우리 삶 속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극적이긴 하지만 고든 핀치가 스토너 곁에서 끝까지 떠나지 않고 그가 교수로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줬다는 것. 그리고 그를 또다른 위기에 빠트리긴 했지만 캐서린 드리스콜 덕분에 짧게나마 진정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 정도.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이렇듯 그리 성공적이지 않은, 평범한 삶을 살다간 '스토너'의 매력은 무엇일까? 스토너의 매력은 바로 그 '평범함'이 아닐까. 사는 모습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우리도 스토너와 다르지 않다는 것. 우리는 누구나 스토너였고, 스토너가 될 수 있다.

영문학개론 시간에 아처 슬론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낭독했을 때, 자극 받은 스토너의 상태를 묘사한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다. 스토너는 이렇게 문학적으로 사라져갔다.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장을 펄럭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짜릿한 느낌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살과 뼈를 훑었다.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그를 가둬주기를, 공포와 비슷한 그 옛날의 설렘이 그를 지금 이 자리에 고정시켜주기를 기다렸다. 창밖을 지나가는 햇빛이 책장을 비췄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 쓰인 글자들을 볼 수 없었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 392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밀 졸려 2020-09-14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스토너를 이렇게 잘 요약해 주시니까 다시 생각 나게 하네요,
이책을 다 읽고나서 알수없는 눈물을 흘렸다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